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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잃어버린 암자를 찾아, 천불암과 향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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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잃어버린 암자를 찾아서. 천불암과 향적사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 29> 마지막회

 

 

 안개

ⓒ 김종길

 


천왕봉으로 향했다. 모든 것이 안개 속이다. 바로 앞의 나무마저 분간하기 어렵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채색의 텅 빈 세계. 가만히 한참을 응시한다. 그제야 나무며, 풀이며, 산의 능선들이 어렴풋이 형체를 드러낸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은 원래 '무'라고 말하는 듯 온 세상을 가린 안개가 걷히면서 본래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법계사부터는 경사가 더욱 심해졌다. 천왕봉에 오르기가 쉽지 않음을 길은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다. 사실 이 가파른 길을 가는 것은 천왕봉을 오른다기보다는 잃어버린 암자를 찾아가는 길이다. 지리산 암자 중에서 천왕봉 아래에 유일하게 남은 것은 법계사 하나뿐이지만 오랜 세월 우리의 뇌리 속에서 잊혀져간 암자들은 무수히 많다. 법계사, 세존봉, 천불암, 제석봉, 천왕봉, 도솔암, 향적사, 법주굴…. 이들 지명만 봐도 온통 불교식 이름이다. 천왕봉을 위시해서 지리산 전체가 예부터 '불국토'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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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
ⓒ 김종길

 


잃어버린 암자를 찾아서

천불암을 찾기로 했다. 지리산 유람록을 처음으로 남긴 이륙(1438~1498)은 <유지리산록>에서 "법계사는 천왕봉과의 거리가 20여 리이다. 배 모양의 큰 바위가 있는데, 천왕강(天王舡)이라 부른다. 이 절에서 천왕봉 쪽으로 3, 4리쯤 되는 곳에 또 집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는데, 수십 명이 들어앉을 수 있다. 이곳을 천불암(千佛菴)이라 부른다. 예로부터 세상을 피한 자들이 살던 곳으로, 부뚜막, 굴뚝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적고 있다.

천불암에 대한 기록은 지리지에도 더러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천불암(千佛庵)은 천왕봉 밑에 있다. 돌이 집처럼 생긴 것이 있는데, 수십 명을 들일 만하다"고 했다.  <대동지지>에는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천불암이 있는데, 집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다. 그 아래에 법계사가 있고,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는데, 동쪽으로 큰 바다를 바라보고,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지고 있으며 법주굴(法住窟)이라고 부른다"며 유람록과 엇비슷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불암(千佛菴). '집처럼 생긴 큰 바위'라고 했다. 유일한 단서는 법계사에서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곁에 있다는 것이었다. 가파른 등산로를 오르며 집채만 한 바위를 매번 유심히 봤다. 그러기를 수어 번, 마침내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거대한 바위벼랑이 보였다. 그러나 요리조리 몇 번을 살폈으나 수도처로는 마땅하지 않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길옆으로 정말 집처럼 생긴 큰 바위가 왼편으로 나타났다. 천불암이었다.

불과 10여 미터, 수풀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갔다. 엄청난 크기의 바위 아래로는 150cm 정도 되는 높이의 굴이 있었다. 앞이 탁 트인 굴 안은 넓었다. 이 정도면 암자라기보다는 천연수도처에 가깝다. 벽에는 누군가 새긴 이름들이 낙서처럼 어지럽다. 지금도 간혹 비박을 하는 이들이 이곳에서 비바람과 밤이슬을 피한 흔적들이 더러 보인다. 제법 널따란 공간은 십여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공간이다. 굴 안에 들어앉으니 안방처럼 편안하다. 수풀에 가려 있지만 은둔처로서는 그만이다. 세상과 단절된 편안함이 느껴진다. 바닥에도, 천장에도 그을린 흔적들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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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불암 터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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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불암 터의 굴 안
ⓒ 김종길

 


한평생을 지리산에 바친 김경렬 옹은 <다큐멘터리 지리산>에서 "법주굴은 법계사와 천왕봉 사이에 있었던 암자로 절이라기보다는 천연의 수도처였던 곳이다. 근세에 와서는 동학농민전쟁과 의병란 때 의병도총부 소관의 부상병 치료소, 여순병란, 6·25전쟁 중에는 빨치산의 야전병원이 되었다. 지금은 때론 천막을 갖지 않은 등산객들이 여기서 불을 지펴 바위를 데운 뒤 그 위에 담요를 깔고 밤을 새운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암법주굴은 천불암이다.

그럼, 그가 말한 '(암)법주굴'은 어디일까. 천불암이야 그 위치가 명확히 밝혀졌지만 (암)법주굴의 소재는 명확하지 않다. 이륙(1438~1498)은 <지리산기>에서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천불암과 법계사가 있다.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향하고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지고 있다. 지극히 맑은 운치를 지녔는데, 암법주굴(巖法主窟)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유람록에 기록되었지만 오랫동안 잊힌 채 전설로만 전해지던 '(암)법주굴'은 또한 이성계가 팔도 명산에 기도를 올리던 굴로 전해지는데, 지금은 법계사 오른쪽 2km 되는 곳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02년에 지리산에 오른 김회석은 <지리산유상록>에서 천왕봉에서 내려와 "법주암(法珠巖)에 나란히 앉아서 가지고 온 술을 마신 뒤 바삐 걸어 벽계암에 도착하였다."며 천왕봉과 벽계암(법계사) 사이에 법주암(법주굴)이 있었음을 적고 있다. 아쉽게도 법주굴까지는 가볼 수가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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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선문
ⓒ 김종길

 


배도 아닌 것이 문도 아닌 것이

천불암을 지나자 개선문이다. 벼랑 밖은 안개절벽이다. 그 절벽으로는 긴 층계가 놓여 있다. 허공에 걸친 층계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지금, 나는, 어디인가…. 모든 것은 안개 속이었다.

남강의 발원지 천왕샘을 지난다. 높은 바위벼랑의 어디에 틈이 있기에 이처럼 물이 솟아난단 말인가. 절구 모양으로 파놓은 아래위 두 개의 둥그런 웅덩이는 홈을 파서 이었다. 고인 물을 한 바가지 떠서 마신다. 달다. 이제 길은 하늘 끝으로 이어지는 직벽에 가까운 길이다. 철 계단에 이은 돌계단, 사람들은 이곳에서 몇 번이나 걸음을 쉬어야 한다. 앞만 보고 가기에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정상으로 가는 길. 여전히 미망이다.

500년 전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오른 김일손도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는 길로 힘겹게 올랐다. 그의 <두류기행록>을 잠시 보자. "조금 쉬었다가 바로 올라갔다. 배 같기도 하고 문 같기도 한 바위(개선문)를 지나갔다. 길은 꾸불꾸불하고 돌 모서리를 붙들고 나무뿌리를 잡고 해서 겨우 봉우리 위에 올라섰다. 그때 안개가 사방에서 몰려와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향적사의 승려가 솥을 가져와 기다리고 있기에 널찍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샘(천왕샘으로 보인다)을 이루고 있어 물을 떠서 밥을 지었다. (…) 저물녘에 천왕봉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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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왕샘
ⓒ 김종길

 


마침내 천왕봉에 이르렀다. 자욱한 안개 속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정상에 올랐다는 희열보다는 사방의 안개에 홀로 서 있음을 깨달을 뿐이었다. 안개가 걷히길 한참을 기다렸으나 잠시 하늘을 여는가 싶더니 다시 오리무중이다. 안개 속을 한참 더듬다 장터목으로 향했다.

이젠 길마저 짙은 안개로 가려졌다. 오직 눈으로 더듬어서야 겨우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길이 스스로를 지웠다 드러냈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를 몇 번이고 반복하기를 한참, 고사목 지대가 나타났다. 이미 앙상하게 죽은 나무와 가지. 모든 것을 벗어던진 채 본래의 면목을 그대로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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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왕봉 가는 길
ⓒ 김종길

 


제석단과 향적사 이야기

통천문을 내려서면 제석봉이다. 제석천궁에 장엄되어 있는 수많은 보배 구슬의 그물인 인다라망이 서로 빛을 발하여 안개 속의 적군을 물리치고 있다.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사천왕을 거느린다는 제석천이 지리산에선 천왕 아래에 있다. 아무렴 어떤가. 다만, 하늘에 대한 외경을 말할 뿐이니 그 자리를 탓할 것인가.

제석봉에는 제사를 지내던 제석단이 있었다. 1586년에 지리산을 오른 양대박(1543~1592)은 <두류산기행록>에서 폐허가 된 제석당 터와 신을 모시는 사당인 제석신당에 대해 적고 있다. 그보다 뒤인 1610년에 지리산을 찾은 박여량(1554~1611)은 <두류산일록>에서 "제석당의 규모는 제법 넓어 들보의 길이가 거의 23~24자 정도나 되었다.

좌우의 곁방을 제외하고 가운데 삼 칸의 대청이 있었다. 지붕은 판자로 덮었는데 못을 박지 않았고, 벽 또한 흙을 바르지 않고 판자로 둘러놓았다"며 한 노파가 돈을 내어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아 제석당을 새로 지었다고 적고 있을 정도로 제석당은 인근 주민들에게 신령스러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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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석봉 가는 길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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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천문
ⓒ 김종길

 


제석봉과 더불어 유명한 향적사도 있었다. <화엄경>에서는 보살이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으나 굳이 그 거처를 아홉 곳으로 나눈다면 향적산은 북방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럼, 향적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조선 문인들의 유람록에서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향적사는 지리산을 유람하던 조선의 선비들이 서쪽에서 천왕봉을 오르거나 천왕봉에서 하산할 때 반드시 거치거나 머무는 캠프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

이륙(1438~1498)은 <지리산기>에서 "천왕봉에서 서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향적사가 있다. (…)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몇 절은 모두 나무판자로 지붕을 덮었는데, 살고 있는 승려가 없다. (…) 지리산의 물줄기는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향적사 앞에서 발원하고 또 하나는 법계사 아래서 발원하여 살천에 이르러 합쳐져 하나가 된다"고 했다.

이 글과 김종직, 김일손, 양대박, 박여량 등 조선시대에 천왕봉을 올랐던 문인들은 모두 천왕봉에서 석문(통천문)을 지나 향적사에서 머물렀다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향적사는 천왕봉 아래 장터목 대피소 동쪽에 있었으며 지금의 중산리 계곡의 발원지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산꾼들이 향적사라고 추정하고 있는 곳을 가보려 했으나 역시나 폭우로 인해 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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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석봉 고사목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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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석봉 고사목
ⓒ 김종길

 


그럼, 향적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화엄경>에서 문수보살이 언어로 '불이'를 설명하자 유마거사는 오로지 침묵을 지켜 진실 그 자체를 보여 주었다. 침묵이 있은 후 유마거사는 대중들에게 음식을 제공한다. 초능력으로 나라 전체가 향기로 가득한 '중향(衆香)'이라는 정토를 대중 앞에 출현시킨다. 그곳은 '향적(香積)'이라는 부처를 중심으로 보살들만이 살고 있는 이상향이다.

마침 이 정토에서 향적불을 비롯해 보살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유마거사는 한 사람의 화신 보살을 만들어서 남은 밥을 얻어 오도록 중향으로 보내고, 이에 부처는 발우 가득 향기 높은 밥을 담아내어주며 그 나라의 보살들을 보낸다. 중향국의 보살들과 함께 돌아온 화신의 보살은 향기로운 밥을 대중 앞에 내놓는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배부르게 먹어도 음식은 줄어들지 않았고, 마음은 더욱 편안하고 즐거워졌고, 몸에서는 비유할 길 없는 아름다운 향기가 풍겨 나왔다.

장터목 대피소에서 중산리 계곡으로 하산하는 길. 계곡 물소리가 세차다. 빗방울도 굵어졌다. 밖으로 향하던 마음이 오롯이 안으로 들어온다. 잠시 계곡으로 다가섰다. 물빛이 옥빛이다. 지난 1년 동안의 암자 순례는 결국 저 맑은 본마음 그것을 찾는 것이었다. 계곡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 옛날 누군가도 이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시인 응우엔꽁쭈의 시를 떠올려본다.

"지난날 많은 이들 앉았던
같은 자리에 오늘 나 앉아 있네.
천년 뒤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와서 앉아 있겠지.
노래하는 자 누구며, 듣는 자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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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산리 계곡 물빛
ⓒ 김종길

 


연재를 마치며

이로써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은 끝났다. 2014년 6월 지리산 북쪽 도솔암에서 시작한 암자 연재는 동쪽, 남쪽, 서쪽의 암자들을 순례한 후 1년을 넘겨서야 끝이 났다. 현재 지리산에는 모두 50여 곳이 넘는 암자가 있다. 이곳을 거의 순례했으나 연재에서는 모두 싣지 못했다. 이후에 책에서 보충하도록 하겠다.

지리산 암자 순례는 그 자체로 불국토 지리산을 온전히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그 길에서 수많은 스님들을 만나고 불자들을 만나고 심지어 불교와 관련 없는 이들도 만났다. 그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는 스승이자 깨달음을 주는 이들이었다. 1년 남짓한 암자 순례는 부처의 세계란 결국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세계, 우주 자체, 우리 자신이라는 걸 깨닫는 과정이었다. 이 현실 세계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그리하여 스스로 깨닫는 '자리행'과 남을 깨닫게 하는 '이타행'을 실천하는 것이 곧 순례의 목적임을 알게 되었다.

<화엄경>에서 구도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선재동자는 53선지식을 만난다. 그러나 선재동자가 만난 선지식들 중에는 불교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이들, 심지어 매춘부도 있었다. 선재동자는 오로지 그 사람이 도에 통달해서 자기를 깨닫게 할 수 있는지만 기준으로 삼고 구도를 계속했다. 소년이든, 왕이든, 의사이든, 외도인 바라문이든, 배 만드는 목수이든 매춘부이든, 다른 모든 조건들은 무시했다. 세속의 모든 조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도를 위해서만 구도를 계속했다.

선재동자의 구도여행은 처음 지혜의 대표자인 문수보살에게서 시작하여 쉰두 번째 문수보살로 다시 돌아와서 마지막 쉰세 번째 보현보살에서 끝난다. 53선지식의 방문이 모두 끝나자 입법계품이 끝나면서 <화엄경>도 끝이 난다. 마지막 선지식인 보현보살의 최후의 설법으로 선재동자는 깨달음의 완성이라는 궁극의 목표로 향하는 새 출발점에 서게 된다. 결국 선재동자의 새 출발로 <화엄경>은 끝맺음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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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운치 있는 유후인 이곳, 알고 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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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운치 있는 이 건물의 정체, 과연 뭘까요?

 

일본 규슈 유후인은 관광객으로 늘 붐비는 곳이죠. 그러나 유후인 역과 긴린코 호수로 이어지는 거리만 북적댈 뿐 이곳을 조금만 벗어나면 이내 한적한 시골 풍경이 펼쳐집니다.

 

 

긴린코 호수 남쪽에는 부쓰산지(佛山寺)라는 작은 절이 있습니다. 헤이안 시대에 쇼쿠(性空) 스님이 창건한 절입니다. 인적 하나 없는 외딴 마을 고샅길을 따라 홀로 이 절을 찾아 나섰습니다.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말이죠. 안내판도 없어 잠시 골목길을 헤매다가 마을 귀퉁이에 있는 작은 카페 여주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부쓰산지를 찾았답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데도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경내는 시원했습니다. 아주 정갈했지요. 전통 방식으로 지은 오래된 법당과 산문의 지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법당을 지나 산문으로 돌아 나오던 중 숲 속에 들어앉은 예쁜 건물과 마주쳤습니다.

 

 

무슨 초막인가 했는데 가까이 다가가보니 차를 마시는 다실 같았습니다.

 

 

입구의 잘 다듬은 돌확에선 맑은 샘물이 펑펑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거실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선적이었습니다. 검박한 탁자에 꽃병 하나와 도자기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거실 양쪽으로는 문을 내어 안으로 통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깔끔하다 못해 경건한 분위기마저 들 정도로 매력적인 이 공간은 아무리 봐도 다실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이렇게 운치 있는 다실이 있구나, 감탄을 하며 안을 들여다보며 좌우를 살피다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습니다. 다실이 아니었습니다.

 

 

그제야 거실 좌우에 남자의 소변기가 눈에 띄었습니다. 순간 엄청난 충격에 빠졌습니다. 예쁜 풍경에 정신이 팔려 좌우에 있는 소변기의 존재를 뒤늦게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은 잠시, 이런 운치 있는 화장실이 있다는 데 다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부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동시에 아주 흡족한 기분에 젖어 산문을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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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한마디 못하면서 무조건 떠난 배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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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한마디 못하면서 무조건 떠난 배낭여행

- 온 가족이 합쳐도 '스미마셍', 그래도 별 탈 없었다

 

   하늘에서 본 후쿠오카 시내 전경, 후쿠오카는 인구 150만이 넘는 대도시로 규슈의 중심도시이다.

 

“스미마셍”

 

일본에 도착해서 여행을 마칠 때까지 내가 거의 유일하게 구사한 일본말이다. 처음 규슈 여행을 계획한 건 지난 3월쯤이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이던 <지리산 암자 기행>이 끝나는 7월쯤에 일본을 다녀온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 후 아침저녁 아이패드로 일본어 회화를 들었으나 그마저도 건성이었으니, 막상 7월이 되고 여행을 떠나야 했을 때 단 한마디의 일본어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믿은 건 역시 언어가 아니라 막연한 용기였다. 여행 준비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아는 지인의 도움으로 할인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었고, 숙소, 교통 편 등 세부사항은 모두 아내의 몫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믿는 구석이 있는 거도 아닌데, 그냥 떠나면 된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아, 유일하게 여행자라는 생색을 낸 건 아내가 잡은 여행일정에 동선을 확인해 준 것뿐이었다. 실제로 여행 첫날 나는 아무런 지식도, 사전준비도 없이 아내의 손에 끌려 공항으로 갔던 것이다.

 

  하카타역은 규수의 관문으로 대규모 상가 등으로 늘 활기차다.

 

규슈 여행은 일본어를 전혀 몰라도 된다는 풍문은 사실이었다. 길을 묻는다거나 교통편을 물어보는 것 등 일상적인 물음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이해를 못하면 직접 앞장서서 안내하는 일본인들의 친절함 덕분에 언어의 부족에서 오는 여행의 불편함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후 2시 55분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 건 출입국사무소를 통과하는 것이었지만 그건 일종의 통과의례여서 긴장감은 있을지언정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후쿠오카 공항역에서 하카타역 가는 승차권을 구입하다. 한글 매뉴얼이 있어 편리하다.

 

문제는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하카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일단 아내는 셔틀버스를 타고 국내선 청사로 이동해서 다시 지하철을 타야 된다고 했다. 셔틀버스를 타는 건 의외로 쉬웠다. 공항 출입문을 빠져나오자마자 승강장이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음. 국내선 청사에 도착했을 때 가이드북을 본 아내가 잠시 멈칫했다. 가이드북에는 셔틀버스의 진행 방향 반대편에 지하철역이 있다고 한 것. 그러나 지하철역은 버스가 멈췄을 때 바로 앞에 있었다.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주위를 살피자 답은 명확해졌다. 도로공사 중이라 버스가 잠시 역주행을 했던 것이다. 마침 다른 한국관광객도 헷갈렸는지 일본인에게 지하철역을 묻고 있어 그의 도움으로 바로 앞 지하철역을 이용하면 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다음은 승차권을 끊는 문제에 봉착했다. 하카타역까지는 두 구간, 요금은 260엔. 한참이나 두리번거린 끝에, 한글 매뉴얼을 발견했다. 이런 횡재가 있나. 단번에 표를 끊는 데 성공, 근데 문제는 여전히 남았다. 초등학생 딸의 승차권이 문제였다. 어떻게 끊지? 한참을 헤맨 끝에 130엔 반액권 버튼을 찾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플랫폼으로 갔다. 지하철은 문이 열린 채였고 서서히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근데 하카타로 가는 순방향인지 아니면 역방향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쩔 줄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지하철 안을 향해 소리쳤다.

 

  후쿠오카 공항역과 하카타역은 지하철 두 구간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스미마셍, 하카타 스테이션?”

“예, 갑니다. 어서 타세요.”

 

맙소사! 돌아오는 답이 한국말이다. 어렵게 용기를 내서 질문을 던진 아내가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평소 영어와 담을 쌓고 있던 아내의 용감무쌍함이 이때부터 여행 내내 나타났다. 이렇게 해서 일본 여행의 첫 대중교통 이용은 성공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후쿠오카 공항역이 출발역이자 종착역이었다. 반대편으로 가는 지하철은 없고 오로지 하카타로만 가는 지하철만 있었던 것이다.

 

  '미도리노마도구치'는 티켓 오피스로 한국에서 구입한 교환권을 JR패스로 교환해야 지정석으로 갈 수 있다.

 

하카타역에서 내려 제일 먼저 한국에서 구입한 교환권을 JR(Japan Rail)규슈레일패스로 교환해야 했다. JR규슈레일패스(북규슈)는 3일권이 8,500엔이다. 한국에서 예약한 패스를 현지에서 교환해야 지정석으로 갈 수 있다.

 

미리 알아둔 곳은 ‘미도리노마도구치(티켓오피스)’. 아내는 녹색 간판을 찾으면 된다고 했다. 셋은 일제히 눈에 녹색 불을 켰다. 다행히 곧장 찾을 수 있었다. 오피스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고 우린 한참이나 서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우리 차례가 되었을 때 서투른 영어로 패스 교환을 애기했더니 지정석 예약은 다른 오피스란다. 이런, 그것도 모르고 한참이나 기다리다니. 하는 수 없이 다시 나와서 또 다른 녹색 간판을 찾아야 했다.

 

  JR규슈레일패스만 있으면 일정 기간 동안 기차를 무한정 탈 수 있다. 북규슈 3일권은 8,500엔이다.

 

다른 오피스의 직원이 먼저 영어로 말을 걸었다. 다시 서툰 영어가 오피스 안을 오갔다. 지정석으로 교환하는 데에는 조금은 높은 난이도의 의사소통이 필요했다. 결국 반은 한국말이 섞인 영어로 3일 동안의 일정과 이동할 역을 설명하는데 성공했다. 이미 지정석이 없는 구마모토에서 아소 구간만 자유석으로 가고, 나머진 모두 지정석을 예약한 것. 이로써 앞으로의 여행은 탄탄대로에 서게 됐다.

 

  '미도리노마도구치'에서 한국에서 구입한 교환권을 JR패스로 교환한 후 이동할 역과 기차의 지정석을 예약해야 한다.

 

우리 셋은 가장 큰 일을 완벽히 했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엄청난 자신감은 세부 일정까지 챙기는 여유를 가져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구마모토로 가는 신칸센 개찰구를 미리 알아두기로 한 것.

 

그런데 아무리 봐도 중앙에 있는 개찰구에는 신칸센이 안 보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용기백배하여 안내센터를 찾았다. 역시 이번에도 “스미마셍”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근데 여직원은 영어로 말하란다. 그러면서 반대편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내심 의심도 되고 해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타박타박 걸어 나오는데 반대편으로 개찰구가 하나 더 보였다. 그리고 신칸센 확인, 빙고.

 

  하카타역 인근 풍경. 하카타역은 교통의 요충지로 늘 붐빈다.

 

다음 날 기차 타는 곳까지 확인했으니 이제 숙소를 찾으면 된다. 치쿠시 방면의 출구로 나와 호텔을 찾기 시작했다. “저기야!” 이번에도 역시 아내가 단번에 찾았다. 이래저래 여행자인 나의 존재감은 점점 엷어지기 시작했다.

 

  하카타역 주위에는 음식점과 상가들이 즐비하여 늘 붐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더운 여름날에 별 탈 없이 호텔에 도착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감사했다. 호텔을 접수하고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일본말을 못해도 여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일행은 호텔을 빠져나와 하카타 시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세 명을 다 합쳐도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본말은 ‘스미마셍’ 오직 하나뿐. 우리 가족의 좌충우돌 북규슈 5일간의 배낭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하카타역 주위에는 음식점과 상가들이 즐비하여 늘 붐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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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었으면 후회했을 후쿠오카 명물, 한입크기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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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었으면 후회했을 후쿠오카 명물, ‘한입크기교자’

일본어 한마디 못하면서 무조건 떠난 배낭여행②

 

호텔에 짐을 푼 우린 무사히 일본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벌러덩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렇게 스스로를 대견해 하다가 좀 더 용기를 내어 역 주위를 돌아보기로 했다. 마침 저녁 무렵이라 식사할 곳도 찾아야 했다.

 

 ▲ 하카타역 인근은 즐비한 음식점과 오가는 사람들로 붐빈다.

 

일단 시원한 생수를 들이킬 필요가 있었다. 그때까지 긴장으로 느끼지 못했던 아스팔트의 열기가 뒤늦게 온 몸을 데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텔 앞 편의점에 들러 물건 값을 계산하는 걸 시작으로 물건을 사는 데에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듣던 대로 편의점과 자판기는 거리마다 넘쳐났다.

 

▲ 거리마다 사람들로 북적대는 하카타역 일대.

 

역 광장을 지나 음식점 거리로 들어섰다. 유동인구가 많은 하카타역 일대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일본어로 적힌 현란한 간판들,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음식점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와 냄새 들이 더운 공기와 합쳐져 사람의 혼을 빼놓았다. 고급 음식점과는 달리 거리로 마구 쏟아져 나오는 음식점의 연기와 냄새는 이곳이 그토록 청결한 일본이 맞나 하고 의심할 정도로 더운 공기에 섞여 여간 불쾌한 게 아니었다.

 

 ▲ 하카타역 인근 어느 식당 벽면에 적힌 메뉴판.

 

일단 거리의 끝까지 가기로 했다. 거기서 다시 돌아 나오며 적당한 음식점을 고르기로 한 것. 낯선 일본어 간판과 한자가 간간이 섞인 메뉴로 무엇을 하는 식당인지 대충 짐작해 보기를 수어 차례. 마침 한 쪽으로 ‘한국어 메뉴판 있음’이라는 낯익은 글자를 발견했다.

 

▲ 하카타역 인근의 어느 식당

 

▲  식사를 했던 하카타역 인근의 마스마사식당.

 

극락이 따로 없는 맛, ‘한 입 크기 교자’

가게 몇 곳을 서성이다 그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제법 넓은 홀은 손님들로 북적댔다. 미모의 여종업원이 활짝 웃으며 안내한다. 일단 만족스럽다. 근데 메뉴판이 온통 일본어다. 당황한 것도 잠시, 방금 전에 봤던 ‘한글 메뉴판 있음’을 떠올리며 다시 영어로 짧게 주문을 했다. “코리안 메뉴?” “오케이” 종업원은 큼직한 한글 메뉴판을 가져왔다.

 

 ▲ 일본어 메뉴판

 

그림까지 들어간 한글 메뉴판을 보자 여유가 생긴 우리는 대인의 풍모로 음식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일본에 왔으니 먼저 ‘나마비루(생맥주)’를 한 잔씩 주문했다. 음식으로는 하카타 토종닭으로 만든 ‘다이후쿠모찌’(190엔) 6개를 주문했다.

 

 ▲ 시원한 나마비루(생맥주)는 식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

 

다이후쿠모찌는 말 그대로 일종의 떡이다. 고기완자에 곤약페이스트를 피로 감싼 것으로 맛이 쫀득쫀득하고 식감이 탱탱했다. JAS(일본농림품질표시제도) 인정 식품이란다. 그리고 갖은 회와 해산물이 들어간 비주얼이 좋은 명물 해물 덮밥(980엔)과 하카타 한 입 크기 만두(450엔)도 주문했다.

 

▲ 식당에서 주문한 명물 해물 덮밥.

 

 ▲ 하카타 토종닭으로 만든 다이후쿠모찌.

 

하카타 한 입 크기 만두(교자)는 그중 제일 맛있었다. 겉은 바싹한데 속은 아주 부드러워 식감이 뛰어났다. 게다가 손가락보다 작은 크기에 만두소를 넣은 교자는 한입에 쏙 들어가서 만두피가 터질 염려도 없었다.

 

 ▲ 식당에서 주문한 한 입 크기 만두.

 

한 입 크기의 작은 교자인 ‘히코구치(一口)교자’는 후쿠오카의 명물 음식이다. 원래 일본에서 교자는 반찬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한데, 후쿠오카 교자는 안주로 생각한단다. 그래서 술집에서 교자를 흔히 맛볼 수 있었다.

 

 

시원한 생맥주에 교자 한 입이면 극락이 따로 없다. 후쿠오카에서 이것을 먹어 보지 않았더라면 크게 후회할 뻔했다. 후쿠오카에 유명한 교자집이 많다고 하니 다음에는 꼭 들러볼 일이다.

 

▲  하카타역 인근의 어느 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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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선술집에서 완두콩을 주문하는 완벽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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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선술집에서 완두콩을 주문하는 완벽한 방법

일본어 한마디 못하면서 무조건 떠난 배낭여행②-2

 

일본에서의 첫 식사를 마친 우리는 맛보다는 식당과 메뉴를 우리 힘으로 선택했다는 성공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뻔뻔스럽게도, 우리의 눈썰미 때문이 아니라 한글 메뉴판 덕분에 쉽게 음식을 주문하고 먹을 수 있었다는 생각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진실을 깨달은 건 여행의 마지막 날 다시 하카타로 돌아와서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어느 술집에 갔을 때였다.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선술집을 찾았다.

 

사건의 발단은 무모한 용기 때문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 ‘스미마셍’ 하나로 북규슈 일대를 아무런 문제없이 여행한 우리는 넘치는 자신감에 들떠 있었다. 마지막 날까지 여행을 잘 했다는 안도감에 우리는 자축하는 의미로 술집을 찾기로 했다.

 

 역시 '나마비루(생맥주)'는 맛있었다.

 

하카타역에서 지도를 보고 금방 호텔을 찾아내고 능숙하게 체크인을 한 후 적당한 술집을 찾아 나섰다. 근데 여태까지와는 달리 가게 간판이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다. 역에서 조금은 멀리 떨어진 곳이라 한글과 영어로 쓰인 간판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많던 관광객들도 보이지 않고 온통 일본어만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눅까진 들진 않았다. 일단 술 ‘酒’자가 적힌 간판을 찾기로 했다.

 

 손님 두엇이 앉아 있는 선술집의 내부 풍경.

 

한참 거리를 쏘다니다 적당한 술집 두 군데를 찾았다. 결국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현대식 술집을 뒤로하고 맞은편에 있는 일본의 선술집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오픈된 주방의 바에 손님 두어 사람이 각기 앉아 있었다. 일본에서는 혼자 식사하거나 술을 마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 기억났다.

 

 

 우리를 당황하게 했던 선술집의 메뉴판.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좌석에 앉았다. 우리로 치자면 조금은 깔끔한 선술집 정도였다. 일단 메뉴판을 보았다. 예상대로 온통 일본어다. 이번에도 한국 메뉴판이 있는지를 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노”였다. 그림이나 사진이 들어 있는 메뉴판도 없다고 했다. 이쯤 되자 여행 내내 긴장한 적이 없던 우린 대략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  닭튀김.

 

일단 낯익은 한자로 메뉴가 무엇인지를 짐작해 보기로 했다. 자신(刺身)은 회일 테고, 계(鷄)자로 시작하는 것은 닭요리일 테고, 돈족(豚足)은 족발일 테고…. 근데 문제는 한자가 적혀 있지 않는 메뉴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순간 여행 전에 스마트폰에 깔아두었던 번역기 앱이 번쩍 떠올랐다.

 

▲  교자.

 

“난데스까?”를 반복하며 질문을 퍼부은 후 앱에서 ‘니와토리’, ‘이카’, ‘교자’ 등의 일본어를 찾아 결국 몇 가지 안주를 주문하는데 성공했다. ‘덴푸라’인지 물었으나 아니라고 했던 닭튀김(니와토리), 교자로 통했던 만두, 오징어(이카 슈마이) 등이었다.

 

 선술집에서 온갖 몸짓으로 주문에 성공한 오징어슈마이.

 

특히 딤섬의 일종으로 보이는 오징어 슈마이는 대박이었다. 그렇게 한참 웃으며 즐기고 있는데 기름기가 많은 음식들이라 어째 속이 느끼하니 니글거렸다. 맥주 안주로 뭔가 색다른 것이 필요했다.

 

 

 역시 '나마비루(생맥주)'는 맛있었다.

 

이때 아내가 콩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근데 메뉴판에는 없었다. 우연히 다른 테이블로 나가는 걸 아내가 봤던 것이다. 껍질 채 삶은 완두콩이었다. 앱으로 일단 콩이 ‘마메’라는 걸 확인하고 주문하자 종업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 근데 껍질 채 삶은 콩이 아니라 낱개로 한 알씩 나오면 어떡하지.” 딴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종업원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손가락으로 콩 껍질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콩이 여러 개 있다는 걸 알려줘야 했다. 아주 진지한 얼굴 표정을 지으며 콩 껍질 안에 콩이 여러 알 들어가 있다는 걸 아주 생생하게 표현하면서 동시에 소리를 냈다.

 

“두, 두, 두, 두, 오케이?”

“두, 두, 두, 두, 오케이.”

 

 선술집에서 온갖 몸짓으로 주문에 성공한 완두콩.

 

종업원은 뜻밖의 제스처에 박장대소를 하더니 손가락으로 둥근 원을 크게 그리며 주방으로 갔다. 잠시 후 우린 껍질에 쌓인 짭짤하니 맛난 완두콩을 감격스럽게 먹을 수 있었다.

 

 선술집 주인이고등학교 야구부 출신인지 벽에 사진과 상장 들이 걸려 있었다.

 

우리 옆에는 두 여자가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다. 우리의 우스꽝스런 해프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주방은 우리 때문에 웃음이 넘쳐났고, 종업원은 연신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무튼, 즐거운 저녁이었다. 아, 근데 이 집 사방 벽에는 야구 선수들의 사진과 상장들이 많이 걸려 있다. 예사 집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어떤 인연이 있는 걸까. 처음인데다 일본어를 못하는 우리로선 거기까진 물어볼 수 없었다.

 

 선술집 주인이 고등학교 야구부 출신인지 벽에 사진과 상장 들이 걸려 있었다.

 

세상 어디를 막론하고 서민들의 왁자지껄한 술집에선 해방감이 든다. 여행을 왔다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이런 선술집만 한 곳이 또 있을까!

 

# 이상 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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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기차여행의 백미, 에키벤의 마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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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차 여행의 백미, 에키벤의 마력

일본어 한마디 못하면서 무조건 떠난 배낭여행③

 

 하카타역의 명물, 크루아상을 파는 가게. 이른 아침에는 손님이 뜸하지만 평소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이튿날 아침, 호텔을 나섰다. 이제 본격적인 여행이다. 신칸센을 타고 첫 여행지 구마모토로 가야 한다. 조금 서두른 탓에 하카타역에는 일치감치 도착했다. 개찰구를 통과하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이 가게에서 파는 크루아상은 플레인(158엔), 초코(179엔), 사쓰마이모(고구마, 189엔) 세 종류로 맛이 뛰어나 인기가 많다.

 

전날 긴 줄이 늘어서 있던 크루아상 가게(일 포노 델 미뇽)였다. 아내가 긴 줄을 보고 이 가게가 하카타역의 명물이라고 했다. 향긋한 냄새 때문에 한 번 맛보지 않고는 발걸음을 옮기기 어려울 정도란다.

 

 

어제의 긴 줄과는 달리 아침이어서인지 손님은 두서넛뿐이었다. 일단 플레인, 초코, 사쓰마이모(고구마) 세 종류만 있는 메뉴에서 한 개씩을 골라 개찰구로 들어갔다.

 

▲  승강장 바닥의 탑승 번호까지 확인 후 에키벤을 구경했다.

 

기차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승강장까지 미리 가보기로 했다. 이렇게 치밀한 여행은 처음이다. 일본어라고는 “스미마셍”밖에 모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숙소와 교통편을 다 예약하고 난 아내가 어느 날 문득 걱정이 되었는지 “정말 우리 일본 갈 수 있을까?” 하고 넌지시 불안감을 드러냈다.

 

▲  하카타역 구내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명란젓

 

난 사람 사는 곳 다 똑같으니 그런 걱정일랑 붙들어 매세요, 하는 눈빛으로 여행자 특유의 강한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나의 묘안을 말했는데, 이를 듣고 아내는 자지러질 정도로 웃더니 그 뒤로는 일본 배낭여행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음, 만약에 일본에 가서 어디를 찾아가는 게 힘들면 좋은 방법이 있지. 기차 정도는 탈 수 있겠지. 간단해. 우리가 예약한 호텔이 있는 도시에서 다음 도시로 기차로만 이동하는 거지. 만약 여행지로 가는 길을 물을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다면 어떻게든 숙소만 찾으면 되는 거지. 꼭 우리가 어디를 가야한다는 건 없잖아. 그렇게 며칠 있다가 돌아오면 되는 거야. 기차만 탈 줄 알고 비행기만 탈 줄 알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거지. 기차로 이동하는 숙소 여행인 셈이지. 하하.”

 

 

 하카타역의 에키벤을 파는 가게. 하카타역에만 네댓 곳이 있었다.

 

기차만 정확히 타면 아무리 일본말을 한마디 못하는 우리라고 해도 걱정할 것은 없는 것이다. 여행을 포기하더라도 어떻게든 숙소만 찾아가면 되니까. 근데 기차를 놓칠 경우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아마 “스미마셍”으로는 해결 안 될 복잡한 의사소통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고,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서 기차역에 일찍 나와서 미리 확인해보는 바지런을 떨었던 것이다.

 

 일본의 기차와 기차역에서 유통하는 에키벤은 그 종류만 2,500가지가 넘는다.

 

기차가 출발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승강장 바닥의 ‘사쿠라 8호차’ 탑승 번호까지 확인한 우리는 더운 열기를 피해 휴게실로 다시 내려왔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그때까지 못 봤던 것이 눈앞에 펼쳐졌다.

 

 규슈에서만 총 14개 노선, 34개 역에서 110종이 넘은 에키벤을 판매하고 있다. 가격대 역시 400~1,500엔으로 다양하다.

 

 

종류만 2,500가지, 에키벤의 마력

‘에키벤’이었다. 역에는 에키벤을 파는 가게만 해도 네댓 곳이 있었다. 가게마다 수백까지의 화려한 도시락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규슈에서만 총 14개 노선, 34개 역에서 110종이 넘은 에키벤을 판매하고 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가격대 역시 400~1,500엔으로 다양했다.

 

 유후인 노모리에서 먹은 해물 덮밥 에키벤

 

‘에키벤(駅弁)’은 ‘에키우리벤토(駅売り弁当, 역에서 파는 도시락)’의 준말이다. ‘에키’는 ‘역’을 뜻하고 ‘벤’은 ‘도시락’을 가리킨다. 즉, 기차역이나 기차 안에서 파는 도시락이다. 최초의 에키벤은 1885년에 주먹밥과 단무지를 넣어 판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 철도가 개통된 것이 1872년이니 100년이 넘게 일본 철도의 역사와 함께한 셈이다.

 

 유후인 노모리에서 먹은 해물 덮밥 에키벤

 

에키벤은 그 종류만 해도 2,500종 이상이다. 에키벤이 특별한 것은 기차역마다 지역의 특산물을 음식재료로 삼거나, 그곳만의 특색 있는 메뉴로 만든다는 점이다. 역에서 파는 에키벤의 메뉴만 봐도 그 지역에 어떤 음식이 유명한 지를 눈치 챌 수 있다.

 

 유휴인 노모리에서 먹은 화려한 에키벤, 가격은 930엔(약 9,200원)이다.

 

이 정도면 에키벤은 단지 기차에서 끼니를 때우기 위해 먹는 음식이 아니라 중요한 요리 중의 하나인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소재인 도시락을 이토록 다양한 메뉴와 화려한 장식, 뛰어난 상품성을 가진 새로운 음식문화로 창출하는 그들의 능력에 탄복한다.

 

 유휴인 노모리에서 먹은 화려한 에키벤, 가격은 930엔(약 9,200원)이다.

 

에키벤을 맛본 것은 유휴인 노모리에서다. 여행 4일째 되던 날 유후인에서 하카타로 돌아오는 기차(유후인 노모리) 안에서 도시락을 주문했다. 승무원은 도시락이 남은 게 없다고 했다. 저녁때에 맞추어 식사를 할 생각으로 기차가 유후인을 떠난 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주문한 게 사달이 났다. 이미 다 팔린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식당 칸에 갔다 온 아내의 손에 도시락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승무원은 당황하는 낯빛이 역력했고 급기야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우리에게 사과를 했다.

 

 하카타역과 유휴인역을 오가는 관광열차인 유후인 노모리에서 다양한 에키벤을 먹을 수 있다.

 

화려한 도시락 디자인에 확 눈길을 빼앗겼다. 그리고 뚜껑을 열었을 때 예쁘게 담긴 도시락 내용물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화려한 색감, 다양한 구성, 앙증맞을 정도의 꾸밈과 정성은 먹기에 아까울 정도였다. 물론 대개의 일본 음식처럼 에키벤도 한국 음식에 비해 달고 짠 편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내 입맛에는 썩 괜찮은 편이었다.

 

 

에키벤으로 만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경연대회까지 열려

에키벤은 종류도 다양할뿐더러 구성과 가격, 디자인도 다양하다. 심지어 에키벤은 만화책으로 나왔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국내에서도 만화 <에키벤>이 번역되어 판매되고 있다. 만화 <에키벤>은 도시락집 주인이자 철도 마니아인 주인공 다이스케가 아내에게 선물 받은 기차표로 일본 일주 기차 여행을 떠나면서 일본의 각 지역별, 기차역마다의 명품 에키벤들과 일본 기차 여행법을 소개한 철도 도시락 여행기이다. 지금까지 규슈에서 간토 편까지 15권, 대만과 오키나와 1편까지 합쳐서 총 16권이 출간됐다.

 

▲  만화 <에키벤> 표지.

 

<에키벤>의 1권이 규슈 편으로 지역특산물을 살려 만든 고등어초밥 도시락(오이타역), 돈코츠 도시락(가고시마 중앙역), 명란젓 도시락(모지역), 영주님 도시락(구마모토역), 싯포쿠 도시락, 카쿠니 도시락(나가사키역), 현해탄 치라시초밥(하카타역), 숲 도시락(유후인 노모리) 등 규슈 각지의 에키벤이 소개되고 있다.

 

▲  만화 <에키벤> 내용 일부.

 

대개 먹는 사람 앞에서 항상 조리되는 것이 일본 요리의 특성 중의 하나라면 에키벤은 상당이 이색적인 음식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재료를 섞지 않고 그 원래 상태를 부각시키는 일본 요리의 특징이 에키벤에도 있다. 하나의 음식 속에 계절이 함축되어 있고, 미적인 것도 보여주고, 지역의 특성을 드러내고, 각 요리가 어우러져 맛에 일관성도 갖춘 음식. 맛, 정성, 의미가 듬뿍 담긴 <에키벤>은 예쁘기까지 해서 마치 꽃을 보듯 설렘이 있다.

 

다양성과 지역성, 계절성이 있는 에키벤은 사람들로 하여금 보는 즐거움과 먹는 즐거움을 함께 주어 설레고 들뜨게 한다. 에키벤을 먹기 위해 부러 기차역을 찾거나 기차를 탄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에키벤은 인기가 많다. 기차 이용객뿐만 아니라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매년 에키벤 경연대회도 열리고, 에키벤을 먹으며 일본 곳곳을 여행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큰 인기가 있다고 한다. 에키벤은 분명 매력을 넘어 마력을 가진 일본의 독특한 음식문화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에도 일부 기차에서 도시락을 팔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다양하지도 않을뿐더러 먹고 싶어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냥 끼니를 때우는 정도로 여긴다. 게다가 지역의 특징이 담긴 음식이 아니라 그냥 일률적인 메뉴이다. 다양한 메뉴의 개발과 상품성, 지역성을 갖춰 지역경제와 기차 여행 활성화, 음식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역의 특산물과 스토리를 엮은 스토리텔링 전략에 대한 깊은 고민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지극히 소소하고 평범한 소재에서 새로움과 변화를 읽어내어 그것을 상품화하고 이슈화시키는 능력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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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몬과 노면전차가 있는 구마모토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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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몬과 노면전차가 있는 구마모토 여행

일본어 한마디 못하면서 무조건 떠난 배낭여행④

 

기차는 너른 평원을 달린다. 한국에서 규슈를 상상할 때와는 딴판이다. 규슈를 그저 조금 큰 섬이겠거니 하며 한국의 섬처럼 당연히 산악 지형이 많을 것이라 여겼었다. 마치 강화도나 진도를 가보지 않은 이가 비옥하고 너른 평야가 두 섬에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하듯 말이다. 그러나 선입견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규슈 신칸센의 객실. 규슈 신칸센은 후쿠오카(하카타 역)에서 남부의 중심 도시 가고시마까지 달린다.

 

5일간의 규슈여행에서 깨달은 것은 규슈가 경상도보다 훨씬 넓어(실제로는 두 배 정도 더 넓다) 실제 섬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비옥한 평야가 끝없이 펼쳐지는 곡창지대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을 때의 당혹감이란… 이곳에 와서야 규슈가 왜 역사적으로 일본 본토와 한반도, 중국, 유럽의 국가들에게 있어 중요한 요충지가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카타에서 구마모토로 가는 길의 풍경.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다.

 

구마모토는 예부터 ‘불의 나라’ 또는 ‘비옥한 나라’로 불리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칼데라인 아소 산과 구마모토 평야가 있어 그렇게 불린 것이다. 동쪽으로는 아소 산을 비롯해 높은 산들이 우뚝 솟아 있고, 서쪽으로는 구마모토 평야와 야쓰시로 평야가 해안까지 이어진다.

 

▲  숙소에서 본 구마모토 시

 

구마모토라는 이름은 ‘곰’이 아닌 ‘쌀’에서

나는 여행 내내 구마모토의 땅 이름에 집착했다. 원래 지명에 관심이 많기는 했다. 지명을 알면 그 지역의 반을 안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에서다. 근데 구마모토만은 뭔가 석연치 않았다. 한자로 ‘웅본(熊本)’인데 왜 곰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지, 대개 현지에 도착해 보면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산지보다는 너른 들판에 있는 구마모토의 평야와 시가지를 보며 곰의 고장이라는 건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구마모토 역

 

그 의문은 여행이 끝나고 난 뒤에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여행이 끝나고 이런저런 자료를 뒤적이던 끝에 겨우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구마모토라는 지명이 곰과 관련이 없을 것이라는 짐작은 예상대로였다.

 

‘구마’는 원래 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즉 구마모토는 쌀의 본고장이었다. 지금도 구마모토는 전 일본을 통틀어 곡창지대 중 하나이다. 예전에 ‘벼(稻)’를 ‘구마’로 읽은 데서 지명이 유래했던 것.

 

▲  구마모토 역내의 종합관광안내소. 이곳에서 노면전차와 버스 승차권을 구입할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히고(肥後) 지역의 다이묘가 된 가토 기요마사가 구마모토에 성을 쌓으면서 ‘곰 熊’자를 써서 오늘날의 구마모토가 된 것이라 한다. 다만,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히고 국으로 불리었으며 폐번치현(廃藩置県, 지방통치를 담당했던 번을 폐지하고,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으로 일원화한 행정개혁) 때 구마모토 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일본에서 지명에 ‘구마’가 들어가는 지역들은 수리 시설이 잘 되어 벼의 생산이 많은 곳이란다.

 

 스이젠지 공원의 상가에 있는 구마몬

 

구마모토 시의 북동쪽에 있는 기쿠치 지방은 에도 시대에 곡창 지대로 알려졌으며, 기쿠치미(菊池米)는 반슈미(藩州米), 비슈미(備州米)와 함께 최고급의 품질로 여겨져 오사카의 경제 중심지인 도지마의 쌀 시세를 결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기쿠치 강 하구 가까이의 다카세(지금의 다마나 시, 규슈 신칸센이 지나는 구마모토 역의 직전 역)도 구마모토 번 최대의 쌀 적출항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 셔틀버스에도 구마몬 캐릭터가 있었다.

 

재미있는 건 구마모토를 대표하는 캐릭터인 ‘구마몬’이다. 곰 인형인데 구마모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다. 내가 묵은 호텔의 셔틀버스도 구마몬 캐릭터였다. 놀라운 건 구마모토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곰을 구마모토의 캐릭터로 만들어 이제는 구마모토를 대표하는 상징일 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마모토 역의 물품보관소. 사용료 500엔. 배낭을 이곳에 보관해서 가볍고 자유롭게 구마모토를 여행할 수 있었다.

 

노면전차 ‘트램’, 1일 승차권의 마법

9시 9분 하카타역을 출발한 신칸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9시 47분에 정확히 구마모토 역에 도착했다. 일본에 신칸센이 처음 들어온 건 1960년대였다. 1964년 10월 도쿄 올림픽이 열렸고 이때 토카이도 신칸센(東海道 新幹線)이 처음 개통되었다. 1959년에 착공하여 5년 만에 개통한 것이다. 당시에 시속 200km로 도쿄와 오사카를 주파했는데, 그 역사가 이미 반세기를 지났다. 규슈 신칸센은 후쿠오카(하카타 역)에서 남부의 중심 도시 가고시마까지 달린다.

 

 

구마모토 역에서 잠시 머뭇했다. 무더운 날씨에 묵직한 배낭을 메고 다닌다는 건 아무래도 고역이다. 예약한 호텔에 짐을 맡겨두고 올까 하다가 그 또한 번거로운 일이여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품보관소를 찾아보았다. 다행히도 물품보관소는 매표소 바로 옆에 있었다. 사용법을 몰라 한참을 머뭇거리고 있는데, 멀리서 한국말을 하는 노인 한 분이 안내를 자청했다. 자원봉사자로 보였다. 노인의 유창한 한국말에 우리는 금세 기쁜 낯빛이 되었으나 문제는 그 노인이 사용법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결국 노인이 일본어로 적힌 사용법을 우리에게 읽어주었고, 우리는 이리저리 시도를 해서 마침내 배낭 셋을 보관소에 넣어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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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마모토 노면전차의 1일 승차권. 승차권 안쪽 면의 네모난 은색 칸을 동전으로 긁어서 노면전차를 타는 ‘년, 월, 일’의 숫자를 드러내어 당일 승차권임을 표시한다.

 

다음은 구마모토의 명물 노면전차(트램)의 승차권을 구입해야 했다. 적어도 오늘 하루 노면전차를 네댓 번은 이용할 것이라 1일 승차권을 사기로 했다. 역 구내 안내소에서 구마모토 시내를 하루 동안 400엔으로 마음 놓고 탈 수 있는 1일 승차권(1Day Pass)을 구입했다. 승차권을 본 순간 우리는 마법에 걸린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안내소에서 이미 직원의 설명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당혹스러웠다. 겨우 기억을 더듬어 이리저리 살펴보던 중 다행히도 승차권에 안쪽 면에 영어로 쓰여 있는 사용법을 발견했다.

 

 구마모토 노면전차의 1일 승차권. 우리나라 즉석복권처럼 노면전차 타는 날짜를 동전을 긁어서 사용한다.

 

흥미로운 건 1일 승차권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승차권 안쪽 면의 네모난 은색 칸을 동전으로 긁어서 노면전차를 타는 ‘년, 월, 일’의 숫자를 드러내어 당일 승차권임을 표시하는 식이었다. 마치 복권을 긁듯 재미도 있을뿐더러 그 자체로 흥미로운 관광 상품이었다. 유효기간이 2년이나 되었는데, 그 기간 안에 하루 사용하는 방식이어서 종이 등을 절약하는 면도 있다. 노면전차는 A라인과 B라인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구마모토의 노면전차는 A라인과 B라인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사진의 노면전차에 A라고 적혀 있다.

 

A라인 3번역 구마모토 역에서 우리의 첫 여행지인 10번역 구마모토 성까지는 모두 일곱 역을 거쳐야 했다. 구마모토 역을 빠져나오자마자 노면전차 승강장이 보인다. 유니폼을 입은 여승무원이 안내를 한다. 이 작은 ‘트램’, 한 칸밖에 없는 전차를 위해 최선을 다해 안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구마모토의 노면전차. 겨우 한 칸의 작은 전차임에도 유니폼을 입은 여승무원이 친절히 안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전차에 올라타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노면전차는 현대 도시의 피로와 삭막함을 덜어줬다. 이 도시의 매력이 새롭게 다가왔다.

 

 노면전차를 운행하는 기사는 연신 안내방송을 했다.

 

오래된 것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오래 간직할 것으로 쓰임을 남겨두는 지혜로움.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은 노면전차를 보며 떠올린 구마모토의 첫인상이었다. ‘검이불루(儉而不陋)’의 미학을 이곳에서 봤다면 과장일까. 퇴근길 시민들의 복장에서도 똑같은 인상을 받았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느린 트램은 과거와 현재의 공존, 오래된 미래를 읽을 수 있었다.

 

 

 A라인 3번역 구마모토 역에서 우리의 첫 여행지인 10번역 구마모토 성에 도착했다.

 

사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네 야시장에서나 들릴 법한 그 목소리는 나지막하면서도 지속적이었다. 목소리를 좇아 트램 앞쪽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신호로 멈출 때만 목소리를 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규칙적인 듯한 사내의 목소리, 그 순간 딱히 왜 중얼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야 그가 노면전차의 기사였으며 교통안내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구마모토의 노면전차는 현대 도시의 피로와 삭막함을 덜어줬다.

 

구마모토 역에 내렸다. 일본의 3대 명성, 난공불락의 구마모토 성에서 난 두 명의 역사적 인물을 만날 것이다. 그들은 가토 기요마사와 사이고 다카모리이다.

 

▲  오사카 성, 나고야 성과 더불어 일본의 3대 명성, 난공불락의 구마모토 성의 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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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이 앞서는 진주 이성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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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이 앞서는 진주 이성자 미술관

 

지난 주말, 이성자 미술관에 다녀왔다. 지난 7월에 개관해서 한번 가봐야지 하면서도 여태 미적거리다 모처럼 시간이 나서 미술관을 찾았다. 이성자 미술관은 김시민 대교를 지나서 진주 혁신도시에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공사)로 곧장 갔다가 길을 묻고 나서야 탑마트 뒤에 있는 미술관을 찾게 되었다.

 

 

미술관은 영천강변에 있었다. 비가 내린 뒤여서 그런지 한적한 미술관에는 두 무리의 사람들 대여섯 명이 있을 뿐이었다. 미술관 옆을 잔잔히 흐르는 강물이 퍽이나 고요했다.

 

 

1층 전시실 입구는 어둑했다. 뭔가 정리되지 않은 느낌. 안내소도, 관리인도, 안내인도 보이지 않는다. 조명마저 꺼져 있어 처음에는 휴관인 줄 알았다.

 

 

1전시실 입구의 현수막에 걸린 작가의 약력과 작품 세계에 대한 설명을 읽은 후 전시실로 들어갔다.

 

 

밖의 어둑어둑한 분위기와는 달리 안은 별세상이었다. 강렬한 색채가 시선을 끌었다.

 

 

제일 처음 본 건 '구성-누드'라는 작품이었다.

 

 

다음으로는 '진주'라는 작품이다. 그녀의 눈에 비친 진주의 모습. 추상적인 그림이라 짐작으로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었다.

 

 

추상적인 그녀의 작품은 처음 보는 이들에게 약간의 당혹감과 망설임을 준다. 그러나 그도 잠시 강렬한 색채의 마술에 온통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그건 작품에 대한 이해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종의 본능적인 몸의 반응이다.

 

 

 

이성자 화백은 “색동무늬 변환의 화가”로 불릴 만큼 색채가 강렬하면서도 밝고 화려하다.

 

 

그녀의 작품 세계는 2층 전시실에 갔을 때 더욱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미술에 문외한이 봐도 절로 '아' 하며 그 강렬함에 혼을 빼앗길 정도다.

 

 

그녀의 작품 세계에 대한 평가로는 파리시립미술관장이었던 J. 라세뉴의 말이 인상적이다.

 

“이성자 씨는 자신의 동양적인 유산에서 나온 오묘한 성격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양미술의 흐름 속에 용기 있게 합류하는 본보기이다.”

 

 

여기서 잠깐, 이성자 화백에 대해 알아보자. 이성자 화백(1918~2009)은 한국보다 프랑스에서 더 유명하다. 그의 미술관이 있는 진주에서조차 아는 사람들이 드물 정도로 국내에서는 뒤늦게 알려졌다.

 

 

그녀는 진주에서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현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다. 1951년 가족들과 헤어진 뒤 파리로 건너가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김환기, 이응노 등과 함께 한국미술을 세계에 알린 그녀는 1991년 프랑스 정부 문화예술공로훈장(Chevalier)을 수상했고, 2002년에는 프랑스 정부 문화예술공로훈장(Officier)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9년에는 프랑스의 BNP 파리바그룹(BNP Paribas)이 후원하는 한불문화상과 대한민국 문화관광부가 수여하는 문화훈장을 받았다.

 

 

이성자는 구상과 추상이 어우러진 초창기, 1960년대 이후의 기하학적인 상징물, 말년의 인간과 우주의 존재론적 성찰을 주제로 작업했다.

 

이성자 미술관의 <은하수, 그곳에 꿈을 꾸다>는 그녀가 고향 진주에 기증한 376점의 유화, 판화, 수채화, 소묘 등의 작품에서 엄선하여 전시하고 있다.

 

 

관리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인사를 한다. 자원봉사를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미술 관련 유경험자 위주로 자원봉사자를 꾸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전문 인력 없이 운영되는 미술관의 부실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사실 이성자 미술관은 출발부터 삐꺽거리기 시작했다. 이성자 화백으로부터 기증받은 작품으로 미술관을 설립했으나 건물은 원래 미술관의 용도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공원관리사무소를 개조한 것이다. 그래서 미술관의 구조적, 환경적 결함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이다.

 

또한, 관장, 큐레이터 등의 전문 인력이 확보되지 않은 점도 문제다. 이성자기념사업회와 진주시가 갈등을 겪고 있는 부분도 이러한 점들 때문이다. 다행히도 진주시에서 보완을 약속했다고 하니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미술관이 지역 깊숙이 들어와서 지역을 알려내고 지역민들의 문화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의 시설은 설립하는 것보다 어떻게 제대로 운영하는가가 더 관건이다.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공시설의 진짜 문제는 건물이 완성된 이후에 나타난다. 그 건물을 어떻게 운영하여 지역 주민들의 생활 속에 살려 나갈 것인가. 즉, 건물의 쓰임새가 문제였다.”

 

 

아직은 많이 부족해서 걱정이 앞서는 이성자 미술관. 그럼에도 개선되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앞으로 진주시와 미술관에서는 대표성을 가진 관장과 전문성을 갖춘 큐레이터 등의 인력을 확보하고 수준 있는 전시기획으로 살아 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지역 주민들의 문화공간이 되고, 미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미술관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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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일본 구마모토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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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일본의 3대 명성, 구마모토 성

일본어 한마디 못하면서 무조건 떠난 배낭여행⑤-1, 구마모토 성

 

▲ 나가베이와 쓰보이 가와 강 나가베이는 일본의 국가지정중요문화재로 길이가 242m이다. 현재 구마모토 성에 남은 성벽 중 가장 길다.

 

노면전차에서 내리자 시간은 되돌아왔다. 횡단보도를 건너 구마모토 성으로 향했다. 성문으로 가는 골목길 바로 아래로 쓰보이 가와 강이 흘렀고 그 건너로 높은 성벽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검은 강줄기 너머로 굳게 버티고 선 잿빛의 높고 기다란 성벽의 끝에는 하얀 누각이 아스라이 솟아 있어 흑백의 대비가 선명하다. 이 성벽을 ‘나가베이(長塀)’라 한다. 길이가 242m인데 현재 구마모토 성에 남은 성벽 중 가장 길다.

 

▲ 나가베이의 안쪽 모습 성벽의 안쪽으로는 돌기둥을 세워 오리목으로 고정시켰다. 성벽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성의 바깥과는 달리 안쪽에서 이 나가베이를 보면 조금 높은 담장에 불과하다. 흰 회반죽의 벽에 판자벽인 ‘시타미이타(下見板)’를 붙여 일본식 기와인 ‘산가와라(棧瓦)’를 올렸다. 내 시선을 끈 건 돌기둥을 세워 오리목으로 고정시킨 것이었다. 성벽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 보이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돌기둥과 오리목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 가토 기요마사 동상 성 입구 작은 광장에 있다.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때 선봉장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인물이다.

 

구마모토 성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거친 사내의 과묵한 모습이랄까. 나중에 천수각을 봤을 때는 그 사내가 무사였으리라 생각됐다. 무장을 하지 않았지만 감출 수 없는 백전노장의 모습이 첫인상이었다면, 천수각은 갑옷에 투구까지 무장을 완벽히 갖춘 무사의 모습이었다.

 

▲ 하제카타몬 성의 입구인 하제카타몬에서 구마모토 성으로 들어간다.

 

성 앞으로 흐르는 쓰보이 가와 강은 그 자체로 해자이다. 난공불락의 구마모토 성을 깊은 물줄기가 두르고 있으니 개미 한 마리조차 얼씬할 수 없다. 다만 더위를 피해 성 밖 커다란 나무 아래 모여 있는 십여 명의 노인들만이 이곳의 엄숙하고 위태로운 풍경을 느긋하게 해 준다.

 

▲ 구마모토 성 천수각으로 오르는 길은 이중 삼중의 높은 성벽들로 둘러싸여 있다.

 

일본의 3대 명성, 난공불락의 구마모토 성

 

다리를 건너기 전 작은 광장에서 동상 하나를 만났다. 가토 기요마사이다. 구마모토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둘 있는데, 가토 기요마사(1562~1611)와 사이고 다카모리(1828~1877)이다.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때 선봉장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인물이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메이지유신을 성공으로 이끈 유신삼걸 중의 한 명으로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을 주장한 인물이다.

 

▲ 구마모토 성 천수각으로 오르는 길은 이중 삼중의 높은 성벽들로 둘러싸여 있다.

 

구마모토 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귀국한 뒤 7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1607년 완성했다. 이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사카 성,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나고야 성과 더불어 일본의 3대 명성으로 불린다. 성의 둘레만 9km에 달하고 ‘축성의 귀재’라 불리는 가토 기요마사의 작품답게 성벽이 매우 가팔라 ‘쥐도 기어오를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특히, 성의 입구인 하제가타몬에서 엄청난 높이의 석벽 니요노 이시가키를 지나 7층의 천수각을 오르다 보면 이 말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구마모토 성 천수각으로 오르는 길은 이중 삼중의 높은 성벽들로 둘러싸여 있다.

 

지금은 많이 허물어져 천수각, 혼마루, 우토 야구라 등 일부 건물만 남았지만 이들 건물과 성벽만 봐도 구마모토 성의 위용을 알 수 있다. 난공불락이라는 이름답게 구마모토 성은 1607년에 지어진 후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었다. 깊은 해자가 성 밖을 흐르고, 그 안으로 높은 성벽이 있고 다시 이중 삼중으로 높은 성벽이 둘러싸 있어 성을 함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 구마모토 성 천수각으로 오르는 길은 이중 삼중의 높은 성벽들로 둘러싸여 있다.

 

성문을 지나 천수각으로 오르다 보면 보는 이를 압도하는 성벽과, 성벽 사이로 지그재그 미로처럼 난 길과, 오르고 올라도 끝이 없는 방어벽과 맞닥뜨리다 보면 싸우기도 전에 지칠 법하다. 하나의 성벽을 지나면 다른 성벽이 앞을 막고, 다시 성벽을 오르면 또 다른 성벽이 가로막고… 언제 천수각에 오를 수 있을지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 구마모토 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사카 성,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나고야 성과 더불어 일본의 3대 명성으로 불린다.

 

사이고 다카모리

그런데 이 난공불락의 성도 불탄 적이 있다. 앞에서 말한 사이고 다카모리가 일으킨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때였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인 가고시마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사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에만 전념했는데, 사학교의 규모가 날로 커지고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세력이 결집되자 당시 정부는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가고시마 현이 큰 걱정거리였다.

 

▲ 니요노 이시가키 엄청난 높이의 석벽 니요노 이시가키 등 구마모토 성은 가토 기요마사의 작품답게 성벽이 매우 가팔라 ‘쥐도 기어오를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결국 정부가 가고시마를 공격할 구실로 무기와 탄약을 오사카로 운반하라고 명하자 사학교 학생들이 앞장서서 가고시마의 군수 공장과 해군기지를 공격했고 1877년 2월 사이고 다카모리를 옹립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1만 5천의 군사를 이끌고 도쿄로 향하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3만으로 늘어난 병력으로 구마모토에서 정부군과 맞닥뜨려 6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구마모토 성을 포위했으나 끝내 함락하지 못했다. 이때 성의 천수각이 불타게 된다. 그런데 사이고 다카모리 군의 공격으로 불탄 것이 아니라 정부군의 장군이 군사들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스스로 불을 놓았다고 한다. 구마모토 성이 얼마나 난공불락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증명하는 대목이다. 그때 불탔던 천수각은 1959년 복원됐다.

 

▲ 천수각 천수각은 7층으로 세이난 전쟁 때 단 한 번 불탄 적이 있다.

 

결국 사이고 다카모리 군은 규슈 곳곳에서 정부군과 공방전을 벌였으나 패전을 거듭하자 1877년 9월 가고시마로 철수했다. 뒤쫓아 온 정부군에 최후의 보루였던 시로 산이 함락되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9월 24일 자결했고 이로써 세이난 전쟁은 끝이 났다.

 

▲ 천수각 천수각은 7층으로 세이난 전쟁 때 단 한 번 불탄 적이 있다.

 

높고 가파른 성벽 니요노 이시가키 너머로 천수각이 우뚝 솟아 있다. 아찔한 마음을 다잡아 천수각으로 향했다. 다시 성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하는 수 없이 성벽을 돌아갔더니 땅에서 불쑥 솟은 천수각이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천수각에 오르려면 이곳에서 혼마루 어전의 지하통로인 구라가리쓰로를 통과해야 한다. 철옹성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다시금 확인하면서 천수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구마모토 성 입장권에 있는 그림으로 난공불락의 구마모토 성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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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성에만 볼 수 있는 천수각, 그 놀라운 방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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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성에만 볼 수 있는 천수각, 그 놀라운 방어력

일본어 한마디 못하면서 무조건 떠난 배낭여행⑤-2, 구마모토 성

 

 천수각으로 가려면 혼마루 어전의 지하통로인 구라가리쓰로를 통과해야 한다.

 

구마모토 성의 중심, 천수각으로 간다. 혼마루 어전의 지하통로인 구라가리쓰로를 통과하면 천수각이다. 왼편에 혼마루 어전이 있고 그 옆 하늘로 우뚝 솟은 천수각은 가히 위압적이다. 지상 6층, 지하 1층으로 높이가 무려 30m가 넘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축소 지향의 일본의 또 다른 이면이다.

 

 

천수각에 오르는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공간도 그러하거니와 층계도 가팔라진다. 그러나 그도 잠시, 천수각 위에 서면 성내뿐만 아니라 구마모토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제야 천수각이 일본 성의 대표적인 상징이라는 걸 새삼 실감하게 된다.

 

 천수각 위에 서면 성내뿐만 아니라 구마모토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천수각은 지상 6층, 지하 1층으로 높이가 무려 30m가 넘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일본 성의 상징, 천수각의 놀라운 방어력

 

일본 성의 두드러진 특징을 꼽으라면 단연 천수각(덴슈가쿠, 天守閣)이다. 천수각이 처음 생긴 것은 오다 노부나가가 비와 호 동쪽의 아즈치 산에 아즈치 성(시가 현)을 지을 때라고 한다. 천수각은 망루와 비슷한 건물로 대개 혼마루에 건립된 경우가 많다. 천수각 밑은 천수대라는 성벽이 받치고 있으며 천수의 크기에 따라 소천수, 중천수, 대천수 등으로 불린다.

 

 천수각은 망루와 비슷한 건물로 크기에 따라 소천수, 중천수, 대천수 등으로 불린다.

 

일본의 성은 전투지휘소인 천수각을 중심으로 성곽을 세운 뒤 그 아래쪽으로 여러 단계의 성곽을 이중 삼중으로 성을 에워싸는 모양새다. 천수각은 성의 안팎뿐만 아니라 먼 곳까지 적의 동태를 두루 볼 수 있고, 무사를 배치하거나, 명령을 하달할 때나, 전법을 펼칠 때 등 무엇보다 방어에 유리하다.

 

 

성벽 하나로 둘러싸여 성벽이 뚫리면 곧장 무너지는 우리나라 성과는 달리, 일본의 성들은 겹겹이 둘러싼 성벽으로 인해 하나하나 공략하지 않으면 성을 함락시키기 어렵다. 그만큼 방어하기에 좋은 구조이다. 실제로 이곳 구마모토 성은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었고,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들이 남해안 일대에 쌓은 왜성도 조명 연합군에게 함락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물론 임진왜란 후 우리나라 축성술의 영향을 받아 일본의 성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 대표적인 것이 성벽에 돌출 구조물을 설치한 것이다. 일종의 ‘치(雉)’인데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성벽에 달라붙는 적들을 양쪽에서 협공할 수 있어 성의 방어력을 높이는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지은 구마모토 성에선 돌출 구조물인 치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구마모토 성의 영원한 주인, 가토 기요마사

 

구마모토 성을 이야기할 때 가토 기요마사는 늘 따라 다닌다. 우리와는 악연인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구마모토 번의 초대 영주가 되었는데, 그 과정을 잠시 살펴보자.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도와 시즈가타케의 싸움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큰 공을 세웠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도운 가토 기요마사 등 7명의 무장들을 시즈카타케의 ‘칠본창(七本槍)’이라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지은 구마모토 성에선 우리나라 축성술의 영향인 돌출 구조물 치의 흔적을 볼 수 있다.

 

1587년 규슈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삿사 나리마사를 히고(지금의 구마모토 현)의 영주에 임명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고를 무시하고 삿사 나리마사는 엄격한 토지 조사와 공물 징수를 했다. 이에 토호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삿사 나리마사에게 할복을 명하고 반란에 참여한 토호와 농민들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후임으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를 기용하여 히고를 남북으로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정유재란 때 일본왜성에서의 뼈아픈 기억 때문에 가토 기요마사는 구마모토 성내에 무려 120개가 넘는 우물을 팠다.

 

구마모토의 초대 번주가 된 가토 기요마사는 1601년 구마모토 성을 쌓기 시작하여 1607년에 완공했다. 특이한 것은 가토 기요마사가 성을 쌓으면서 정유재란 당시 울산왜성 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경험을 교훈 삼았다는 것이다. 울산왜성에서 가토 기요마사는 조명연합군에 포위되어 식수와 군량미가 다 떨어져 소변을 마시고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셔 목숨을 부지하다 겨우 탈출에 성공했던 뼈아픈 기억이 있었다. 그 일을 교훈 삼아 구마모토 성내에 무려 120개가 넘는 우물을 파고, 수백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었다(이로 인해 구마모토 성은 ‘은행 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천수각 안의 다다미를 먹을 수 있는 고구마 줄기로 만들어 비상시를 대비했다고 한다.

 

 

이처럼 구마모토 성에는 가토 기요마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가토 기요마사가 죽고 난 후 그의 아들 가토 다다히로가 2대 성주가 되지만 지도력이 약했던 그는 결국 물러나게 되고 이후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구마모토 성의 성주가 된다. 이때부터 구마모토 성은 메이지 유신까지 호소카와 가문이 다스리게 된다.

 

 

 

이처럼 에도 시대까지 구마모토 번을 호소카와 가문이 다스렸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사람들은 구마모토 성 하면 가토 기요마사를 자연 떠올리는 모양이다. 세이난 전쟁에서 성의 천수각이 불타게 되자 주민들은 "세이쇼 공(清正公)의 성이 불타고 있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구마모토 성을 공략하지 못한 사이고 다카모리도 "우리는 관군에게 진 것이 아니다, 세이쇼 공에게 진 것이지."라고 했을 정도였다.

 

 

 일본의 성은 전투지휘소인 천수각을 중심으로 성곽을 세운 뒤 그 아래쪽으로 여러 단계의 성곽을 이중 삼중으로 성을 에워싸는 모양새다. 그림의 제일 뒤 가장 높은 곳이 천수각이다.

 

천수각의 안에는 가토 가문, 호소카와 가문, 세이난 전쟁 때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천수각 안에서 여행자의 눈길을 끈 동상 하나. 군복을 입은 늠름한 젊은이다. 한자로 ‘谷村計介’라 쓰여 있다. 누구일까. 여행 당시는 끝내 알지 못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가 누구인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일본어를 아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그의 이름이 타니무라 게이스케라고 했다.

 

 일본의 성은 전투지휘소인 천수각을 중심으로 성곽을 세운 뒤 그 아래쪽으로 여러 단계의 성곽을 이중 삼중으로 성을 에워싸는 모양새다.

 

타니무라 게이스케는 군인으로 1853년 미야자기 현에서 태어나 1877년 구마모토 현에서 죽었다. 1874년 사가의 난에 출정하여 궁지에 빠진 군대를 구했고 이후 타이완에 출병했다. 1877년 세이난 전쟁 때 앞서 말한 사이고 다카모리 군에 의해 구마모토 성이 포위되자 야음을 틈타 탈출하여 정부 지원군의 지원을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틀 뒤에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용감무쌍한 공이 인정되어 야스쿠니 신사에 비가 건립됐고 국정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지원군에게 연락 업무를 완수한 것을 기려 백성의 모습으로 동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군복 차림의 동상이다.

 

 천수각 안의 타니무라 게이스케 동상

 

'무샤가에시 武者返し‘, 구마모토 성의 난공불락의 성벽을 이르는 말이다. 밖으로 나와 다시 천수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성주가 살았던 화려한 혼마루 어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수각에서 내려다본 혼마루 어전과 구마모토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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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갈 거 없다! 사무실 옆 꽃무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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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가을이면 아름다운 꽃무릇을 보러 사람들은

선운사로, 용천사로, 불갑사로, 상림으로 가곤 합니다.

 

 

예전에는 꽃무릇을 흔히 볼 수도 없었거니와

무리 지어 핀 장관을 보기 위해서죠.

 

 

요즈음 바쁘기도 해서 좀처럼 여행을 떠나기가 쉽지가 않네요.

다행인지 사무실 주위에 꽃무릇이 여기저기 피어 있어 카메라에 담아 봤습니다.

나뭇가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가을 햇살에 꽃은 더욱 화사해지네요.

 

 

그곳에는 바위 하나와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갈라진 나무는 음이 되고 시커먼 바위가 양이 되어 꽃을 피웠나 봅니다.

 

 

 이 단순한 풍경이 많은 영감을 줍니다.

사진으로 표현하기에는 역시나 역부족이군요.

그냥 가만히 바라보니 나무와 바위와 꽃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들리는 듯합니다.

가만히요…

 

 

이 글을 보는 모든 분들,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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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화려할 순 없다! 구마모토 성 혼마루 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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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함의 극치, 구마모토성 혼마루 어전

일본어 한마디 못하면서 무조건 떠난 배낭여행⑤-3, 구마모토 성

 

 

혼마루 어전(혼마루고텐, 本丸御殿)은 일본의 성에서 가장 호화로운 건물이다. 그럼에도 하늘로 우뚝 솟은 천수각과는 달리 납작 엎드려 있어 얼핏 보면 웅장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서자마자 성의 중심이 혼마루 어전임을 금방 깨닫게 된다.

 

 천수각에서 내려다본 혼마루 어전

 

혼마루 어전은 성주가 일상생활을 하고 정무를 보는 공간으로 천수각이 성의 상징이라면 혼마루 어전은 성의 심장부로 볼 수 있다. 사실 처음부터 일본의 성에 천수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1573~1603)와 에도 시대(1603~1868)에 와서야 혼마루에 일본 성의 상징 건물인 천수각이 등장하게 된다.

 

                                   ▲  오모다이도코로에는 바닥을 네모지게 파고 그 위에 불을 피우던 일본 전통의 실내 화로인 이로리가 있다.

 

혼마루 어전, 그 장엄한 분위기

 

혼마루 어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신발을 담을 수 있는 비닐봉지를 한 장씩 받아서 혼마루 어전으로 들어간다. 지금의 혼마루 어전은 근래에 복원한 것으로 오미다이도코로(큰 주방), 오히로마(접객을 위한 큰 방), 스키야(다실) 등이 있다. 이런 시설들은 구마모토 성을 쌓은 가토 기요마사와 그의 아들 가토 다다히로에 이어 성주가 된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1633년부터 1635년까지 오미다이도코로와 오히로마 북쪽의 거실 등을 증축하는 등 대규모 공사를 벌여 고쳐지었다고 한다.

 

 

현관처럼 사용되는 방인 시키다이노마를 지나면 오미다이도코로를 만나게 된다. 오모다이도코로에는 바닥을 네모지게 파고 그 위에 불을 피우던 일본 전통의 실내 화로인 이로리가 있다. 일본 영화에서 종종 봤던 것이지만 이곳의 이로리는 그 크기가 엄청나다. 오미다이도코로가 워낙 크다 보니 천장(오야구미)도 거대하다. 이곳은 발굴된 당시의 석재 일부를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큰 방, 오히로마

 

주방을 지나면 일순간 무서우리만치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큰 방이 나타난다. 오히로마이다. 산수화가 그려진 12폭의 병풍이 둘러쳐 있다. 이곳에서부터 그 묵직한 분위기에 관광객들도 모두 숨죽여 사뿐사뿐 마루를 걸어간다.

 

 

오히로마는 다다미 60장 크기의 쓰루노마, 35장 크기의 우메노마, 28장 크기의 사쿠라노마, 24장 크기의 기리노마로 이어진다. 쓰루노마와 각 방을 잇는 회랑은 오히로마 엔가와(툇마루)와 시키이타(마루청)로 불린다. 특히 길이가 31.5m, 폭이 5.5m인 엔가와는 와카마쓰노마, 쇼쿤노마까지 이어져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서화를 장식한 도코노마 

 

길게 이어지는 마루도 장대하지만 엄청난 크기의 방들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성주의 접객 장소로 쓰이는 방들은 격식 있게 꾸며져 있는데, 각 방마다 이름이 있다. 최고의 방은 쇼쿤노마로 장벽화가 있어 화려하기 이를 데 없고, 두 번째로 격식 높은 방 와가마쓰노마는 벽과 후스마(맹장지, 방과 방 혹은 방과 마루 사이의 문으로 종이 등을 바른 문)에 청정한 소나무 그림이 그려져 있고, 세 번째로 격식 높은 방으로 접객을 위한 대면소로 쓰인 기리노마에는 벽과 후스마에 오동나무 그림이 있다.

 

 문고리 등의 조각까지 완벽하게 복원한 혼마루 어전

 

 

그리고 성주의 어용 화가인 스키타니 유키나오(1790~1845)가 그렸다는 판자문 그림이 있는 가장 지위가 높은 가신의 대기실로 보이는 가로노마가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 건물들이 근래에 복원된 것인데, 문고리 등의 조각까지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복원 안내도를 보니 아직도 많은 부분이 복원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원래대로 혼마루고텐이 복원된다면 그 규모와 화려함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가장 지위가 높은 가신의 대기실로 보이는 가로노마의 판자문 그림.

 

 두 번째로 격식 높은 방 와가마쓰노마와 쇼쿤노마(안쪽)

 

화려함의 극치, 쇼쿤노마

 

장대하게 펼쳐진 마루의 끝에 이르자 문 사이로 화려한 방이 얼핏 보인다. 쇼쿤노마이다. 잠시 본 것이 후회되었지만 뇌리에 강렬하게 남았다. 나중의 감동을 위해 애써 외면하며 문지방을 넘었다. 모퉁이를 돌자 일제히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목이 없는 사람들이 열린 문에 빼곡히 들어서서 진풍경을 이루었다.

 

 

 

겨우 빈틈이 생겨 그 대열에 끼어들어 까치발로 섰다. 앞으로 화려한 쇼쿤노마가 황홀하게 펼쳐졌다. ‘쇼쿤노마(昭君之間)’에는 중국 후한 원제의 후궁으로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간 왕소군의 고사를 그린 그림이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 왕소군의 그림이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가토 기요마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숨기기 위해 만들어진 방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화려한 쇼쿤노마

 

 

그래서일까. 이 방에는 밖으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있고, 외부의 침입자가 밟으면 휘파람새 울음 같은 소리가 나는 특수하게 만든 마루인 우구이스바리가 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은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었던 가토 기요마사는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으로 여생을 보내는 등 이중적인 행보를 보인다. 보는 이에 따라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다했으며, 표면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예를 다했을 뿐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쇼쿤노마는 성주의 방인만큼 화려함의 극치이다. 최고의 격식을 갖춘 곳으로 중국의 궁궐 이야기를 다룬 그림 등의 장벽화가 있다. 붉은 기둥과 부재들, 하얀 벽면, 도코노마(서화와 꽂꽂이를 장식하는 공간), 치가이다나(다구나 장식품을 놓는 선반), 다다미, 천장까지 형형색색의 그림과 금빛의 장식들로 빛이 난다. 어느 한 곳 빠뜨리지 않고 최고의 기술로 화려하게 맘껏 치장했다.

 

 쇼쿤노마의 화려한 천장.

 

 

내가 보기에 이곳 쇼쿤노마의 절정은 화려한 천장이다. 이곳의 천장은 보통의 천장보다 높은 데, 우리식으로 보자면 반자틀 천장에 가깝다. 반자틀 천장은 서까래가 보이지 않도록 자재를 써서 가린 구조물인 반자로 천장을 꾸민 것이다.

 

 

 

특히 쇼쿤노마의 천장은 잘 다듬어진 나무를 사용하여 우물 정자 모양으로 천장을 꾸민 우물반자 모양인데, 구조 자체가 천장 구성 중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구조인 데다가 금박 위로 갖은 꽃과 나무가 장식되어 최상의 천장이 된 것이다. 옻칠을 하고 보통 천장보다 높은 이 천장을 ‘오리아게고’라 한다.

 

 

혼마루 어전에서 나오는 길, 하오리를 걸친 중년의 사내가 길 가운데에 서서 나지막하지만 날선 목소리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한쪽 방향으로 줄을 세운다. 사람들은 그의 지시대로 줄을 지어 좌측통행을 한다. 질서와 순응, 여기는 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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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성을 알려면 꼭 올라야 하는 구마모토 성 우토야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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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성을 알려면 이곳을 올라야…구마모토 성 우토야구라

일본어 한마디 못하면서 무조건 떠난 배낭여행⑤-4, 구마모토 성

 

모든 게 그렇다. 처음의 열정은 절정에 이르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최고의 장면을 보고 나면 나머지 장면은 웬만해선 감동을 주지 않는 법. 게다가 절정에 대한 감정이 때론 짜인 각본 때문이란 걸 눈치 챈다면 감동은 이내 식고 만다. 그래서 여행자에게 필요한 건 감동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 감동을 지속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천수각에서 본 우토야구라

 

가장 감동 깊었던 우토야구라

구마모토 성을 찾는 대다수 관광객들은 천수각과 혼마루 어전을 둘러보고 발길을 돌린다. 특히 한국에서 가는 패키지 여행상품이라면 더욱 그렇다. 천수각 일대에서 북적대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면 그제야 여백으로 남은 공간 한편으로 우뚝 솟은 오랜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천수각에서 본 우토야구라

 

얼핏 보면 천수각과 같은 모양새지만 규모는 훨씬 작다. 그럼에도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 근래에 복원한 천수각에서는 볼 수 없는 뭔지 모를 중후한 멋이 있다는 건 조금의 눈썰미만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니노마루에서 본 소천수(좌), 우토야구라(중), 대천수(우). 우토야구라의 지붕기와만 4만6천 장에 달한다.

 

구마모토 성에서 가장 감동 깊었던 곳을 꼽으라면 혼마루 어전의 화려한 ‘쇼쿤노마’도, 숨이 멎을 듯한 긴 성벽 ‘나가베이’도, 쥐도 기어오를 수 없다는 높고 가파른 석벽 ‘니요노 이시가키’도, 지하통로인 ‘구라가리쓰로’도 아니다.

 

 니노마루 광장에서 본 우토야구라(왼쪽)와 소천수와 대천수.

 

바로 이곳 오토야구라와 니노마루 광장에서 바라본 구마모토 성의 풍경이다. 단체로 오는 관광객들은 시간에 쫓겨 거의 보지 못하는 이 두 곳을 보지 않고서는 구마모토 성을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옛 구마모토 성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상상하기에는 우토야구라만 한 곳이 없고 난공불락의 구마모토 성이라는 걸 실제 느끼려면 정문 격인 호아테고문을 나와 니시오테야구라몬 밖 니노마루 광장에서 바라보는 구마모토 성의 풍경을 빠뜨릴 수 없다. 숨이 멎을 정도로 은빛으로 빛나는 그 정갈한 아름다움에 누구든 넋을 잃고 말 것이다.

 

 성벽 위에 길쭉하게 들어선 건물인 다몬야구라 양 끝으로 우토야구라와 쓰즈키야구라가 있다. 우토야구라는 지상 5층 지하 1층이다.

 

 

제3의 천수각 우토야구라에 엵힌 사연

왁자지껄한 천수각 성문을 빠져나와 반대편에 있는 우토야구라로 향했다. 우토야구라(宇土櫓)는 성벽에 세워진 일종의 망루이다. 천수각 맞은편에 있는 우토야구라는 1877년 세이난 전쟁 때 천수각 등이 불탈 때에도, 그 후에도 파괴되지 않아 17세기 초의 원형 그대로 보존된 건축물이다. 구마모토 성의 원형, 아니 일본 성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구마모토 성에서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몇 안 되는 건물 중의 하나로 국가지정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어두컴컴한 우토야구라 내부

 

우토야구라는 제3의 천수각이라고도 불린다. 구마모토 성에는 5층 야구라가 총 다섯 개 있었는데, 그중 우토야구라가 가장 큰 야구라여서 제3의 천수각이라 불렸다. 우토야구라는 헤이자에몬마루(平左衛門丸)에 있다. 헤이자에몬마루는 예전 이곳에 헤이자에몬이라는 사람의 저택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성벽 위에 길쭉하게 들어선 건물인 다몬야구라(多聞櫓) 양 끝으로 우토야구라와 쓰즈키야구라(續櫓)가 있다.

 

 반들반들해진 우토야구라를 오르는 나무계단

 

 우토야구라 내부 목재는 주로 소나무를 사용했다.

 

‘야구라(櫓)는 망루를 뜻하는데, 우토야구라는 이름대로 풀이하면 ‘우토 망루’가 된다. 여기에는 이야기 하나가 전해진다. 우토야구라는 원래 고니시 유키나가의 우토 성에 있었던 천수각이었다. 그런데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소속이던 가토 기요마사가 승리하고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에 가담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패하여 처형되자, 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천수각을 통째로 뜯어 옮겨 이곳 구마모토 성의 일개 망루로 썼다고 한다.

 

 

 우토야구라는 17세기 초의 원형 그대로 보존된 건축물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른팔과 왼팔이었지만 늘 앙숙이었던 두 사람은 주군이 죽고 나자 결국 적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상징이었던 천수각이 주인의 운명처럼 일개 망루로 강등되어 구마모토 성으로 오게 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우토야구라를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우토 망루가 아닌 가토 기요마사가 구마모토 성에 맨 처음 세운 천수각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우토야구라는 1985년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해서 1989년 10월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상상의 공간 우토야구라

안은 컴컴했다. 삐꺽거리는 반들반들한 마룻바닥은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음을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 수많은 방들이 들어서 있고 긴 복도를 따라 창호를 바른 창들이 나 있다. 창으로 비친 빛을 따라 어둠을 뚫고 나아간다. 천장 또한 낮아 허리를 굽히지 않고서는 도저히 지나갈 수 없다.

 

 

 

마루의 끝에 이르렀을 때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을 보는 순간 당혹감이 밀려왔다. 겨우 한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폭도 난감했지만 수직에 가까운 계단은 보기에도 아슬아슬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꽉 쥐었든지 반들반들해진 난간은 원래의 두께보다 훨씬 줄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였다.

 

 우토야구라에서 본 니시데마루(앞)와 니노마루(성벽 뒤) 전경

 

 반들반들해진 우토야구라를 오르는 나무계단

 

행여나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를 염려하며 난간을 꽉 붙잡고 온 힘을 다해 계단을 올랐다. 간혹 열려진 창틈으로 햇살이 뿌옇게 비쳤을 뿐,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마치 저 컴컴한 구석에서 금방이라도 야수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오싹함과 층계를 다 오르고 나면 무엇이 나타날까 하는 기대감이 묘하게 뒤섞였다.

 

 

잠시 후 앞이 환해졌고 맞은편으로 천수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 상상은 거기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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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할복할 것 같은 숨막힌 아름다움, 구마모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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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현실에서 과거로 훅 빨려 들어가는 듯한 풍경

일본어 한마디 못하면서 무조건 떠난 배낭여행⑤-5, 구마모토 성

 

  니노마루 광장에서 본 대소천수각과 우토야구라(중앙)

 

성을 벗어나기로 했다. 우토야구라를 관람하고 나왔을 때 이미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기 때문이다. 성 안에는 마땅히 식사할 곳이 없었다. 지도를 찾아보니 성 밖에 사쿠라노코지라는 음식점 단지가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통편을 알아보니 마침 아래로 가는 셔틀버스가 있었다. 버스는 호아테고몬에서 식당이 있는 조사이엔을 7분 간격으로 운행하고 있었다. 안내소에 있는 안내원에게 버스 타는 곳을 묻자 처음엔 손가락으로 가리키다가 이내 따라오라며 손짓하더니 버스가 있는 곳까지 앞서 걸어갔다. 역시 친절한 일본인이다.

 

 ▲  23개의 특징 있는 음식점과 기념품 매장이 있는 사쿠라노코지

 

성의 심장부 혼마루를 지켜라

마을에서 점심을 먹은 후 다시 버스를 타고 성으로 돌아왔다. 버스 정류장을 찾느라 그냥 지나쳤던 호아테고몬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으로 오후 답사를 이어갔다. 오전의 여행이 구마모토 성의 핵심 구역들을 관람한 것이라면 오후에는 핵심 구역에서 외곽으로 빠져나오면서 성의 구조를 다시 한 번 살피는 것이다.

 

  구마모토 성의 정문 격인 호아테고몬

 

앞서 이야기했지만 일본 성은 천수각을 중심으로 이중삼중으로 겹겹 에워싸는 방식이다. 천수각이 있는 성의 중심부가 첫 번째 성곽인 혼마루(本丸)이고, 그 혼마루를 에워싼 두 번째 성곽이 니노마루(二の丸)이고, 니노마루를 다시 에워싼 세 번째 성곽이 산노마루(三の丸)이다. 이들 구역의 목적은 오로지 단 하나, 성의 심장부인 혼마루를 방위하는 것이다.

 

 

▲ ▼ 안쪽에서 본 니시데마루의 성벽은 얼핏 전쟁을 위한 성벽이라기보다는 무슨 전시관의 담장처럼 평화로우면서도 선적인 매력이 있다.

 

 

구마모토 성은 혼마루를 성곽의 한쪽 구석에 배치한 제곽식 구조이다. 대개 일본의 성에는 혼마루 방어를 위한 니노마루에도 어전이라 불리는 거주공간과 정원을 두기도 한다. 산노마루에는 무사 저택을 배치한다. 구마모토 성에서는 혼마루에는 어전이 있으나 니노마루에선 그 흔적을 볼 수 없었다. 다만, 산노마루 구역에 호소카와 교부 사무라이 저택이 있었다.

 

 

  구마모토 성의 현관에 해당하는 니시오테야구라몬은 가장 격식 있는 성루 문으로 꼽힌다.

 

구마모토 성은 서쪽을 바라보고 동쪽을 등지고 있다. 그래서 서쪽에 있는 호아테고몬이 정문이고 니노마루와 산노마루의 성벽도 서쪽에 주로 둘러쳐 있다. 대신 동쪽은 높은 성벽과 해자에 둘러싸고 야구라(망루)를 밀집시켜 철벽 방어를 했다. 천수각에서 우토야구라, 호아테 고몬, 니시오테야구라몬 등을 지나다 보면 성벽으로 겹겹 둘러싸인 철옹성 구마모토 성을 실감하게 된다.

 

  안쪽과는 달리 바깥에서 보는 니시데마루의 성벽은 깊이 파인 해자 너머로 높이 솟아 있다.

 

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호아테고몬을 나오면 니시데마루이다. 건물이라고는 없이 드넓은 잔디광장 끝으로 멀리 성벽이 하늘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니시데마루의 성벽은 얼핏 전쟁을 위한 성벽이라기보다는 무슨 전시관의 담장처럼 평화로우면서도 선적인 매력이 있다. 그 끝에 이누이야구라(서북쪽 망루)가 있다.

 

 

 

비정한 아름다움을 보다

니시오테야구라몬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온다. 성의 중심인 혼마루를 방위하는 니시데마루에는 서쪽(니시), 남쪽(미나미), 북쪽(기타)에 각기 세 개의 성루(야구라) 문(몬)이 있다. 니시오테야구라몬, 미나미오테야구라몬, 기타오테야구라몬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성의 현관에 해당하는 니시오테야구라몬이 가장 격식 있는 성루 문으로 꼽힌다.

 

 

 

니시오테야구라몬을 나오면 니노마루 광장이다. 이곳에선 여태껏 본 구마모토 성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깊게 파인 해자 너머로 초록의 잔디가 양탄자처럼 짙게 깔려 있고, 그 위로 회색빛의 높은 성벽이 길게 뻗어 있다. 초록의 잔디와 파란 하늘은 원색에 가까운데 성벽과 성루는 흑백의 필름 같다. 갑자기 현실에서 과거로 훅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화려하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은 잠시 잊어버리고 담백했던 과거의 삶이 그리워지는 풍경이다.

 

  두 번째 성곽인 니노마루는 지금은 잔디가 깔린 넓은 광장으로 변했다.

 

 

잿빛의 성벽 위로 불쑥 솟은 은빛의 대소천수각과 우토야구라는 상상 속의 성인 양 아득하고 아련하기만 하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은 비정하다. 인간의 온기라고는 느낄 수 없는 무사의 냉랭한 기운이 느껴진다.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니 그 냉혹함조차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보이겠지만 그 속에 있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 막힐 지경이다. 극도로 절제된 미, 금방이라도 할복할 것 같은 넘치는 긴장미에 마냥 아름답다고만 할 수 없을 듯싶다.

 

 

해자 너머로 보이는 니시데마루의 서북쪽 망루 이누이야구라

 

 

이 절제되고 검박하고 냉혹하기까지 한 풍경을 보고 있자니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망하게 죽어 갔을까, 하는 연민이 저 밑에서부터 생긴다. 높은 성벽 안에서 화려함을 누린 자와 깊은 해자에 슬픔을 묻은 자, 분명 둘의 아름다움은 다를 것이다. 비정한 아름다움과 두려운 아름다움….

 

 

 

지슈칸 터를 지나니 광장 끝으로 성터가 얼핏 보인다. 니노마루 고몬 터이다. 폐허가 된 니노마루와 산노마루에는 성곽의 흔적만 일부 보일 뿐이다. 난공불락이라는 것도 인간의 언어일 뿐, 자연 앞에서는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그 어마어마한 넓이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구마모토현립미술관을 지나 성을 나온다. 고코쿠 신사가 있다. 여기서도 옛 성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니노마루 광장을 산책하는 기모노 차림의 일본 여인들.

 

길은 두 갈래이다. 옛 호소카와 교부 저택으로 발길이 이어진다. 호소카와 교부 저택은 산노마루 구역에 있다. 성의 가장 바깥쪽으로 무사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곳은 그 산노마루 사무라이의 집이다.

 

  니노마루 광장 끝으로 보이는 니노마루 고몬 터. 이 성문을 나가면 세 번째 성곽이었던 산노마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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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5만원, 훈민정음 해례본 직접 구입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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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5만원, 훈민정음 해례본 직접 구입했더니

-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복제본)

 

아, 책 한 권에 이렇게 긴장하긴 처음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복간되었다는 소식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구입을 결정했습니다. 독서가 아닌 소장용으로 책을 구입한 건 처음입니다.

 

25만 원이라는 가격에도 망설임이 없었던 건, 책 만들고 글 쓰는 사람으로서 꼭 지니고 있어야 될 것 같은 일종의 의무감도 있었습니다. 초판 3000부 한정판이라는 매력도 한몫했고요. 오염된 것까지 그대로 복원한 방식도 그렇고요…. 상자에 담긴 해례본을 꺼내는 것도 설렘의 연속이었습니다. 아, 지금 생각해도 책을 손에 넣었던 지난 14일을 잊을 수가 없네요.

 

 

훈민정음이라고 적힌 종이상자를 조심히 열었습니다.

 

 

상자는 자연스럽게 해체되고 검은 표지에 훈민정음이라고 적힌 검고 견고한 상자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 견고한 상자를 열자 이번에는 은빛 띠를 두른 자줏빛 보자기가 나왔습니다.

 

 

은빛 띠를 걷어내고 자줏빛 보자기를 들어내자 그 안에 책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양장으로 제작된 훈민정음 해례본 해설서가 있었습니다.

 

 

보자기를 조심스럽게 젖히자 그 안에 세로로 훈민정음이라고 적힌 해례본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냅니다. 무한감동이지요. 한참 이리저리 돌려보다 첫 장을 열자 국어 시간에 배웠던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서문이 보입니다.

 

 

비록 복제본이지만 해례본의 원래 상태를 그대로 재현했다고 들었는데, 역시나 그렇습니다. 새 책임에도 옛 책의 향기가 물씬 풍깁니다. 마지막 간기면에서 초판 1쇄임을 확인하고 조용히 책을 덮었습니다. 책은 국배판보다 가로가 조금 좁은 대신 세로가 긴 290*201mm 크기였습니다. 해설서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해례본과 대조하며 읽어 봅니다. 앞으로 종종 한 번씩 꺼내 보면서 글 쓰는 사람으로서 한글에 대한 경의를 표할 생각입니다.

 

 

훈민정음은 크게 ‘예의’와 ‘해례’로 나누어져 있답니다.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은 글로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해례’는 정인지,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등 집현전 여덟 학사들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례를 상세하게 설명한 글입니다. 흔히 『훈민정음 언해본』이라 부르기도 하지요.

 

예의 부분은 무척 간결해서 곳곳에 실려 전해졌지만 한글 창제 원리와 사용법을 소상하게 밝힌 해례는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다가 1940년에 간송 전형필이 입수하여 해방 후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해설서까지 갖추고 있는 문자는 세계에서 한글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훈민정음 해례본은 국보 제70호이면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지요.

 

 

이번 훈민정음 해례본 복제본은 간송미술문화재단이 기획하고 교보문고에서 제작했습니다. 한 세트 가격이 무려 25만 원이지만 출간 10여일 만에 교보문고 인문 분야 베스트셀러 8위를 기록하며, 19일까지 1800부 정도가 팔렸다고 합니다. 한글에 대한 애정과 소장 가치가 낳은 결과로 보입니다.

 

한편에서는 너무 비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복제본을 제작한 교보문고 측에 따르면 제작비가 12만 원 정도 들어간 데다 인건비, 마케팅 비용 등을 따지면 결코 비싸지 않다는 입장입니다. 그럼에도 교보문고 측에서는 복제본의 디테일을 줄여서라도 저렴하게 생산해서 대중 보급판의 제작 판매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복제본은 원본의 빛바랜 종이 질감부터 얼룩이나 찢어진 부분까지 재현했습니다. 또 원본처럼 종이를 반으로 접어 앞뒤로 쓰는 ‘자루매기 편집’과 구멍을 4개 뚫어 노끈으로 묶는 4침 안정법의 제본 형태로 제작해서 더욱 눈길을 끕니다. 아무튼, 오래도록 간직할 우리의 소중한 유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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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옥마을 고양이의 은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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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옥마을 고양이의 은둔법

 

지지난 주에 전주한옥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예전에 번질나게 드나들던 곳이지

근래에는 찾은 적이 없었습니다. 

 

 

예전에 비해 한옥마을 일대가 상당히 바뀌었더군요.

깔끔히 정비된 거리에는

많은 상점들과 밀려든 인파들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주말이라 워낙 사람이 많아서 쉽게 지치더군요.

마침 예쁜 카페가 하나 보여 들어갔습니다.

 

 

바깥에서 보는 것과 달리

카페 안은 정말 매력이 넘쳤습니다.

작지만 예쁜 정원도 인상적이었고요.

 

 

커피를 마시며 바깥 풍경을 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나무벽 작은 창에 고양이가 앉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인형을 올려 놓은 줄 알았습니다.

 

 

하도 예뻐서 가까이 다가가보니 고양이였습니다.

 

 

어떻게 저런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는지.

주인의 발상과 고양이의 재치가 보통이 넘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양이는 오로지 먹는 데에만 집중합니다. 

 

소란스러운 곳에서도 평상심을 유지하는

고양이의 은둔법에 경의를 표합니다.

 

'야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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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옛 여행사진을 보며

벌걸음 멈추게 한 시골역 두 사진

동백꽃 지심도 하루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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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은 아직 일러도… 지심도 산책

 

다만 그 마음뿐. 동백섬 지심도로 간다. 장승포에서 잠시 바다에 몸을 실으면 이내 섬에 이른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느티나무 같은 아름드리 동백나무와 상록수가 섬을 덮고 있다. 제주에서 뭍으로 나오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섬은 정말 마음 心자를 꼭 빼닮았다. 아니 심장의 모양새다. 섬 건너편의 망산 봉수대에 올라 봐도 섬은 꼭 그렇게 생겼다.

 

 

상록수 짙은 섬의 숲 속에는 십여 채의 민박집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마끝으로 간다. 민박집에서 오른쪽 숲길을 택하면 섬의 남쪽 끝, 마끝이다. 마치 지중해의 지브롤터 해협처럼 섬과 육지 사이는 지척이다. 그래서일까. 섬은 더욱 애틋하다.

 

 

 

검푸른 바다가 출렁이는 낭떠러지인 마끝은 동백섬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리만치 기암괴석의 별스런 풍경을 보여준다. 어디 그뿐이랴. 오랜 고사목과 멋스런 소나무 들이 이곳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세상의 끝임을 외치듯 비장하게 도열해 있다. 이따금 오가는 어선들과 바다에 부딪히는 강한 햇살에 섬의 남쪽은 눈부시다. 마끝은 역시 지심도에서 가장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아직 동백은 요원하다. 숲길에서 겨우 한두 송이 꽃을 봤으나 예의 그 선홍빛은 아니었다. 홀로 피어나니 모진 바람을 이겨내지 못해 붉은 기운마저 잃고 있었다. 12월 초부터 피어나기 시작하는 이곳 동백은 4월 하순까지 붉은 꽃빛을 유지한다. 예전에 걸었던 붉은 꽃송이가 수북하게 깔린 동백 숲 터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동백꽃은 아직 일러 아니 피었어도 새 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온다. 저건 동박새일까, 아니면 직박구리일까. 새의 노랫소리조차 분간할 수 없는 무지를 탓하며 한 줄기 햇살도 스며들지 못하는 어둑어둑한 상록수림을 걷는다.

 

 

마끝에서 포진지로 가는 샛길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마을 사람만 알음알음 다니던 옛길엔 대숲이 들어찼다. 초등학교에 들렀다가 포진지로 향한다. 아름다움은 늘 그 안에 깊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울창한 숲에 묘한 두려움마저 엄습해 온다. 이 으슥한 곳에도 섬은 여지없이 역사의 생채기를 드러내고 있다.

 

 

사방이 탁 트인 활주로에서 발길을 돌린다. 섬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바지런함을 버리고 나머진 상상에 맡기기로 했다. 무언가에 쫓기는, 여백이 없는 여행은 늘 바쁘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음을 이곳에서 다시금 확인한다.

 

 

대신 민박집에서 섬 막걸리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주인장이 좋아하는 유행가가 다소 생뚱맞지만(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막걸리 맛은 일품이었다. 그 어설픈 파전은 또 얼마나 맛있든지. 아무튼 이번 지심도 섬 여행은 여기서 끝이 났다.

 

 

 

나중에 장승포 선착장에서 만난 사내만 아니었다면 섬은 그냥 아름답게만 남았을 것이다.

 

“지심도에서 나오는 모양이오. 지금 뭐 볼 것이 있던가요. 봄에 와야 동백이 지천이지. 아참, 거기 아직 모기가 많죠. 예전엔 모기섬이라 불렀어요. 지금은 모기가 많이 없어졌지만요….”

 

그제야 아까 막걸리를 마시며 모기에게 뜯기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배가 들어왔다.

 

 

☞ 지심도에 가려면 거제도 장승포항(지심도터미널)을 찾으면 된다. 배 운항 시간은 장승포에서 8시 30분, 10시 30분, 12시 30분, 14시 30분, 16시 30분에 출발하고, 지심도에서 8시 50분, 10시 50분, 12시 50분, 14시 50분, 16시 50분에 출발한다. 성수기와 휴일에는 배가 증회 운항한다. 요금은 왕복 어른 12,000원, 아이 6,000원이다. 두세 시간이면 섬 전체를 느긋하게 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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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전등사의 깊어가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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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전등사의 깊어가는 가을

- 원숭이인가 싶었는데, 벌거벗은 여인이... 

 

오랜만에 강화도에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 20년 되었네요. 처음 강화도에 와서 놀랐던 건 남도의 섬과는 너무나 다른 땅의 생김새였습니다. 흔히 섬 하면 평지라고는 눈 씻고도 찾을 수 없는 첩첩 산중에 겨우 손바닥만 한 평평한 땅이 전부인데, 강화도는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광활한 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고려가 강화도에서 몽고군에 맞서 그렇게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 비옥한 농토 덕분이 아니었을까 하고 처음으로 현실감 있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요. 척박하리라 여겼던 섬에 대한 선입견은 이후에 진도에 갔을 때에도 그 기름진 땅을 보고 확실히 깨어져 나갔습니다.

 

 

이번에는 전등사만 들렀습니다. 전등사에 대한 기억은 그리 선명하지가 않군요. 정족산성이 있었다는 것과 조금은 휑한 듯 한갓지던 절 마당만 어렴풋이 떠올랐을 뿐이죠. 만추였습니다. 기억은 붉디붉은 단풍에 물들어 버렸고 절로 가는 마음도 그랬습니다.

 

 

입구부터 어수선했지요. 이곳에선 산성의 문이 절의 산문을 대신했습니다. 종해루라는 현판을 단 남문은 한창 수리 중이었습니다. 정족산성은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여 삼랑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성에 올라 성문 좌우로 산으로 달음질하는 구불구불한 성벽에 한참이나 눈길을 주었습니다. 자로 잰 듯한 반듯한 돌이 아닌 그냥 막 생긴 대로 쓴 성벽 돌이 너무나 친근하게 다가와서 말이지요.

 

 

전등사. 법을 전하는 절이라는 뜻이겠지요. 그 옛날 아도 화상이 전한 진리의 등불이 시공에 구애됨 없이 꺼지지 않고 전해지는 것이겠지요. 붓다는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게 됩니다. 결국 자신을 등불 삼아 밝히고 법을 등불 삼아 밝히는 것이 불가의 뜻이니 절 이름의 유래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고 한 생각 쉬어 봅니다. 결국 바깥이 아닌 안에서 찾는 것, 바로 그것이겠지요.

 

 

산사라고 하기에는 무색하리만치 전등사는 몸살을 앓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세도 제법 커진 것 같고요. 그러다 보니 예전에 없던 건물들이 이곳저곳에 생겨나서 산사의 고요함은 옛이야기에만 남은 듯합니다. 서울이 지척이니 이곳 또한 서울처럼 번잡하게 되어가는 것이겠지요.

 

 

대조루 누각 층계 아래서 한참이나 기다려서야 깊은 침묵을 담았습니다. 침묵은 이제 이런 산사에서조차도 쉬이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부상

문득 대웅전 처마 밑을 보다 벌거벗은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원숭이인가 했는데, ‘나부상裸婦像’이라는군요. 대웅전 네 귀퉁이에 각기 다른 손 모양을 하고 있어 법당을 빙 돌며 바라보다 절로 ‘까르르’ 웃게 되더군요.

 

 

시인 고은이 한때 이 절의 주지로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시에서 이 나부상을 이렇게 읊고 있습니다.

 

‘강화도 전등사는 거기 잘 있사옵니다./ 옛날 도편수께서/ 딴 사내와 달아난/ 온수리 술집 애인을 새겨/ 냅다 대웅전 추녀 끝에 새겨놓고/ 네 이년 세세생생/ 이렇게 벌 받으라고 한/ 그 저주가/ 어느덧 하이얀 사랑으로 바뀌어/ 흐드러진 갈대꽃 바람 가운데/ 까르르/ 까르르/ 서로 웃어대는 사랑으로 바뀌어/ 거기 잘 있사옵니다.’

 

 

여인이 어쩌다 목수를 배반하고 도망을 쳤는지는 모르겠으나 도망친 여인을 저렇게 벌거벗겨 무거운 추녀를 받치게 한 건 조금은 가혹하지 않나 싶습니다. 요즈음이라면 난리가 나겠지요. 물론 이 또한 해학으로 웃어넘기면 그만이겠지만요.

 

 

하여튼 대웅전은 그 고졸한 맛이 으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실 여행자의 눈길을 끈 건 번듯한 법당 건물도, 화려한 법당 내부의 불단과 닫집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기둥과 주춧돌이었습니다. 자연석인 주춧돌은 울퉁불퉁 제멋대로입니다. 그 못난 주춧돌을 전혀 다듬지 않고 대신 기둥을 주춧돌 모양에 맞추어 세웠습니다. 이것을 ‘그랭이’라 하는데요. 참으로 천연덕스럽고 자연스런 우리의 건축술이지요.

 

 

 

마침 사시마지라서 스님들이 분주하게 법당으로 향합니다. 사시인 오전 아홉시에서 열한 시 사이에 부처님께 밥을 올리는 예식이랍니다. 뜰에 서서 예불소리를 듣습니다. 마침 하늘이 개이고 날이 하도 청명하여 예불의 울림소리가 퍽이나 좋습니다. 어수선한 절집과는 달리 이곳이 정토임을 알겠습니다. 귀를 활짝 열어 반깁니다.

 

 

 

전등사에 오면 빠뜨릴 수 없는 정족사고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조선의 5대 사고라는 그 명성에다, 사고로 가는 오솔길과 장하게 자란 나무와 그 너머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는 전각과 전각에서 내려다보이는 강화도 앞바다 푸른 물결의 아름다움에 절로 감탄이 나오는 풍경입니다. 그 아름답고 서늘한 풍경에는 역시나 목은 이색의 시가 제격이다 싶습니다.

 

“ (…) 창틈으로 보인 산은 하늘에 닿았고/ 누각 아래 부는 바람 물결로 여울지네 (…)”

 

 

 

다시 대조루 주련에 달린 이색의 시를 마저 읽으며 깊어가는 전등사의 가을을 읊어 봅니다.

 

‘백 길 폭포 자락/ 엷은 구름은 바위 사이로 피어나고/ 외로운 달은 파도에 일렁인다/ 옷소매 자락에 동쪽 바다가 있고/ 영마루에 흰 구름도 가득하여라/ 푸른 산은 티끌 밖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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