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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10대의 전설, 우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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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오지암자의 수행자를 찾아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 24〕지리 10대의 전설, 우번대

 

 

 종석대에서 본 만복대 일대
ⓒ 김종길 

 

 

지난가을이었다. 지리산 반야봉 아래 깊숙이 숨은 1500고지 묘향대를 각고 끝에 찾아갔을 때 호림 스님에게서 우번대라는 곳을 처음 듣게 되었다. 지리산 10대 중의 하나인데, 상무주암 현기 스님처럼 40년 넘게 홀로 수도하고 있는 스님이 있다는 것이었다. 우번대로 가는 길도 자세히 설명해주었으나 당시로선 실제로 가보지 않았으니 미루어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해가 바뀌었고 날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따듯한 5월쯤에는 가봐야겠다는 계획을 나름 세우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월간 <마운틴> 강성구 기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예전부터 인터뷰를 하고 싶었는데 이번 암자 가는 길에 동행취재를 하고 싶다는 청이었다.

사실 지리산 암자를 다녔던 작년 5월부터 함께 가기를 원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으나 오지 암자의 경우 하룻밤을 산장에서 자고 하루 종일 산을 타야 하는 만만치 않은 여정이라 거절했다. 게다가 나 또한 초행길이라 안전을 약속할 수 없었다. 강 기자의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으나 그가 산악전문기자라는 데 생각이 미쳤을 때 두말없이 흔쾌히 수락했다.  


기사 관련 사진
 종석대
ⓒ 김종길

 


지리산의 서쪽 끝, 종석대

인월 버스정류장에서 강 기자를 만나 성삼재로 향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가는 길, 코재에서 구름을 쫓아 우번대로 향했다. 너른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그 끝에 거대한 암반 덩어리가 하늘로 우뚝 솟아 있다. 종석대(1356m)이다. 종석대는 문자 그대로 거대한 바위 종을 엎어 놓은 형상이다. 노고단 못지않은 경관을 자랑하며 그 기세가 당당하다.

이곳에 오르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번대 법종 스님의 말로는 예전 지리산 빨치산들이 이곳 종석대에 올라 사방을 파수했다고 한다. 구례들판과 섬진강, 노고단 방면, 주능선 쪽, 만복대 등의 북쪽 능선 등 동서남북 보이지 않는 곳이 없으니 지리산 서쪽 방면에서 토벌대의 이동을 파악하기에는 이곳만 한 곳도 없었을 것이다. 흔히 지리산 주능선의 서쪽 끝 봉우리를 노고단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종석대가 서쪽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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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빛
ⓒ 김종길

 


오지여서 제대로 된 길이 없을 거란 추측은 기우에 불과했다. 우번대 가는 길은 지리산 속의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오지라고 여기기에는 너무나 잘 정비된 오솔길엔 봄빛이 넘치고 넘쳤다. 다만 이따금 나타나는 능선 길은 이곳이 예사 땅이 아님을 말해주는 듯 매서운 바람에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우번암의 스님

숲 사이로 아주 튼실해 보이는 건물 한 채가 나타났다. 우번암의 별채였다. 돌의자에 앉아 잠시 요기를 한 후 바로 곁의 우번암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번암은 아주 낡았지만 규모는 제법 컸다. 바람이 매서웠다. 겨울에는 더 심한 모양. 외딴 섬마을의 집처럼 지붕이 날아갈세라 사방을 끈으로 연결해서 땅바닥에 박은 쇠말뚝에 단단히 고정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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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번대 별채
ⓒ 김종길

 


암자 옆으론 텃밭이 있고 그 뒤에 작은 바윗돌에 둘러싸인 제단이 보인다. 산신각이다. 산왕(山王)이라고,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작지만 반듯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거창하게 산신각이라는 건물을 짓는 수고로움보다 마음과 믿음을 바위에 새기는 지혜로움이 엿보인다. 크게만, 크게만 지으려고 하는 오늘의 종교 건축이 얼마나 허상을 쫒고 있는 것인지, 이 소박한 산신각이 덧없음을 보여준다.

암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본능적으로 사람의 체취를 느꼈다. 한참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데, 헛기침 소리와 함께 스님이 나왔다. 얼핏 보기에 수행자라기보다는 산지기처럼 보였다. 초라한 행색 때문이 아니라 승복을 입고 있지 않아서다. 아직도 추위가 매서워 아웃도어 의류와 점퍼를 껴입은 채 신발도 두툼한 등산화를 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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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번대
ⓒ 김종길

 


흘깃 우리 쪽을 보고 난 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스님은 샘물가로 향했다. 그러곤 샘물 한편에 놓인 항아리의 뚜껑을 잠시 열어보더니 이내 암자 안으로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다시 암자엔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스님이 다시 나왔다.

"핫셀(독일의 카메라 기종)을 아시오?"
"네? 아 예…."

아이 같다. 무심한 듯 농담처럼 툭툭 내뱉다가도 활짝 웃는다. 그러곤 다시 카메라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마치 장난감에 푹 빠진 아이처럼 기뻐 어쩔 줄을 모르며 자신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 나 또한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순간 비치는 형형한 그의 눈빛을 보았다. 천진난만한 웃음 속에 감추고 있는 어떤 날카로움, 빛이 번쩍이는 듯했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스님께 물었다.

"스님, 우번대에 머문 옛 스님들이 있으신지요?"
"그걸 왜 물어보오. 글쎄…. 수월 스님, 용하 스님이 머물렀죠. 검찰총장 김진태를 아시죠. 수월 스님에 대해 쓴 모양인데, 수월 스님이 이곳에서 수도를 했지요. 그래서 그 양반이 언젠가 이곳을 들렀지. 그때는 그 사람이 김진태라는 사람인 줄 몰랐다오. 그가 가고 난 뒤에 사람들이 김진태라고 말했지만, 그게 뭐 대수요?"

다시 카메라 이야기로 이어졌다. 마냥 신이 난 아이처럼 모든 말들의 길을 끊어버리고 오로지 사진 이야기에만 집중했다.

"사진, 그것도 한 20년 했더니 내가 못 견디겠더라고요. 필름도 없어지고, 사진도 없어지고, 급기야 카메라까지 없어지니 괴로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카메라고 사진이고 죄다 인연을 싹둑 잘라버렸지 말이요. 사진이라는 게 그 이상하게도 공부(참선)하는 거 하고 비슷하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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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끼질
ⓒ 김종길

 


우번대 토굴 자리

암자에서 만난 스님의 법명은 법종 스님이었다. 지금의 암자는 50년 전쯤 스님의 스승인 백운 스님이 지었다. 범어사와 봉암사에서 수행을 하던 법종 스님은 스승인 백운 스님이 이곳 우번대를 소개해서 들어온 후 지금까지 40년 넘게 이곳에 머물고 있다. 법종 스님이 들어오기 전에는 작은 토굴이 전부였다.

"원래의 자리는 여기가 아니라 저기 텃밭이요. 저기 텃밭에 토굴이 있었지요. 언제인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풍수를 좀 보는 사람인 듯했소. 하루는 이곳을 지나갔는데 아래 별채를 보고 '우번대, 우번대 하더니만 별 것 아니구먼' 하고 가더라 말이요. 그래서 내가 거기는 별채고 여기가 우번암이요 했더니 '음, 이곳은 좀 낫군' 하지 않겠소. 그래서 다시 '원래의 우번대 자리는 저기 텃밭으로 쓰고 있는 곳이오' 했더니 그제야 그 사람이 무릎을 탁 치며 '그러면 그렇지. 과연 우번대가 헛소문은 아니었군'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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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번암과 옛 토굴이 있던 텃밭
ⓒ 김종길

 


예전 텃밭에는 방 한 칸, 부엌 한 칸의 허름한 토굴 한 채가 있었는데, 그곳이 원래의 우번암 자리였다. 공부는 거기서 해야 제대로 이루어진다며 스님은 아이 같은 얼굴로 히죽거린다. 비가 억수같이 와도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금세 물이 빠져 흙이 보송보송해지는 곳이란다. 기운이 모이는 곳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터로 치면 옛 토굴 터가 제일이요. 그다음이 지금의 암자요, 마지막이 별채란다. 과연 텃밭에 서 보니 바람마저 숨을 죽였다.

"스님, 이곳이 오지라 오는 길이 제대로 없을 줄 알았는데, 길이 너무나 잘 정비되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허참, 그건 내가 나무를 자르고 풀을 베서 매번 길을 정리하기 때문이요. 아니면 아주 위험해요. 뱀이 득실거려. 그것도 깊은 산중이다 보니 거의 살모사라. 한번 물리면…. 길을 정리 안 하면 뱀이 있는 줄 모르고 물리기 십상이지. 엊그제도 한 마리가 나왔더구먼."

그러고 보니 우번이라는 이름이 낯설다. 지리산 대부분의 지명이 불교에서 온 말이지만 우번은 아무래도 정확한 뜻이 떠오르지 않는다. 스님께 여쭈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기록들을 뒤적이니 전설 한 토막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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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번대
ⓒ 김종길

 


우번대의 전설

옛날 신라 때 젊은 스님 우번이 조용한 상선암을 찾아 10년 동안의 좌선 수도를 결심하고 혼자서 열심히 불도를 닦기 시작했다. 우번이 정진하던 9년째 되는 어느 봄날이었다. 선녀처럼 아름다운 절세미인이 암자 앞에 홀연히 나타나 요염한 자태로 우번에게 추파를 던지는 게 아닌가. 그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번에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정답게 손짓을 했다. 유혹에 홀린 우번은 젊은 피가 끓어올라 자신이 수도승이란 것도 잊은 채 그 여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 미모의 여인은 보일 듯 말 듯 앞서가며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산새들이 즐겁게 노래하는 아름다운 수림 속을 나는 듯 가볍게 지나쳐 상봉을 향해 높은 곳으로 올라만 갔다. 우번도 놓칠세라 그 여인을 따라 숲속을 헤치며 정신없이 허겁지겁 따라 올라가다 보니 어느덧 종석대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서 요염하게 웃으며 손짓하던 그 여인은 갑자기 사라지고 난데없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고 위엄스레 서 있었다. 우번은 깜짝 놀라 정신을 가다듬었다. 관세음보살이 자기의 도심을 시험하기 위해 미녀로 변신한 것임을 비로소 깨닫고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려 자신의 어리석음과 허튼 마음을 뉘우치고 참회했다.

우번이 다시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니 관세음보살은 간데없고 그 자리에 큰 바위만 우뚝 서 있었다. 우번은 자신의 수도가 크게 부족함을 깨닫고 이때부터 더욱 분발하여 수도정진하기로 결심했다. 상선암으로 다시 내려가는 대신 그 바위 밑에 토굴을 파고 수도정진을 계속했다. 우번은 수 년 동안 수도를 한 끝에 마침내 성불하여 신라의 이름난 도승이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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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번대
ⓒ 김종길

 


그런데 우번 스님이 도통하는 순간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석종(石鐘) 소리가 홀연히 들려왔다. 바로 이 석종 소리가 울렸다고 하여 이 산봉우리를 '종석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종석대는 다른 이름도 함께 갖고 있는데 우번 조사가 토굴을 파고 수도정진한 곳이라 하여 '우번대(牛翻臺)', 관세음보살이 현신(現身)하여 서 있던 자리라고 하여 '관음대(觀音臺)'라고도 불린다.

그 후에도 이곳에서 수도하여 도통한 고승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예부터 우번대와 상선암을 불도의 이름난 영지(靈地)로 손꼽았다. 종석대의 종소리는 지금 들리지 않으나 이곳의 일몰은 황홀경이다. 서쪽의 낙조를 보고 있으니 천 년 전 종소리가 능선 굽이를 넘어 은은히 들려오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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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석대에서 본 성삼재 도로와 우번대(초록 지붕)
ⓒ 김종길

 


암자에서 나오던 길에 한참을 침묵하던 강 기자가 물었다.

"어떻게 저런 외딴곳에서 40년 넘게 있을 수가 있지요? 그 긴 세월을 저 험한 곳에서 홀로 있을 수가 있는 건지요. 그것만으로도 대단하게 여겨집니다. 뭐라고 할까요. 감동적입니다."

 

 

 우번대와 종소리

 

우번대는 성삼재 인근 종석대 아래 1200고지에 있다. 예부터 묘향대, 상무주대, 금대, 서산대, 무착대 등과 같이 지리 10대로 불리며 수도처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러나 전설 같은 이야기만 전해질 뿐 우번대에 대한 이렇다 할 기록은 없다. 다만, 조선조 남효온이 몇 줄의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1454~1492)이 지리산을 유람한 건 34세 때인 1487년 9월 27일부터 10월 13일까지였다. 그는 <지리산일과>에서 “산봉우리에 만복대(萬福臺)가 있었으며 만복대 동쪽에는 묘봉암(妙峰庵)이, 북쪽에는 보문암(普門庵)이 있는데 일명 황령암(黃嶺庵)이라고도 하였다. 이 반야봉 남쪽에는 고모당(姑母堂)이, 고모당의 남쪽에는 우번대(牛翻臺)가 있는데 우번선사(牛翻禪師)의 도량(道場)이었다.”고 적고 있다.

 

우번대라는 이름은 우번 스님의 전설과 함께 ‘소가 몸을 바꾼 자리’라는 뜻이 있다. 신라 때 문수보살과 함께 길을 가던 길상동자가 어느 밭에서 조 세 알을 먹은 후 그 빚으로 소로 변했다. 소가 된 길상동자는 밭주인에게 세 해 동안 일을 해주고 다시 동자로 화신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우번대에는 경허(1849~1912) 스님의 3대 제자를 일컫는 ‘삼월(三月)’ 중 맏상좌인 수월(1855~1928) 스님이 머물렀던 곳이다. 수월은 평생 일하는 수행자로, 글 하나 법문 하나 남기지 않은 그림자 없는 성자였다. 수월은 마흔둘이 되던 1896년에 지리산 천은사와 상선암, 그리고 우번대에서 지냈는데, 여름 결제가 끝난 후 우번대를 찾아가 가을을 홀로 보냈다고 한다.

 

화엄사 주지를 지낸 진응(1873~1941) 스님이 그 강맥을 이은 용하(1892~1980) 스님을 데리고 와서 우번대에서 기도를 했다. 진응 스님은 7일 만에, 시자였던 용하 스님은 15일이 지나서야 신비로운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예부터 우번대에서 기도를 하면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종소리는 누구나 들을 수 있는 화엄사의 종소리가 아니라 기도를 하여 깨우침을 얻은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종석대에서 울려 퍼지는 돌종 소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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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숲속 나무와 바위의 기막힌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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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숲 속 나무와바위의기막힌 동거

 

 

지리산 깊은 숲 속에서 참으로 기이한 동거(?)를 만났습니다.

 

 

 

너럭바위에 떡하니 걸터앉은 이 나무의 천연덕스러움이란....

 

 

 대체 이 나무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기차 타고 떠나는 남도의 봄, 이 한 권의 책과 함께!(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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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진양호 소소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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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진양호 소소 풍경

비 오는 날 진양호 소소 풍경

비 오는 날 진양호 소소 풍경

 

여행은 말이다.

때로는 섬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다.

 

 

 

떠나는 것이 아니라

 

머무르는 것.

 

 

발걸음을 옮긴들 어찌 길을 알까.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머무는 것,

그것이 여행이다.

 

 

 

우리는 이미 여행을 떠나와서

잠시 머무르고 있을 뿐.

 

 

여행은 말이다.

때로는 물처럼 고요히 있는 것이다.

 

                                                                                                        - 비 내리는 날, 진양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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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나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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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나를 키웠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

 

자기 내면의 풍경을 조망하려는 노력,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참다운 여행이 될 수 있다.

 

 

오늘, 하루키의 책을 읽는다. 놀랍게도(?) 그의 글은 처음이다. 고약한 나의 독서습관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신문광고, 로열티 추문 등에 얽힌 책은 일단 읽지 않는다는 것. 다만, 시간이 지나 뭇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갈 때 비로소 온갖 과장과 포장을 걷어내고 나의 눈으로 작품의 온전한 모습을 읽기 시작한다. 이 책을 고른 건 서점에서 우연히 눈에 띄었다는 것. 여행기라는 것, 그의 작품 중 그나마 덜(?) 알려졌다는 것 등의 잡다한 이유를 들 수 있다.

 

 

대다수의 유명작가들이 그러하듯, 하루키도 여행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여행기를 쓰면서 글쓰기 능력을 키웠다. 그를 세계적인 작가로 알린 <상실의 시대, 원제: 노르웨이의 숲>은 일 년여에 걸쳐 이탈리아, 그리스 등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밤에 숙소에서 조금씩 써나가며 완성했다. 전반부는 그리스에서, 중반부는 시실리에서, 그리고 후반부는 로마에서 썼다. 그에게 있어 여행기는 ‘처음엔 그저 좋아서 썼지만, 결과적으로 매우 귀중한 글쓰기 수업이 되었던’ 것이다.

 

이 책에는 일곱 편의 여행기가 수록되어 있다. 작가와 배우들의 성지 미국의 이스터햄프턴, 일본의 무인도 까마귀섬, 멕시코에서의 열흘 동안의 홀로 배낭여행, 사누키 우동 맛 기행, 몽골 노몬한의 녹슨 쇳덩어리 묘지, 아메리카 대륙 자동차 횡단 여행, 고베까지의 도보 여행 등이다.

 

그는 그 ‘자신이 그 자리에서 녹음기가 되고 카메라가 되어 눈앞의 모든 풍경에 자신을 몰입시킨다.’ 그에게 있어 여행기는 또한 ‘어디어디에 갔고, 이런 것이 있었다’는 단순한 열거가 아니라 ‘어떻게 일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면서도 동시에 일상에 인접해 있는가를 복합적으로 밝혀나가는’ 것이었다.

 

변경이 소멸한 시대, 그러나 자신 속에는 아직까지도 변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믿는 것, 그런 생각을 추구하고 확인하는 것이 바로 여행이라고 하루키는 말한다. 그것이 곧 이 책의 부제처럼 ‘여행하면서 쓰고, 쓰면서 여행하는 벅찬 즐거움’이다.

 

* 이 책은 <하루키의 여행법>의 신판이다.

 

떠나자, 남도여행! 이 한 권의 책과 함께(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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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혼령 만난 푸른 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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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치산 혼령 만난 '푸른 눈' 스님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 25> 산중의 비경, 상선암

 

 

 상선암

ⓒ 김종길

 


"불이야!"

일체중생이 잠든 한밤중의 지리산 천은사. 느닷없는 외침과 함께 종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놀란 천은사의 대중들은 불이 난 곳으로 달려갔다. 절 아랫마을도 소란스러워졌다. 마을 위 절에서 대낮처럼 환한 불길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도 절로 향했다. 불길은 보광전에서 뿜어 나오고 있었다. 근데 활활 타오른 건 불길이 아니라 강한 빛줄기였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동요하며 다가서자 스님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불길은 스님의 몸에서 뿜어 나온 빛이요."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사람의 몸에서 어떻게 이처럼 밝은 빛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빛을 뿜어낸 스님은 과연 누구일까. 절집은 순식간에 저잣거리처럼 왁자지껄했다. 이윽고 법당에서 초라한 행색의 사내가 나왔다. 순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그는 얼마 전에 절에 들어와서 아침저녁으로 나무만 하던 땔나무꾼이었다. 설마하니 그의 몸에서 빛이 났을까. 사람들은 갸우뚱했지만 절의 스님들이 그를 향해 일제히 합장을 하는 걸 보고서야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풀렸다. 이 불가사의한 광경 앞에서 사람들은 한참동안 넋을 잃었고, 얼마 후 더없이 편안하고 환희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수월 스님이었다. 수월 스님이 방광(수행자의 몸이나 성물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한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스승 경허 선사와 함께 있던 천장암에서 첫 방광을 했을 때도 사람들은 그를 한낱 땔나무꾼으로만 여겼다. 천장암에서의 방광 이후 깨달음을 얻은 수월 스님은 금강산에서 보림(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법)을 한 후 지리산으로 행각을 했고 땔나무꾼 모습을 하고 천은사로 들어갔다.

천은사에 와서 수월은 자신을 감춘 채 스님 행세를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산에 들어가 땔나무를 해 나를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 방광으로 그의 본디 모습이 드러나게 되자 천은사 대중들은 수월 스님을 상선암 조실로 모셨다.

수월 스님은 하안거가 끝나자 종석대 아래 우번대로 가서 수행했고, 그곳에서 또다시 방광을 하게 된다. 수행이 높은 고승들이 방광을 했다는 이야기는 더러 전해지지만 수월 스님처럼 한 사람이 세 번을 방광한 것은 거의 드물 정도로 경이로운 일이다. 이때가 수월 스님의 나이 마흔둘이 되던 1896년이었다.

산중의 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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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절터의 전나무
ⓒ 김종길

 


지리산 서쪽 끝 봉우리인 종석대 아래에는 우번대라는 지리 10대가 있고, 그 아래에 오랜 옛날부터 산중의 비경으로 불리는 상선암이 있다. 지금이야 지리산을 관통하는 도로에서 산길을 따라 얼마 정도 오르면 되지만, 예전에는 천은사에서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야 했다.

천은사에서 성삼재 가는 구불구불 고갯길. 계곡으로 크게 휘어진 길모퉁이에 상선암 가는 길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암자로 가는 유일한 이정표라고는 글자마저 지워진, 손바닥만 한 하얀 입간판 하나와 잡풀에 가려 겨우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시멘트 계단이 전부다.

"지리산에 이런 곳도 있군요. 아름드리나무와 오솔길의 매력이 등산로와는 또 다른 매력인 것 같네요. 정말 멋집니다."

숲속에 들어섰을 때 동행했던 월간 <마운틴> 강성구 기자는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계곡을 가로질러 산길을 오르자 이내 절터로 보이는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나온 햇살은 절터 여기저기를 골고루 그리고 부드럽게 비췄다.

땅은 평평하니 제법 널찍해 안온했다. 여기저기 나뒹구는 기와조각과 일부 무너졌지만 아직도 건재를 과시하는 돌 축대는 옛 절터의 영화를 드러내는 듯 뚜렷했고, 그 옛날 절을 세웠을 때 심었을 전나무가 절터 사방으로 장하게 자라고 있어 신비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절터를 가만히 몇 번이고 거닐다 상선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기사 관련 사진
 암자의 한 평 텃밭
ⓒ 김종길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저 멀리 허공에 매달린 듯, 높은 축대 위의 암자 마당 끝에 선 스님 한 분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쑥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어둑한 숲과는 달리 암자에는 햇살이 넘쳤다. 약간 간격을 두고 잇달아 있는 두 채의 암자 건물은 ㄱ자 모양이다. 특히 왼쪽의 상선암 현판이 걸린 법당 건물은 이름 그대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절로 풍겼다. 마치 사천왕상처럼 족히 수백 년은 됐을 커다란 나무는 왼쪽에서, 거대한 바위는 오른쪽에서 법당을 지키고 있었다.

"스님 뵈러 왔지요."

활짝 웃으며 합장을 하자….

"허, 참…"하며 스님이 마주 합장을 한다. 요사채 축담에 배낭을 내려놓고 몇 마디 주고받자 잠시 경계하던 스님이 암자 안내를 자청한다. 상선암은 구들을 새로 놓고 수리 중이었다. 암자치고는 제법 큰 건물이었다. 기둥과 서까래, 주춧돌 등의 건물 부재들을 보니 건물을 지을 때 상당히 공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었다.

단출하기 짝이 없는 부엌의 아궁이에는 장작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부엌으로 난 방문을 스님이 열었다. 갑자기 앞이 환해지더니 초록빛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 멀리 산의 능선들이 물결치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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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佛佛佛佛...
ⓒ 김종길

 


"佛佛佛佛"

문짝 창호에 스님이 썼다는 글씨다. '불불불불' 방문 아래위로 총 여덟 글자다.

"한때는 대중들이 수십 명이 됐던 모양입니다."

진명 스님은 얼마 전 이곳 상선암에 왔다고 했다. 상선암에는 진명 스님과 한 분의 스님이 더 머무르고 있다. 여름 세 번을 나고 나면 또 어디론가 가지 않겠느냐는 스님의 말은 담담했다. 허기야 붓다 당시에는 승려가 한 곳에 3일을 머물지 않았다고 했다.

토굴에서의 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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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선암
ⓒ 김종길

 


"아,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저쪽 토굴로 갑시다. 모처럼 제가 차 한잔 대접하지요. 사람들을 토굴로 모신 적은 처음입니다."

스님이 보여준 호의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절에서 외따로 떨어진 산중암자, 그 암자에서도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 수행자만의 공간인 토굴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순간 머릿속이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토굴에는 물이 따로 나오지 않아 차를 마시려면 암자에서 물을 떠가야 했다. 스님이 앞서고 강 기자가 물을 담은 양동이를 들고 나는 카메라를 들고 줄레줄레 뒤따랐다.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 토굴로 간다. 선들선들 바람은 산들거렸고 햇빛은 초록의 잎에 강하게 부딪혔다.

"이제부터 사진 촬영은 안 됩니다."

앞서가던 스님이 주의를 줬으나 제일 뒤에 따르던 내가 그 말을 놓치는 바람에 강 기자가 중간에서 말을 한 번 더 전달해야 했다. 카메라 렌즈에 캡을 씌웠다. 토굴은 말 그대로 흙으로 쌓은 소박한 집이었다. 아니, 집이라기보다는 조금 고급스럽게(?) 지은 움막에 불과했다.

토굴 바깥을 빙 둘러 뼈대를 세운 나무틀에는 겨울 동안 삭풍을 막았을 비닐 조각이 여기저기서 바람에 나부꼈다. 벽이 유독 두꺼워서인지 토굴 안은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다 낡은 책상 하나와 그 위에 놓인 불경 한 권, 목탁, 초, 가사를 벗어놓은 횃대가 살림의 전부였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곳, 허물어져도 아무런 원망이 없을 무소유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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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선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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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굴의 좁은 마루에 걸터앉았다. 스님은 차를 달이고, 나는 햇빛에 번득거리는 나뭇잎을 응시했다.

"이런 토굴에서 공부를 하면 어떤 느낌일까요?"

내 말에 스님은 기쁜 얼굴빛으로 말씀을 이어갔다.

"공부에 대한 질문, 참으로 오랜만인 듯합니다. (…) 요즘은 사유가 없는 시대인 것 같아요…."

진명 스님은 서구에서는 불교와 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는데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불교가 쇠퇴하고 있는 현실을 염려했다.

벽안의 구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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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굴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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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현각 스님이라는 분 아시죠. 그 예일대와 하버드 대학원을 나온 푸른 눈의 스님 말이에요. 이곳 토굴에서 수도를 했다고 하더군요."

현각 스님이 상선암에서 수행을 한 것은 1998년 겨울이었다. '벽안의 구도자'로 불리던 현각 스님은 예일대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했고 하버드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했던 수재였으나 달라이 라마, 틱낫한과 더불어 '4대 생불'로 불리던 숭산(1927~2004) 선사의 설법을 듣고 출가해 지금은 한국 불교를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푸른 눈의 현각 스님은 1998년 11월 말부터 100일 동안 상선암 옆 이곳 토굴에서 수행했다. 미국의 프라비던스 젠센터 주지를 하느라고 수행을 게을리 해서 다시 한국생활을 시작하면서 동안거에 맞춰 혼자 토굴생활을 한 것이다. 토굴에는 전기도 수도도 없고 나무를 때서 난방을 해야 했다. 100일 동안 솔잎가루와 약간의 과일만 먹으면서 묵언수행을 했다. 하루 세 시간 이상은 자지 않고 매일 1300 배를 하며 '신묘장구대다라니' 염불수행을 했다고 한다. 이때 현각 스님은 신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토굴에서 기도한 지 이틀가량 지났을 때, 마음은 점점 맑아졌다. 그런데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할 때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환청이라 여겼는데, 차츰 이상한 소리에 놀라 방문을 열면 지나가는 바람밖에 없더란다. 사나흘이 지나자 이 소리는 점차 울음소리, 비명소리로 분명해졌다. 그는 무서웠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가 쭈뼛쭈뼛 곤두섰다. 그렇게 3주일이 지나고 기도한 지 22일째 되던 날, 한순간에 그 소리들이 사라졌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이내 마음도 평화로워졌다.

수행이 끝나고 당시 상선암 주지였던 지인 스님으로부터 지리산의 빨치산 이야기를 듣게 됐을 때 지리산과 빨치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현각 스님은 피로 얼룩진 지리산의 역사를 듣고 너무나 놀라게 된다. 마침 옆에 있던 화엄사 스님 한 분이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때 누군가 열심히 염불을 해주면 그들의 영혼이 자유로워진다는 말을 하게 된다. 현각 스님은 자신의 염불기도가 빨치산 영혼들의 한을 풀어주는 신비로운 일을 체험한 것이다.

상선암에서의 그의 철저한 수행생활은 천은사 스님들에게도 자극이 됐다고 한다. 아무 연고도 없는 미국인 스님이 한국에 와서, 그것도 지리산 깊숙한 천은사에서도 한참 떨어진 암자의 토굴에서 용맹정진한 사실에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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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굴에서
ⓒ 김종길

 


스님의 법문이 하염없다. 햇빛이 토굴 앞 뜰을 비춘다. 연둣빛 잎들이 햇살에 번들거린다. 바람이 잠시 멈춘다. 시간의 오고 감도 없다. 찻잔은 비우니 채워졌고, 채우니 비워졌다.

"지리 10대 중 무착대, 서산대는 이미 사라지고 터만 남았지요. 우리나라에도 3000m가 넘는 산들이 있어야 수행하기에 좋을 것 같아요. 예전이야 지리산만 해도 충분히 깊은 수도처였지만 차가 오지 구석구석까지 들어오는 요즈음은 마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상선암과 수월 스님
상선암은 지리산의 서쪽 종석대 아래 해발 780미터 고지에 있다. 천은사의 산내암자로 나옹 스님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의 건물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 세운 것이다. 상선암은 그 옛날 우번조사뿐만 아니라 경허, 수월, 진응, 용성, 용하, 호음 등 수많은 선승들이 수행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진명 스님과 다른 한 분의 스님이 있다. 수월 스님이 조실로 있을 때 입승(절에서 기강을 맡은 승려)으로 있었던 용성 스님 당시(1896년)에만 해도 대중이 서른 명쯤 되었다고 하니 지금과는 달리 그 규모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뛰어난 수행력과 방광불사로 세상을 뒤흔든 수월 스님은 마흔둘이 되던 1896년에 지리산 천은사와 상선암, 그리고 우번대에서 봄, 여름, 가을 한철을 보냈다. 수월 스님은 염불을 한번 듣고 암기 한 뒤 염송(念頌)에 몰두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문자를 몰라 경전을 읽거나 쓰지는 못했지만 어떤 물음에도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수월 스님은 천수삼매를 얻은 후 평생 잠을 자지 않고 정진한 도인으로 알려졌다.

수월 스님은 젊어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1884년에 충남 서산군 천장암으로 출가하여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한 경허(1846~1912) 스님의 제자가 됐다. 경허 스님의 제자로는 '삼월(三月)'이라 불리는 수월(1855~1928), 혜월(1862~1937), 만공(1871~1946) 스님이 있었다. 그의 세 제자 또한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들이다. 경허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수월 스님은 금강산에서도, 지리산에서도, 두만강을 건너 생을 마친 간도에서도, 일하는 수행자로 일생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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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르게 시도한 여행 기획, 과연 반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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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르게 시도한 여행 기획, 과연 반응은?

- 조선 선비들의 답사일번지, 원학동 인문학 기행에 부쳐

 

 월성계곡 사선대는 원학동에서도 가장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이 정도면 시쳇말로 '자뻑'이다. 내가 이 글을 꼭 써야한다면 언론기사처럼 무미건조한 글은 쓰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근데, 중요한 건 내가 기획하고 진행한 사업을 내가 써야 한다는 것. 어쩌면 자칫 칭찬 일변도로 흐를 수 있어 적이 부담된다는 것이다. 다만, 조금은 색다른 기행이었다고 나름의 궁색한 변명을 하고 싶을 뿐….

지난 주말 6일(토)에 경남 거창을 다녀왔다. 혼자 떠난 여행이 아닌 45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닌 인문학 기행이었다. 그것도 내가 기획을 한 행사였으니 이제부터 '자뻑'은 시작된다. 그동안 기행이나 답사의 강사나 해설자로 나선 것은 꽤 많았지만 직접 기획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기행을 처음 머릿속에 그린 건 3월경이었다. 최석기(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의 <조선 선비들의 답사일번지> 책 출간을 앞두고 저자와 함께하는 거창 원학동 일대의 인문학 기행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4월 9일쯤 이홍기 거창 군수를 만나면서 가시화되었고 마침내 4월 말에 기획을 해서 5월 중순에 참가자 모집을 시작했다. 사실 요즈음 기관이나 단체에서 기행이나 답사를 워낙 많이 열고 있어 참가자 모집이 가장 어려우리라 예상했었다. 우선 페이스북으로 이 난관을 돌파하려 했다. 이벤트 페이지를 만들고 페친들을 소집해서 신청을 받았다.

놀랍게도 하루만에 10여 명이 참가 신청을 했다. 다음에는 지역 언론이었다. 사실 전국 단위로 참가자 모집을 했지만 현실은 경남지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일주일 만에 참가자 45명이 모집 완료되는 기적(?)이 발생했다. 아니, 대기자까지 생길 정도였다. 최종 집계해 보니 신청자가 54명이었다. 창원, 김해, 진주, 거창, 산청 등 경남 각지에서 모두 45명이 참석했다.


 영승 마을 사락정에서의 전정규 후손과 최석기 교수


다음으론 기행의 내용이 고민이었다. 먼저 기행 스타일을 짜 봤다.

내 여행 스타일을 접목하되, 단체가 함께할 수 있는 것이 뭘까, 에서 고민은 시작됐다. 최근에 봇물처럼 터지고 있는 인문학 기행. 이런 상황에서 어떤 여행을 기획할 것인가, 가 관건이었다. 일단, 무엇보다 차별화가 필요했다. 여행전문가가 기획을 한다는 안팎의 기대도 부담이 되긴 했다. 각고 끝에 내린 결론은 참가자는 지역에서 모집하고 현지 주민들이 기행에 적극 참여하는 인문학 기행으로 콘셉트를 잡았다

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아, 그러기 전에 먼저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탐방지인 '원학동'에 대해 잠시 소개해 보겠다. 원학동은 지금의 경남 거창군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 일대로, 이황, 조식, 임훈, 김창흡, 이건창 등 조선의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찾았던 남도 제일의 명승이었다. 기행 일정은 원학동의 관문인 마리면 영승 마을에서 출발하여 진동암, 동계 정온 고택, 수승대, 구연서원, 갈계 마을, 갈계 숲, 강선대, 사선대 등 원학동 일대의 주요 명승을 탐방하는 것으로 잡았다.

문제는 이 정도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코스라는 것이다. 이 코스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내용을 차별화할 것인가. 고민은 시작됐다. 더운 날씨도 고려해야 했다. 적어도 참가자들이 땡볕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고생하는 것은 막아야 했다. 시간대별 햇빛의 각도를 계산하고 동선을 잡았다. 그리고 각 코스마다 현지 주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이 뭘까, 고민은 깊어졌다. 코스의 순서는 말 그대로 '점입가경' 방식이다.

처음엔 '이런 곳이구나!'에서 그 다음엔 '음, 이런 곳도 있구나!'로, 시간이 지날수록 '아, 이런 곳이 있다니…'로 감정을 점점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동선을 잡는 것. 영승 마을과 진동암이 서막이라면, 진동암, 동계 고택에서 서서히 감정이 고조되어, 수승대와 구연서원에서 절정으로 치닫다가 갈계 마을, 갈계 숲, 강선대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사선대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식이었다. 

일단 코스를 정한 뒤에는 참가자들에게 대략적인 일정만 공개했고, 상세한 것은 행사 당일까지 철저하게 보안(?)에 부쳤다. 긴장과 설렘이 없는 여행은 처음부터 잘못 꿴 단추처럼 너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동암에서 원학동 일대를 설명하고 있는 최석기 교수와 기행 참가자들

 

그리고 인문학 기행은 시작됐다. 어떤 색다른 기행이 되었는지 하나하나 이야기를 풀어 보겠다.

첫 탐방은 마리면 영승 마을 사락정(四樂亭)이었다. '사락'은 퇴계 이황이 이 마을에 우거하던 장인 권질의 부탁을 받고 마을 사람 전식이 시냇가에 지은 정자에 붙여준 이름이다. 사락정은 평소에는 굳게 문이 잠겨 있어 안을 볼 수 없었는데, 인문학 기행 사전답사 때 마을을 찾아 수소문해서 정자를 관리하고 있는 후손 전정규씨를 만나서 행사 당일 문을 열 수 있었다. 전정규씨의 인사와 마을 이야기를 덤으로 들을 수 있었고, 뜨거운 햇빛을 피해 시원한 정자 마루에서 최 교수의 해설을 들을 수 있었으니 첫 단추를 잘 꿴 셈이다.

다음으론 '원학동(猿鶴洞)' 바위 각자가 있는 진동암에서 원학동 일대를 가늠해 보고 본격적으로 탐방에 나섰다. 동계 정온 고택을 들렀을 때에는 오전 11시경이었다. 동계 정온은 이조참판, 대사간, 대제학을 지낸 조선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영창대군이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렸고 병자호란 때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것을 수치로 여겨 자결을 시도했던 인물로 낙향한 뒤 인근 모리재에서 은거하며 지냈다. 동계 고택에서는 정완수 종손이 참가자들을 환영했다. 사전에 종손과 협의하여 사랑채를 개방해서, 참가자들은 500년 된 고택의 사랑채에 둘러앉아 동계 선생의 충절을 듣고 사랑채 안팎에 걸린 현판과 글씨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 깊은 체험을 했다.


 동계 고택의 정려문

 동계 고택 사랑채에서 최석기 교수의 해설을 듣고 있는 참가자들

 

이윽고 점심시간. 원학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승대 인근 식당에서 거창에서 난 농산물로 차려진 한식을 먹었다. 나중 사선대에서는 고로쇠 막걸리까지 곁들였으니 지역의 농산물을 맛본 참가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수승대에서는 위천 시냇가를 가운데에 두고 요수정, 거북바위, 구연서원 등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동선을 잡았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출렁다리를 건너 울울한 솔숲을 거닐다 포인트마다 쉬며 최 교수의 해설을 들었다. 저 멀리 거북이를 쏙 빼닮은 바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너럭바위가 1차 포인트, 옛사람의 풍류를 느낄 수 있는 요수정이 2차 포인트, 숱한 명사들의 글귀가 새겨진 거북바위와 하얀 반석이 으뜸인 계곡이 3차 포인트, 짙푸른 계곡물과 한 폭의 그림 같은 요수정을 내려다보는 거북바위 위가 4차 포인트, 깊이 숨은 구연서원과 관수루가 마지막 포인트였다.


 수승대 요수정 전경

 

수승대는 경관이 워낙 아름다운데다 당대 최고의 학자 퇴계 이황과 강호의 고수 갈천 임훈의 이야기가 서려 있어 더욱 명소가 되었다.

1543년 1월, 장인 권질의 회갑연을 맞아 원학동 영승 마을을 찾은 이황은 수승대로 가서 임훈과 신권을 만날 계획이었으나 급한 일로 조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황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기다리고 있던 임훈과 신권에게 '수송대(愁送臺)'라는 원래 이름을 '수승대(搜勝臺)'로 바꿔 시 한 수를 보낸다. 신권은 이황이 보내온 수승대라는 새로운 이름에 매우 기뻐하며 그를 만나 회포를 풀지 못한 서운함을 시로 지었다. 그러나 임훈은 이황이 비록 수송대라는 옛 이름의 '송(送)'자가 전아하지 못하다고 바꾸었으나 수백 년 동안 전래된 고사가 있는 지명을 임의로 바꾼 것을 선뜻 수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황이 찾아와 함께 노닐다가 늦은 봄에 떠난다면, 봄을 보내기도 시름일 뿐 아니라 그대를 보내기도 시름이라'며 '송(送)'의 뜻을 풀이해 알려주고 이황이 수승대로 이름을 바꾼 것이 잘못되었음을 넌지시 상기시켰다. 이황이 직접 와서 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이름을 바꾼 것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극도로 자제하면서 점잖게 '수송(愁送)'이 가지고 있는 깊은 뜻을 깨우쳐 주고,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자신의 속내를 은근히 드러낸 것이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이황과 강호의 고수 임훈의 미묘한 갈등이 드러난 것이다. 이황이 수승대로 이름을 바꾸고 시를 한 수 지은 이후,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수승대를 찾은 뒷사람들이 많은 시를 지어 남겼다. 이로 인해 수승대 일대는 풍부한 스토리와 빼어난 시문들로 그 아름다움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수승대 거북바위에 새겨진 퇴계 이황과 갈천 임훈의 시

 


 구연서원 관수루에서의 거창국악연구회의 전통 공연

 

이날 기행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수승대에서의 마지막은 구연서원 관수루였다. 관수루에서는 거창국악연구회의 유금순 대표가 단소곡, 청성곡, 해금산조, 대금산조 등을 연주해 참가자들의 갈채를 받았다. 한편, 거창군에서도 이홍기 거창군수를 대신하여 이창조 산업창조과장 등 직원들이 참석하여 거창 방문을 환영하고 자리를 함께했다. 요수 신권의 후손인 신용훈씨도 참석해서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다음 코스는 갈천 임훈의 생가가 있는 갈계 마을. 갈계 마을에선 갈천 임훈의 후손인 임무창 문중회장과 후손들이 참석하여 선조들과 유적, 지역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어 인문학 기행을 한층 풍부하게 했다. 또한 마지막 탐방지인 사선대에서는 참가자 중 1명이 시조창을 하여 옛 선비들의 풍류를 되살려 참가자들의 환호를 받기도 했다. 사선대의 본래 이름은 송대(松臺)였다. 참가자들은 책에 실린 18세기 김윤겸의 <영남기행화첩>과 김희성의 <안음송대> 그림을 통해 사선대의 옛 모습을 오늘의 모습과 비교해보곤 그 변함없는 수려한 풍광에 감탄했다.


▲ 갈천 임훈 고택 최석기 교수(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갈천 임훈의 임무창 문중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후손들

 

이로써 모든 기행은 끝났다.

"물을 보고, 산을 보고, 옛사람을 보고, 세상을 본다"는 남명 조식의 글을 기치로 진행된 이번 인문학 기행은 명소마다 이어진 최석기 교수의 깊이 있는 해설과 거창의 현지 주민들이 함께함으로써 단지 풍경만을 보고 오거나 외부인의 시선에서 그 지역을 보고 돌아가는 기존의 여행과는 달리, 거창의 문화와 역사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기행이었다고 참가자들은 평가했다.

 


 18세기 김희성이 그린 사선대(안음송대) 옛 그림, 오늘날과 별반 차이가 없는 풍경이다.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조선의 선비들이 현실세계에서 찾은 무릉도원, 원학동
조선 시대 선비들이 무릉도원처럼 이상향으로 여긴 영호남 제일의 명승은 경상도 '안의삼동安義三洞'이었다. 안의삼동은 안의현에 속한 세 동천洞天인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을 가리킨다. 그중에서도 원학동은 가장 빼어난 명승으로 예부터 당대의 내로라하는 수많은 문인과 선비 들이 찾던 곳이었다. 원학동은 현재 경남 거창군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 일대로, 진동암, 동계 정온 고택, 구연동, 수승대(국가지정 명승 제53호), 임훈 고택, 갈천동, 용암정(국가지정 명승 제88호), 강선대, 모리동, 금원산, 분설담, 사선대 등의 명소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행은 필자가 기획한 경상대학교출판부의 ‘지앤유 북로드-원학동 인문학 기행’에 대한 단상을 적은 글이다. 지역민이 참가하고 현지 주민들과 함께한 대학출판부의 색다른 기행을 기획했으나 어느 정도 충족시켰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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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지리산 암자로 향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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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지리산 암자로 향한 까닭은? 

 

우편물 하나가 왔다. 제법 묵직하다. <월간 마운틴>이라는 산악전문 잡지이다. 400쪽이 넘는 분량의 잡지다. 이번 <월간 마운틴> 6월호에 나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어 잡지사에서 보낸 것이다. 6월호 기획특집은 지리산이다. '지리산,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는 제목으로 지리산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이 실렸다.

 

 

 

 

지리산 기획특집 기사는 임소혁 산악사진가의 아름다운 지리산 사진을 시작으로 지리산 시인 이원규 시인이 '지리산 사람들'에 대한 글로 개관을 썼다. 다음으로 동행취재인데, 공지영의 지리산행복학교에 나왔던 '지리산 최도사'와의 산행 이야기가 실렸다.

 

 

 

이어서 나에 대한 기사가 8쪽에 걸쳐 실렸다. 상당한 분량의 지면을 할애했다. 오마이뉴스에 지리산 암자를 연재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던 지난 4월 말쯤, 월간 마운틴 강석구 기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암자 취재에 동행하고 싶다고 했다.

 

사실 지리산 암자를 연재하면서 많은 이들이 동행하기를 원했지만 모두 거절했었다. 암자로 가는 길이 번다해지는 것을 꺼려서가 첫 번째 이유였고, 다음으론 오지 암자의 경우 산을 좀 탈 줄 알고 체력이 기본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강 기자의 요청을 받고 잠시 망설였으나 그가 산악전문 잡지기자라는 데 생각이 미쳤을 때 두말없이 오케이 했다. 사실 작년 내 책 <남도여행법>이 출간됐을 때 강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서울까지 가기에는 무리여서 다음을 기약했었는데, 이번 결정에 그 미안함과 아쉬움도 한몫한 셈이다.

 

지난 5월 4일, 남원 인월 터미널에서 강 기자를 만나 성삼재를 기점으로 오지 암자 우번대와 상선암을 순례했다. 그때의 만남이 이번 <월간 마운틴> 6월호에 나온 것이다.

 

 

지리산을 자주 온 강 기자로서도 암자는 조금 생소했던 모양이다. 낯선 오지 암자의 풍경에 그는 이따금씩 감탄하곤 했다. 그와는 초면이었음에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오랜 벗처럼 둘은 어느덧 하나가 되어 하루를 보냈다. 기사에는 동행 취재한 글뿐만 아니라 우번대의 전설, 인터뷰, 지리산 암자 순례, 지리산과 불교 등의 다양한 코너가 있어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 암자 기행>은 6월이면 마무리된다. 강 기자는 암자 순례의 거의 막바지에 함께해서 유종의 미를 거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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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에 놓인 고무신 한 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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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에 놓인 고무신 한 켤레

-지리산 천은사 삼일암

 

지리산 천은사에는 모두 일곱 암자들이 있다. 종석대 아래의 유서 깊은 우번대와 상선암을 비롯하여 그 아래로 수도암, 도계암, 삼일암이 절의 오른쪽에 깃들어 있고, 사찰을 들어서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감로암과 견성암이 있다. 오른쪽의 암자들이 깊은 산중이라 수행처로 제격이라면, 왼쪽의 두 암자는 산중의 여염집처럼 포근하고 편안하여 머물기에 좋다.

 

 

 

삼일암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그다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암자로 가는 길에서 ‘이야!’ 하며 짧은 탄성을 두어 번 지르게 된다. 도로 옆인데도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장관인 솔숲 때문에 한 번, 다음으로는 푸른 대숲 때문이다. 솔숲이 끝나자 이윽고 울울한 산죽 숲. 길은 터널처럼 뚫려 자연스레 암자로 이어진다. 처음의 솔숲이 외부로 향하는 풍경이라면 대숲은 내면의 소리를 들려준다.

 

 

 

암자는 양명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스님을 불렀으나 들려오는 건 졸졸졸 물소리뿐. 법당을 돌아 스님이 거처하는 곳을 찾으니 뒷마당에서 샘물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다람쥐 한 마리가 인기척소리에 숲에서 뛰쳐나왔다.

 

 

 

텅 빈 암자에서 나는 또 묻는다. 지금 왜 여기에 왔는지를. 내가 암자를 찾는 것은 스님들의 말씀이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밖에서 오는 지식이 아니라 내 안에서 움트는 지혜가 필요해서다. 그저 텅 빈 암자에서 처음 한 생각을 지켜보아 마음을 살필 뿐이다.

 

 

 

빈 암자에 놓인 고무신 한 켤레를 보며 문득 법정 스님을 떠올렸다. 어느 날인가, 법정 스님은 청도 운문사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운문사를 다녀온 뒤 스님은 그곳의 섬돌 위에 놓여 있던 수백 켤레의 흰 고무신들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백 마디의 말보다 문 앞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 한 켤레가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

 

 

 

유태교 신비학파의 한 수도자가 ‘늙은 랍비를 찾아간 것은 그에게서 율법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가 신발 끈 매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는 고백처럼…. 죽은 경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실천된 삶을 보고자 함이었으리라.

 

 

 

산길로 도계암을 갈까 하다 이내 발길을 돌렸다. 숲이 하도 울창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어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하는 미덥지 못한 자신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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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형제가 모두 출가한 수도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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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형제가 모두 출가한 수도암스님

 

수도암은 호방한 무인의 기질을 가진 암자다. 지리산 암자 중에서 이처럼 호방한 기운을 지닌 암자가 또 있을까.

 

 

어찌 보면 아주 투박해 보이는 건물과 지나치게 크고 과장된 담장이 생경스럽기는 하지만 스케일이 남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암자 앞으로 펼쳐진 광활한 풍경을 염두에 둔다면 그 투박하고 과장됨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내면의 동의가 절로 생겼다.

 

 

 

푸른 눈의 외국인이 법당에서 나왔다. 그 옆으로 스님 한 분이 나란히 계단을 내려온다. 큰스님이 계시던 곳이라고 했다. 큰스님은 화엄사 주지를 지냈던 평전 종수 스님이다. 종수 스님의 글귀가 법당 왼쪽과 뒤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다.

 

 

저 멀리 허공을 스님 한 분이 걸어 나온다. 스님께 암자를 멀리 휘감고 있는 산들에 대해 물었다. 스님은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조계산, 동리산, 모후산, 무등산이라고 했다.

 

 

스님의 법명은 철우. 철우 스님은 4형제가 모두 출가했다고 했다. 장남인 자신이 제일 먼저 출가하고 5년이 지나 둘째가 출가를 해서 4형제 모두 불교에 귀의하여 수행자가 됐다. 셋째는 동화사 종정 스님의 상좌로, 철우 스님과 나머지 두 형제는 이곳 수도암에서 정진 중이다.

 

 

수도암에는 모두 9명의 스님이 있다.

 

“얼마 안 됐어요. 법랍이 겨우 30년이요. 50년은 돼야 절밥 먹었다 하지. 30년으론 어림도 없어. 오늘은 바빠서 안 되겠고 다음에 차나 한 잔 합시다.”

 

 

 

깨달음을 얻은 후 붓다도 아들과 이모 등 친족이 출가했고, 부설거사도 부인인 묘화와 아들 등운, 딸 월명이 출가했고, 26살 때 손가락 네 개를 불에 태워 소신공양할 정도로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걸었던 일타 큰스님의 일가친척 41명도 출가했지만, 근래에 4형제가 모두 출가한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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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사의 비밀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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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은사의 숨은 길

 

지리산 천은사는 화엄사의 유명세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고즈넉한 사찰이었다. 번다한 화엄사에 비해 깊은 고요가 있는 천은사는 마음 한 자락 내려놓는 산사였다. ‘고요히 앉아 궁구하고 있는 내 마음이 부처가 아니고 무엇인가’라는 깨달음이 절로 생기는 곳이었다.

 

 

한때는 천 명이 넘는 스님들이 있었다는 천은사는 인도 승려인 덕운 선사가 828년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물이 있어 감로사라고 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고 중건할 때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잡아 죽였더니 더 이상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 하여 천은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절 이름을 바꾼 뒤에는 원인 모를 화재가 잦았다. 사람들은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는 뱀을 죽여서 그런 것이라며 두려워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조선 4대 명필 중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듯 써서 걸었더니 이후로는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일주문 글씨를 보고 있노라면 구불구불한 글씨가 정말로 물이 흐르는 듯하다. 아니 , 물 흐르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것 같다.

 

 

부도전을 지나 일주문을 지난다. 일주문에는 원교 이광사가 썼다는 ‘지리산 천은사’ 글씨가 유려하다. 구불구불 흐르는 물줄기 같은 두 줄의 세로글씨는 문외한이 봐도 예사롭지 않다.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오른편 층계를 올라 오솔길로 접어든다. 생태관찰로이다.

 

 

많은 이들이 천은사를 오가지만 이 길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알려지지 않은 게 여행자로선 오히려 다행이다 싶다. 혼자 호젓한 길을 탐하는 것, 지나치지는 않으리라.

 

 

숨겨진 길은 천은사를 왼편에 끼고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깊이 침잠하는 길이다. 원시 숲의 청량함이 온몸으로 파고들고 맑은 새소리와 뺨을 스치는 바람이 부드럽기 그지없다.

 

 

수령 300년이 넘은 소나무 한 그루 너머로 천은사 경내가 보인다.

 

 

선방에 잠시 들렀다. 계곡가에 있는 선방은 천은사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이다. 그림자 없는 수행자 수월 선사의 체취가 느껴진다.

 

 

최근에는 템플 스테이로 일반인들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고요한 정적이 감싸는 적요한 곳, 묵직한 법당 너머로 계곡 물소리 법문이 들리는 선방은 적막하다.

 

 

이처럼 맑고 호젓했던 천은사는 근래에 입장료 문제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곳이 되어 버렸다. 국립공원의 입장료 징수가 없어졌음에도 이곳에는 여전히 공원문화유산지구라는 명목으로 입장료를 받고 있다. 사유지의 무단 사용에 따른 사용료를 부과할 뿐이라는 사찰과 방관하고 있는 지자체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 애먼 시민들만 ‘통행세’를 내고 있다. 대승적인 이해와 지혜로운 해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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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부탁해 제주여행 4대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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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부탁해>에 나온 제주여행 4대 명소

 

어제(28일) <아빠를 부탁해> 제주도 특집에서는 제주 동부의 대표적인 여행 명소 4곳을 소개했다. 제주도에 도착한 4부녀는 제주의 음식을 먹은 후 아빠의 취향에 맞는 여행스타일을 찾아 나섰다.

 

 

조재현은 먹방 여행으로 용두암을 찾았고, 이경규의 딸 이예림이 함께했다. 용두암에서 둘은 즉석에서 파는 해산물에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경규는 건강 여행으로 아부 오름을 찾았고, 조재현의 딸 조혜정이 같이 오름에 올랐다.

 

 

해변 낭만 여행으로 세화종달해안도로를 찾은 조민기는 강석우의 딸 강다은과 스쿠터로 해안도로를 달린 후 월정리의 한 카페를 찾아 해변의 낭만을 즐겼다. 곶자왈 힐링 여행으로 에코랜드를 찾은 강석우는 조민기의 딸 조윤경과 신비의 숲 곶자왈을 기차로 여행하고 호수를 걸었다.

 

 

사실 이곳들은 제주를 여행하는 이들이 꼭 찾아갈 만한 제주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제주 동부에 있는 이 여행지들은 제주 시내의 용두암, 오름 중에서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아부 오름, 제주의 대표적인 드라이브 코스 세화종달해안도로와 몇 년 전부터 뜨고 있는 월정리 해변과 카페들, 제주도 신비의 숲 곶자왈에서 만끽하는 기차 여행과 이국적인 호수 풍경을 가진 에코랜드 등으로 올 여름 이 네 곳만 가 봐도 제주의 풍경을 한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석양이 질 무렵 가장 아름다운 용두암: 조재현과 이예림이 찾은 먹방 여행

제주 시내에 있는 용두암은 지척에 있는 용연과 함께 제주도기념물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 공항에서 가까워 비행기 자투리 시간에 용두암과 용연에 잠시 들를 수 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용두암이지만 실제로 보고 나면 대개 첫마디가 '애걔!'다. 사진으로 봐선 꽤나 웅장하리라 짐작하지만 막상 실물을 대하면 생각보다 작은 규모에 실망하게 된다.

 

 

그러나 실망만 하기에는 이르다. 용두암을 제대로 보려면 낮이 아닌 석양이 질 무렵 와야 한다. 맑은 날보다는 파도가 심한 날에 와야 한다. 보는 위치도 서쪽으로 100m 정도 비껴난 위치가 좋다. 용두암을 몇 번 다녀간 여행자의 소견에 이곳을 밥 먹듯이 드나든 토박이의 고견이기도 하다.

 

 

흔히 '동한두기'라고 불리는 해안에 솟은 이 용두암은 높이가 약 10m 정도이다. 200만 년 전 뜨거운 화산이 분출하면서 차가운 바닷물과 만나 생긴 것으로 용이 승천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용두암은 평소 그 머리만 드러내고 몸은 바다에 숨겨 두었다. 어쩌다 바닷물이 밀려나가 용의 꼬리까지 드러나는 날도 있다는데 자그마치 나머지 부분이 30m가 넘는단다.

 

 

용두암 주위 해안에는 횟집과 카페 들이 많다. 최근에는 중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등 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원형극장 같은 제주 오름의 꽃, 아부오름: 이경규와 조혜정의 건강 여행

아부오름은 거대한 꽃잎에 둘러싸인 한 떨기 꽃과 같은 오름이다. 아부오름은 일찍부터 ‘압오름’이라 불렸다. 송당 마을과 당오름 남쪽에 있어 ‘앞오름’이라 하며 한자를 빌어 표기한 것이 ‘전악(前岳)’이다.

 

 

 

산모양이 움푹 파여 마치 가정에서 어른이 믿음직스럽게 앉아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아부오름(亞父岳)’이라고도 한다. 아부는 제주방언으로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사람을 뜻한다. 아부오름은 완만하고 단순한 형태로 원형 분화구의 대표적인 오름이다.

 

 

오름 정상에는 분화구인 굼부리가 패어 있다. 특이한 것은 굼부리 안의 삼나무 숲이다. 로마시대의 원형극장같이 둥근 원형을 하고 있는 삼나무 숲이 인상적이다. 아부오름은 1999년에 만들어진 영화 <이재수의 난>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아부오름은 제주 오름 중 가장 오르기 쉬운 오름 중의 하나이다. 어린 아이도 오를 수 있어 가족여행지로서도 제격이다.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에 있다. 건영목장을 찾으면 손쉽게 찾을 수 있다.

 

 


 

 

제주 동부해안도로의 백미, 세화종달해안도로: 조민기와 강다은의 낭만 여행

제주도 남쪽 바다가 해안절벽의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면 서쪽 바다는 오름과 평지가 빚어내는 아름다움이 있다.

 

 

 

동부해안도로의 백미인 세화종달해안도로는 구좌읍 행원리의 이국적인 풍력발전소, 쪽빛 바다와 하얀 모래가 인상적인 세화해수욕장, 문주란 자생지로 유명한 '토끼섬'이라고도 불리는 난도, 바다 바로 옆에 있는 호수인 하도리 철새 도래지, 지척에 보이는 우도, 바다 위에 불쑥 솟은 성산일출봉, 잡힐 듯 안 잡힐 듯 펼쳐지는 오름들로 인해 잠시라도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운 길이다.

 

 

최근에 월정리 해변에 카페가 들어서면서 이 해안도로는 제주에서 꼭 찾아야 할 드라이브 명소로 거듭났다.

 

 

 


 

 

제주 가면 꼭 가봐야 할 가족여행지, 에코랜드 테마파크: 강석우와 조윤경의 힐링 여행

제주에는 곶자왈이라는 독특한 숲이 있다. 숲이라는 의미의 '곶'과 암석과 가시덤불이 뒤엉켜 있는 모습을 뜻하는 '자왈'의 제주도말이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만들어진 곶자왈은 난대 및 온대의 다양한 식생이 형성되어 있는 제주의 원시림이다.

 

 

이 곶자왈 중 교래 곶자왈 지대에 에코랜드 테마파크라는 곳이 있다. 에코랜드는 볼드윈 기관차로 30만 평의 한라산 원시림을 여행하며 신비의 숲 곶자왈을 탐방하는 테마파크이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2만여 평의 넓은 호수는 그 자체로 장관이다. 예전에 말을 기르던 2만여 평의 넓은 초지에 지형을 이용하여 호수를 만들었다고 한다. 제주 신비의 숲 곶자왈을 기차를 타고 달릴 수 있다.

 

 

☞ 더원 에코랜드(http://www.ecolandjeju.co.kr)☎ 064-802-8000)는 제주시 조천읍 번영로 1278-169번지에 있다. 이용시간은 여름에는 오전 8시 30분 ~오후 6시이다. 입장료는 어른 12,000원, 청소년 10,000원, 어린이 8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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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깊고 아름다운 하늘 끝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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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깊고 아름다운 하늘 끝 길

-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

 

전라도 강진을 다녀온 지

벌써 석 달이 다 되어가는군요.

그날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산길을 걸었었지요.

그 옛날 다산이 혜장 선사를 만나러 백련사를 오가던 곳이었습니다.

 

 

길은 '하늘 끝 한 모퉁이(天涯一閣)' 천일각에서 시작됩니다.

‘천애(天涯)’는 하늘 끝처럼 먼 곳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러고 보니 당나라 시인 왕발이 친구를 사천의 임지로 떠나보내며 지은 시의 일부가 생각나는군요.

‘해내존지기海內存知己, 천애약비린天涯若比鄰’이라는 두 구절입니다.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친구가 있으니, 하늘 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웃에 있는 듯하네”라는 의미입니다.

천일각은 다산 당시에는 없었던 건물이지요.

 

 

다산은 흑산도에 유배된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입니다.

 

 

다산초당 동암과 천일각 사이에 난 이 산길은

이제 널따란 길이 되어 어른아이 할 것 없이 편히 오갈 수 있는 길이 되었습니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는가 싶으면

어느새 산허리를 감아 오르는 오솔길이 퍽이나 정겹습니다.

 

 

야생 차나무며, 시퍼런 편백나무며, 짧지만 참으로 옹골찬 산길입니다.

특히나 길의 끝에서 느닷없이 나타나는 동백 숲이야말로 이 길의 백미이지요.

 

 

다산이 혜장 선사를 만나러 이 길을 오갔고

혜장 선사도 다산을 만나러 이 길을 다녔겠지요.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준 이 길 덕분에

다산은 유배생활의 적적함과 허허로움을 달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길에서 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정계를 은퇴하고 이곳 백련사 뒤 토굴에 살고 있는 손학규 전 의원입니다.

다산이 오가던 이 길에서 그는 또 무엇을 구상하고 있을까요.

은둔인지,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지

그것은 오로지 그와 길의 몫이겠지요.

 

 

백련사 못 미쳐 바다로 지은 해월루에 잠시 올라 다산과 혜장 선사를 생각해 봅니다.

벗할 이 하나 없는 궁벽한 바닷가 마을에서

뛰어난 학승 혜장을 만난 다산의 기쁨은 어땠을까요.

 

 

두 사람은 수시로 만나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마셨습니다.

혜장 선사가 비 내리는 깊은 밤에 기약도 없이 다산을 찾아오곤 해서

다산은 언제나 밤 깊도록 문을 열어두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이제 봄은 가고 벌써 여름의 가운데이지만

여전히 4월의 그날이 그리운 때입니다.

내년 봄에는 동백꽃 흐드러지게 필 때

한번 다녀오렵니다.

 

 

800여 미터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이지만

벗을 찾아가는 행복한 길,

어느 길보다 깊고 아름다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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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해도 매력적인 당일치기 거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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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해도 매력적인 당일치기 거제여행

- 해안 따라 거제 한 바퀴, 장승포, 해금강, 바람의 언덕, 신선대, 여차홍포해안길

 

남해만큼이나 번질나게 찾던 거제도. 이번에도 가볍게 드라이브 삼아 다녀왔다.

장승포에 들러 해물탕을 먹은 후 오랜만에 해금강으로 출발~!

 

 

예전에 자주 찾았다 한동안 뜸했던 해금강.

커피 마실 곳을 찾다가 결국 마땅한 곳이 없어 발길을 돌렸다.

 

 

신선대.

지금은 해금강보다 더 알려진 곳.

 

 

거대한 해안절벽이 비경을 이룬 곳.

 

 

멀리 대소병대도, 대매물도...

연무에 쌓인 섬들의 천국.

 

 

얼핏 보면 규모가 작아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 엄청난 해안 암벽에 놀라게 되는 신선대.

 

 

신선대 전망대에서 먼 풍경을 보다

신선대로 내려가기 위해 이동~

 

 

해금강 테마 박물관, 오늘은 일단 패스~

 

 

신선대로 가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다.

사실 여행자의 눈길을 끄는 건

있는 그대로의 풍경들...

 

 

언덕배기에 무리지어 핀 노란 꽃들이 퍽이나 서정적이다.

 

 

꽃들도 바다와 바람을 아는 듯 일정한 방향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경계에 선 소나무들도 풍경 속으로 들어오고...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가까이 다가갈수록 신선대의 규모에 놀라게 된다.

 

 

 

 

 

 

 

 

 

 

 

해안 풍경 또한 압권이지만

느긋하게 바위에 걸터앉아오고가는 바람을 맞이하다 보면 이곳이 신선대임을 절로 알겠다.

 

 

앵글을 달리 하면 다양한 풍경들을 담을 수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떠난 여행이라 묵직한 DSLR 대신 미러리스로 풍경을 담아본다.

 

 

표현에 있어 아쉬움은 남지만 사진을 찍느라 맨눈의 즐거움을 잊어 버리지는 않는다.

 

 

신선대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역시나 벼랑 끝의 소나무였다.

 

 

저 소나무가 없었다면 이곳의 절경도...

 

 

신선대에서 반대편 너머는 바람의 언덕

그저 평범했던 바닷가 언덕이 이렇게 유명세를 타는 걸 보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역시나 풍경만은 아니다.

 

 

해안을 따라 여차 홍포 해인길로 이동.

 

 

예전에는 아는 사람만 찾아갔던 이곳도 이제는 펜션이 엄청나게 들어섰다.

아직은 비포장길의 불편함이 있어 그나마 개발의 광풍은 피한 듯 보이지만...

 새로 지은 전망대보다 여행자가 찾는 곳은 외진 곳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바위 전망대.

이만한 풍경이야 세상에 많고 많겠지만 이곳의 풍경만은 어디서든 볼 수 없다.

 

 

당일치기로 뻔한 코스로 거제를 다녀왔지만 여전히 거제는 매력적이다.

거제 동부로 들어가서해안을 따라 남부로 이동하고 다시 서부로 거제를 빠져 나왔다.

조선소와 도시가 있는 동부와 빼어난 풍경과 휴양이 있는 남부에 비해 서부는 있는 그대로의 거제였다.

 거제 서부는 다음 기회를 빌어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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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호숫가 옆 작은 암자, 감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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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호숫가 옆 작은 암자, 천은사 감로암

 

지리산 천은사는 화엄사의 유명세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고즈넉한 사찰이었다.

 

 

번다한 화엄사에 비해 깊은 고요가 있는 천은사는 마음 한 자락 내려놓는 산사였다.

 

 

‘고요히 앉아 궁구하고 있는 내 마음이 부처가 아니고 무엇인가’라는 깨달음이 절로 생기는 곳이었다.

 

 

이처럼 맑고 호젓했던 천은사는 근래에 입장료 문제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곳이 되어 버렸다.

 

 

천은사를 휘 둘러보고 호숫가 감로암에 들렀다. 스님은 간데없고 주인 떠난 자리에 개만 짖어댄다.

 

 

객 홀로 암자를 서성이다 산문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곳이 다시 출발점이다.

길을 떠난 선재동자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그제야 스님 한 분이 암자로 향한다. 그를 따를까 하다 발길을 돌린다.

 

 

수홍루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이 세찼다. 암자를 나와 호숫가에 앉았다.

15세기 인도의 시인 까비르의 시를 읽는다.

 

물속의 물고기가 목말라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웃는다.

진리는 바로 그대 안에 있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이것을 알지 못한 채

이 숲에서 저 숲으로 쉴 새 없이 헤매고 있다.

여기,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진리를 보라.

그대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보라.

이 도시로 저 산속으로

그러나 그대 영혼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은 여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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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한국기행에 출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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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한국기행 출연, 이모저모 촬영 이야기

 

<EBS 한국기행>에 출연했습니다.

지난 2주 동안 경남 합천에서 <한국기행> 촬영이 있었습니다.

지난 6월 말쯤에 한국기행 제작사인 <미디어 길> 최규상 PD와 이아형 작가가 다녀갔었습니다.

그리고 촬영이 시작되었습니다.

 

 

어제(10일)는 합천 모산재와 황매산을 촬영했습니다.

최근 합천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이기도 하지요. 저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먼저 모산재로 이동을 했습니다. 모산재 정산 인근에서 본 운무에 가린 황매산 풍경입니다.

 

 

좀 더 가까이 당겨 본 풍경입니다. 오후에는 황매산 정상(1,108m)을 올라야 합니다.

 

 

일단 촬영장소인 순결바위 쪽으로 이동을 합니다.

바위능선을 타고 오르는 제작진의 모습에서 비장미마저 느껴지는군요~^^

 

 

촬영하면서 느꼈지만 이날 제작진들 정말 고생했습니다.

무더운 날씨도 그랬고, 무거운 촬영장비에다, 몇 번이고 오가며 촬영을 하느라 정말 비지땀을 흘리더군요.

 

 

여기가 순결바위입니다.

여자의 생식기 모양인데,

순결하지 못한 이가 이 바위 틈으로 들어가면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다소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바위 자체가 주는 형태미와 사방으로 탁 트인 풍경이 압권입니다.

 

 

이제 헬리캠을 띄우는군요.

모산재의 진멱목은 역시 하늘에서 봐야 제대로이겠지요.

 

 

헬리캠이 뜨니 바위능선을 따라 우리 출연자들도 이동합니다.

 

 

이번 촬영에는 저의 오랜 벗과 미모의 여성 한 분이 저와 함께 출연했습니다.

 

 

위 사진이 모산재의 상징 '황포돛대바위' 풍경입니다.

백여 미터에 달하는 철계단을 올라서야 하는 난코스이기도 합니다.

 흔들바위라고도 불렀던 곳이기도 하지요.

 

 

흐렸던 하늘에 해가 쨍하니 나왔습니다.

저 멀리 구름에 가렸던 허굴산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모산재 정상에서 저를 촬영하는 카메라 감독님을 제가 맞촬영했습니다.

 

 

모산재에선 곳곳에 죽은 나무에 새긴 장승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장승을 깎은 분도 방송에 나옵니다.

 

 

모산재 정상(767m)에서 본 황매산 전경입니다.

 

 

무지개 터에서 모산재에서의 마지막 촬영을 한 후 황매산으로 이동합니다.

이미 오후 1시를 넘긴 시각입니다. 아침부터 4시간 넘게 촬영을 해서 모두 조금은 지친 것 같습니다만...

 

 

초원지대를 가로질러 위 사진 오른쪽 보이는 황매산을 올라야 합니다.

 

 

황매산 정상도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나무계단이 하늘까지 이어집니다.

 

 

모산재는 바위산이지만 황매산은 정상부를 제외하곤 부드러운 흙산입니다.

 

 

예전에 목장이 있던 곳이라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초원지대가 정상 부근에 펼쳐져 있습니다.

 

 

이미 많은 드라마, 영화 촬영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지요.

 

 

최근에는 철쭉제로 전국적인 명소가 되었답니다.

 

 

정상이 저 멀리 보입니다. 해가 나면서 햇살이 무척이나 따가웠습니다.

 

 

정상 아래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체력이 저렴한 저의 오랜 벗이 가장 힘들어하는군요.

 

 

잠시 카메라 감독님과 조연출님이 촬영장소와 동선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저희 촬영이 끝나자 헬리캠을 띄웁니다.

 

 

황매산의 수려한 풍경을 헬리캠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마침 구름이 능선을 넘어오는 풍경을 카메라 감독님이 놓칠 세라 담고 있습니다.

 

 

운치 있는 황매산 풍경입니다.

 

 

마지막까지 촬영에 혼신을 다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최규상 피디님, 김종화 카메라 감독님, 이초여름 조연출님 정말 수고했습니다. 

다 늦은 오후에야 촬영이 모두 끝났습니다.

EBS 한국기행 합천 5부작은 7월 28일부터 31일까지 매일 저녁 9시 30분에 20분 동안 방송됩니다.

많은 시청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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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감탄한 천은사 굴뚝과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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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감탄한 지리산 천은사 굴뚝과 담장

 

지리산 서쪽 천은사를 갔습니다. 입장료 징수 문제로 매번 문제를 일으키지만 이번에는 천은사가 목적지이니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습니다.

 

 

원교 이광사가 천은사의 원인 모를 화마를 잡기 위해 '지리산 천은사' 글씨를 물 흐르듯 써서 걸었다는 일주문을 지납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멋진 숲길이 있습니다. 천은사를 빙 둘러서 한 바퀴 산책할 수 있는 청량한 길이랍니다.

 

 

솔숲과 계곡을 건너고, 차밭을 가로질러 견성암에 들렀다가 천은사로 돌아옵니다.

 

 

수령 300년이 넘은 소나무 아래서 잠시 쉬었다가 선방에 들렀습니다.

 

 

계곡가에 위치한 선방은 천은사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입니다. 산신각은 그럴 듯한 건물 대신 바위에 '산왕각'이라고 글씨만 새겨소박합니다.

 

 

고요한 정적이 감싸고 적요로운 곳.묵직한 법당 건물과 그 옆의 서래각, 달마가 서쪽으로 온 까닭은 묻지는 않습니다. 다만, 담장 아래의앙증맞은 굴뚝에 자꾸 눈길이 갈 뿐입니다.

 

 

이곳에선 계곡 물소리도법문입니다.

 

 

선방에서 나와 법당으로 가는 길.

 

 

이곳에서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담장이었습니다.

 

 

근래에 쌓은것으로 보이는데, 그 안목과 정성이 대답합니다. 그렝이 공법까지 쓴 수구를 보고 감탄을 했습니다. 

 

 

참으로 깊고 고요한 곳이었습니다. 수홍루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이 세찹니다. 산사를 나와 호숫가에 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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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한 길을 탐하는 암자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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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숲에서 저 숲으로 암자를 찾아 헤매다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 26> 천은사 암자 순례

 

 수도암에서 본 능선 물결

ⓒ 김종길

 


무릇 명산에는 대찰이 있고, 대찰에는 웅숭깊은 암자들이 있다. 삼보사찰을 보라! 가야산 해인사와 영축산 통도사, 조계산 송광사의 숲 속에는 백련암, 극락암, 불일암 등 수많은 암자들이 진리의 불을 밝히고 있다.

지리산 천은사는 화엄사의 유명세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고즈넉한 사찰이었다. 번다한 화엄사에 비해 깊은 고요가 있는 천은사는 마음 한 자락 내려놓는 산사였다. '고요히 앉아 궁구하고 있는 내 마음이 부처가 아니고 무엇인가'라는 깨달음이 절로 생기는 곳이었다.

이처럼 맑고 호젓했던 천은사는 근래에 입장료 문제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곳이 되어 버렸다. 국립공원의 입장료 징수가 없어졌음에도 이곳에는 여전히 공원문화유산지구라는 명목으로 입장료를 받고 있다. 사유지의 무단 사용에 따른 사용료를 부과할 뿐이라는 사찰, 이를 방관하는 지자체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 애먼 시민들만 '통행세'를 내고 있다. 대승적인 이해와 지혜로운 해결이 필요하다.

암자에 놓인 고무신 한 켤레

천은사에는 모두 일곱 암자들이 있다. 종석대 아래의 유서 깊은 우번대와 상선암을 비롯하여 그 아래로 수도암, 도계암, 삼일암이 절의 오른쪽에 깃들어 있고, 사찰을 들어서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감로암과 견성암이 있다. 오른쪽의 암자들이 깊은 산중이라 수행처로 제격이라면, 왼쪽의 두 암자는 산중의 여염집처럼 포근하고 편안하여 머물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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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일암 가는 길
ⓒ 김종길

 


삼일암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그다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암자로 가는 길에서 '이야!' 하며 짧은 탄성을 두어 번 지르게 된다. 도로 옆인데도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장관인 솔숲 때문에 한 번, 다음으로는 푸른 대숲 때문이다. 솔숲이 끝나자 이윽고 울울한 산죽 숲. 길은 터널처럼 뚫려 자연스레 암자로 이어진다. 처음의 솔숲이 외부로 향하는 풍경이라면 대숲은 내면의 소리를 들려준다.

암자는 양명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스님을 불렀으나 들려오는 건 졸졸졸 물소리뿐. 법당을 돌아 스님이 거처하는 곳을 찾으니 뒷마당에서 샘물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다람쥐 한 마리가 인기척소리에 숲에서 뛰쳐나왔다.

텅 빈 암자에서 나는 또 묻는다. 지금 왜 여기에 왔는지를. 내가 암자를 찾는 것은 스님들의 말씀이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밖에서 오는 지식이 아니라 내 안에서 움트는 지혜가 필요해서다. 그저 텅 빈 암자에서 처음 한 생각을 지켜보아 마음을 살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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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무신 한 켤레
ⓒ 김종길

 


빈 암자에 놓인 고무신 한 켤레를 보며 문득 법정 스님을 떠올렸다. 어느 날인가, 법정 스님은 청도 운문사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운문사를 다녀온 뒤 스님은 그곳의 섬돌 위에 놓여 있던 수백 켤레의 흰 고무신들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백 마디의 말보다 문 앞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 한 켤레가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 유태교 신비학파의 한 수도자가 '늙은 랍비를 찾아간 것은 그에게서 율법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가 신발 끈 매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는 고백처럼…. 죽은 경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실천된  삶을 보고자 함이었으리라.

산길로 도계암을 갈까 하다 이내 발길을 돌렸다. 숲이 하도 울창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어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하는 미덥지 못한 자신을 돌아본다.

4형제가 출가한 수도암의 스님

수도암은 호방한 무인의 기질을 가진 암자였다. 지리산 암자 중에서 이처럼 호방한 기운을 지닌 암자가 또 있을까. 어찌 보면 아주 투박해 보이는 건물과 지나치게 크고 과장된 담장이 생경스럽기는 하지만 스케일이 남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암자 앞으로 펼쳐진 광활한 풍경을 염두에 둔다면 그 투박하고 과장됨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내면의 동의가 절로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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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공을 열다
ⓒ 김종길

 


푸른 눈의 외국인이 법당에서 나왔다. 그 옆으로 스님 한 분이 나란히 계단을 내려온다. 큰스님이 계시던 곳이라고 했다. 큰스님은 화엄사 주지를 지냈던 평전 종수 스님이다. 종수 스님의 글귀가 법당 왼쪽과 뒤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다.

저 멀리 허공을 스님 한 분이 걸어 나온다. 스님께 암자를 멀리 휘감고 있는 산들에 대해 물었다. 스님은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조계산, 동리산, 모후산, 무등산이라고 했다. 스님의 법명은 철우. 철우 스님은 4형제가 모두 출가했다고 했다. 장남인 자신이 제일 먼저 출가하고 5년이 지나 둘째가 출가를 해서 4형제 모두 불교에 귀의하여 수행자가 됐다. 셋째는 동화사 종정 스님의 상좌로, 철우 스님과 나머지 두 형제는 이곳 수도암에서 정진 중이다. 수도암에는 모두 9명의 스님이 있다.
"얼마 안 됐어요. 법랍이 겨우 30년이요. 50년은 돼야 절밥 먹었다 하지. 30년으론 어림도 없어. 오늘은 바빠서 안 되겠고 다음에 차나 한 잔 합시다."

깨달음을 얻은 후 붓다도 아들과 이모 등 친족이 출가했고, 부설거사도 부인인 묘화와 아들 등운, 딸 월명이 출가했고, 26살 때 손가락 네 개를 불에 태워 소신공양할 정도로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걸었던 일타 큰스님의 일가친척 41명도 출가했지만, 근래에 4형제가 모두 출가한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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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은사 숲길
ⓒ 김종길

 


천은사의 숨은 길

천은사로 내려왔다. 부도전을 지나 일주문을 지난다. 일주문에는 원교 이광사가 썼다는 '지리산 천은사' 글씨가 유려하다. 구불구불 흐르는 물줄기 같은 두 줄의 세로글씨는 문외한이 봐도 예사롭지 않다.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오른편 층계를 올라 오솔길로 접어든다. 생태관찰로이다. 많은 이들이 천은사를 오가지만 이 길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알려지지 않은 게 여행자로선 오히려 다행이다 싶다. 혼자 호젓한 길을 탐하는 것, 지나치지는 않으리라. 숨겨진 길은 천은사를 왼편에 끼고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깊이 침잠하는 길이다. 원시 숲의 청량함이 온몸으로 파고들고 맑은 새소리와 뺨을 스치는 바람이 부드럽기 그지없다.

소낙비다.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끼더니 비를 퍼붓는다. 비를 피할 곳을 찾는데, 멀리 암자가 보인다. 견성암이다. 암자는 산중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른 평지에 있었다. 예쁜 전원주택처럼. 쪽마루에 스님과 아주머니 보살 세 분이 걸터앉아 소일거리를 하고 있다. 세 칸의 소박한 건물에 견성암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견(見)'자에 눈 모양을, '성(性)'자에 마음의 형상을, '암(菴)'자에는 풀의 생김새를 그린 글씨가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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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성암 가는 길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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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성암에서
ⓒ 김종길

 


수령 300년이 넘은 소나무 한 그루 너머로 천은사 경내가 보인다. 선방에 잠시 들렀다. 계곡가에 있는 선방은 천은사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이다. 그림자 없는 수행자 수월 선사의 체취가 느껴진다. 최근에는 템플 스테이로 일반인들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고요한 정적이 감싸는 적요한 곳, 묵직한 법당 너머로 계곡 물소리 법문이 들리는 선방은 적막하다.

천은사를 휘 둘러보고 호숫가 감로암에 들렀다. 스님은 간데없고 주인 떠난 자리에 개만 짖어댄다. 객 홀로 암자를 서성이다 산문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곳이 다시 출발점이다. 길을 떠난 선재동자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그제야 스님 한 분이 암자로 향한다. 그를 따를까 하다 발길을 돌린다. 수홍루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이 세찼다. 암자를 나와 호숫가에 앉았다. 15세기 인도의 시인 까비르의 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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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로암 가는 길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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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로암 가는 길
ⓒ 김종길

 


물속의 물고기가 목말라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웃는다.
진리는 바로 그대 안에 있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이것을 알지 못한 채
이 숲에서 저 숲으로 쉴 새 없이 헤매고 있다.
여기,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진리를 보라.
그대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보라.
이 도시로 저 산속으로
그러나 그대 영혼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은 여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으리.

- '물속의 물고기는 목말라하지 않는다', 인도 시인 까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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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은사 일주문
ⓒ 김종길

 


천은사 일주문
한때는 천 명이 넘는 스님들이 있었다는 천은사는 인도 승려인 덕운 선사가 828년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물이 있어 감로사라고 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고 중건할 때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잡아 죽였더니 더 이상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 하여 천은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절 이름을 바꾼 뒤에는 원인 모를 화재가 잦았다. 사람들은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는 뱀을 죽여서 그런 것이라며 두려워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조선 4대 명필 중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듯 써서 걸었더니 이후로는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일주문 글씨를 보고 있노라면 구불구불한 글씨가 정말로 물이 흐르는 듯하다. 아니, 물 흐르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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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에 남은 전설의 마애불, 개령암지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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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에 남은 전설의 마애불, 개령암지를 찾아...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27> 마한의 전설, 개령암지

 

                            ▲  정령치 고개에서 본 반야봉(오른쪽)과 지리산 주능선 1백 리 ⓒ 김종길


달을 잡아당긴 곳 인월에서 달의 궁전 달궁으로 간다. 달궁 마을은 도로가 뚫리기 전만 해도 첩첩산중의 긴 협곡에 있었다. 진한과 변한에 쫓긴 마한의 한 왕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서북능선에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아득하다. 황 장군과 정 장군이 쌓은 수비성은 산속에 여전히 굳건한데 아득한 옛날 왕궁 터는 시멘트로 발라져 주차장이 되어 버렸다. 철이면 엄청난 피서 인파와 가을 단풍객들이 들이닥치는 곳, 이곳에서 옛 왕궁의 전설을 기억하는 건 어쩌면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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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골이 오싹한 정령치 ⓒ 김종길 

 

지리산 서북능선 정령치

"산은 혼돈의 뼈요, 바다는 혼돈의 피다. 동해에 한 산이 있으니 이름 하여 지리산이다. 그 산의 북쪽 기슭에 한 봉우리가 있으니 이름이 반야봉이다. 그 봉우리 좌우에는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는 두 고개가 있다.

옛날 한나라 소제(BC 87~74년) 즉위 3년,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리를 피해 이곳에 도성을 쌓았다. 황, 정의 두 장수를 시켜 공사를 감독했으므로 두 사람의 성을 따서 고개 이름을 짓고, 72년 동안 도성을 보호했다. 그 뒤 신라 진지왕 원년에 운집대사가 중국에서 나와 황령 남쪽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따서 황령암이라 했다."

서산 대사의 <황령암기>에 나오는 글이다. 지리산에서 출가하고 깨달음을 얻은 서산 대사는 1546년 가을 지리산을 떠나 오대산과 금강산을 한동안 떠돌아다니다 1558년 처음 발심했던 지리산을 다시 찾게 된다. 내은적암에서 3년을 지내다, 이내 황령을 지나 능인암, 칠불암 등 여러 암자에서 다시 3년을 지냈다고 <완산 노 부윤에게 올리는 글-상완산노부윤서>에 적고 있다. 이 시기에 적은 것으로 보이는 <황령암기>에서 서산 대사는 '마한도성설'에 따라 지리산 개산의 역사를 적으며 '정령(鄭嶺)'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72년 동안 존재했던 옛 마한도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깊숙한 곳을 어이하여 도성으로 삼았던 걸까. 생각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방으로 튀어 나간다. 그러나 기록은 거기에서 끊기고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야 다시 세상에 나타난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자 남원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신을 하게 된다. 의병장이었던 조경남(1570~1641)은 <난중잡록>에서 "밤에 황류천(달궁 계곡)을 건너고... 밤새도록 가서 겨우 정령성(鄭嶺城)에 도달하여 잠깐 쉬었다"고 적어 당시에도 정령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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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령암지 가는 길 ⓒ 김종길


정령치(해발 1172m) 고갯마루에 섰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급경사지만 이내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푸근하게, 아주 가까이 다가오는 반야봉에 모든 것이 평온해진다. 반야봉 옆으론 삼도봉이 지척이고 토끼봉을 지나 천왕봉까지 지리산의 등뼈, 주능선이 저 멀리 100리 밖까지 펼쳐진다. 정령치에서의 지리능선 조망은 장엄하기 그지없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풍경이다.

그뿐만 아니다. 노고단 아래 종석대에서 성삼재를 지나 작은고리봉, 묘봉치, 만복대, 정령치, 큰고리봉, 세동치, 부운치, 팔랑치, 바래봉, 덕두산까지 이어지는 해발고도 1000~1400미터에 이르는 봉우리와 고개 들이 출렁이는 긴 서북능선이 이곳을 관통한다. 서북능선은 주능선 다음으로 두 번째로 긴 능선이지만 성삼재와 정령치 종단도로로 두 동강났다. 예전에는 1백 리에 달하는 주능선과는 달리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으나 정령치 종단도로가 생겨진 이후부터 풍경이 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종단도로로 산은 끊겼지만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바뀐 것이다.

정령치 일대의 능선은 초원지대이다. 그 이유는 1960년대에 임수명, 임인택 부자가 이곳 지리산 서북능선에 사탕무를 재배하려고 정령치의 수비성 터와 그 일대 10만여 평을 개간하면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업은 꿈에 그치고 말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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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령암지 가는 길 ⓒ 김종길


절벽에 남은 전설의 마애불

싱그러운 풀밭이 펼쳐진다. 날카로움은 사라지고 부드러움만 남은 곳, 어머니 품처럼 따사롭고 편안하다. 능선길이라고 해서 칼바람이 불고 뾰족한 바위가 있을 거란 걱정일랑 적어도 이곳에선 접어둬도 좋다. 좁은 숲길이 이끄는 곳으로 그저 발길만 옮기면 이미 그곳은 평안의 땅이다. 만 가지 복이 사방으로 내린 만복대도 지척이니 굳이 말해 무얼 할까. 온통 풀들의 천국. 온갖 약초와 산나물이 있는 이곳은 야생의 작물이 자라기에 최적의 장소임에 틀림없다.

하늘을 향하던 길이 숲 속으로 이어진다. 붉은 듯 하얗게 핀 산철쭉이 길안내를 자청하고 솔숲에 가만히 들어앉은 오랜 무덤에 비치는 햇빛이 따사롭다. 그 아래로 늪이 있다. 평평한 고원의 산정 늪은 이곳이 모든 생물의 낙원임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늪을 돌아 옛 암자 터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기와조각이 더러 보이고 숲 덤불에 돌담과 주초로 쓰였을 돌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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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령치 늪 ⓒ 김종길


길이 끝났다. 하늘로 솟은 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은산철벽, 이곳은 부처의 세계. 암벽에는 모두 열두 분의 부처가 새겨져 있다. 아니,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바위에 깃든 부처를 드러낸 것이리라.

어찌하여 이 깊숙한 곳에 부처를 새겼을까. 아니, 어찌하여 부처가 이 깊숙한 산중 암벽에 모습을 드러냈을까. 가만히 암벽에 다가섰다. 서 있는 불상이 둘인데, 그중 하나는 하반신이 없다. 앉아 있는 불상은 열쯤 되어 보이나 겨우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몇 안 된다. 어떤 것은 아예 불상이라고 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마모됐다. 몇 번이고 들여다봤지만 열두 부처가 모두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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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 열두 구의 불상이 있으나 모두 찾기는 어려웠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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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한의 장군상으로도 알려져 있는 마애불상 ⓒ 김종길 


4m에 달하는 가장 큰 불상은 듬직하다. 새긴 솜씨도 남달라 간략히 처리된 옷 주름에 비해 돋을새김의 두드러진 얼굴에 유달리 큼직한 코, 듬직한 체구의 다부진 불상은 차라리 그 옛날 용맹했던 장군을 떠올릴 정도로 건장해 보인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이 불상을 마한의 옛 장수라 했다. 실제로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통한으로 기억되는 마한의 왕조에 대한 기억과 열망이 장군상이라는 믿음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나무가 숲을 이뤄 사방을 둘러싼다. 적막한 곳, 세월에 헐어진 불상의 무상함이 사무친다. 나무 사이로 멀리 외호하고 있는 지리능선 1백 리를 가뭇가뭇 훔쳐보다 문득 이 절벽 바위의 불상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이 어딘지 궁금해졌다. 울울한 나무가 지리능선을 가리고 있어 정확한 방위를 잡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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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맹한 장수 같은 마애불상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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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애불에서 본 반야봉(오른쪽)과 지리능선 ⓒ 김종길


불상군이 있는 암벽을 돌아 오르기 시작했다. 위태위태한 길도 잠시, 고개를 돌리자 장엄한 지리능선 1백 리가 펼쳐졌다. 가만 숨을 고르고 난 후 불상이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눈이 가 닿은 곳은 놀랍게도 천왕봉이었다. 순간 온몸이 뭔지 모를 전율 같은 것에 휩싸였다. 그건 분명, 어떤 희열이었다.

왜 그렇게 적막할 수밖에 없는지, 천 년의 긴 시간이 왜 이곳에선 순간으로 다가왔는지, 지금 이 순간이 어떤 영원으로 이어지는지를 알 듯싶다. 적막한 터가 주는 고요함은 외로움도, 적적함도, 허허로움도 아닌, 텅 빈 공간에서의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희열, 충만 같은 것이었다. 마음이 넉넉해지고 공기가 따뜻해지고 햇살이 넘치는 곳, 긴 침묵이 흐르는 예가 바로 극락일 성싶다.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는 지리산 암자의 대부분이 장엄하듯 이곳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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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상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천왕봉(뒤쪽 가운데) ⓒ 김종길

  
돌아오는 길에 문득 황령암은 어디일까, 궁금해졌다. 황령암은 서산 대사가 <황령암기>에서 '신라 진지왕 원년에 운부대사가 지리산 황령 남쪽에 세운 절로, 꽃과 대나무가 서로 비추어 그 그림자가 금지(金池)에 떨어지면 안양(극락)세계를 방불케 했다.'고 한 아름다운 절이었다. 황령암은 1538년경 소실되어 1544년 봄에 다시 지어졌다는 아득한 이야기만 전해질 뿐이다.

달궁과 서북능선 고개들
달궁이란 이름은 마한의 '달의 궁전(月宮)'의 전설에서 왔다고 대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예전 이곳에 있던 달공사(達空寺)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설도 있다. 왕궁 터로 추측되는 곳에서 발견된 주춧돌 또한 궁궐의 것이 아니라 폐사지의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왕궁 터에 나중에 절이 들어섰을 수도 있다. 마한의 미스터리를 영원히 남겨두는 것이 섣불리 밝히려 드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지리산에서 주능선 다음으로 두 번째로 긴 능선인 서북능선에는 여러 고개가 있다. 정령치가 그 옛날 마한의 장수 정 장군이 지키던 곳이라면 황 장군이 지키던 곳은 황령재, 각기 세 명의 성이 다른 사람이 지키던 곳은 성삼재, 그리고 여덟 명의 병사들이 지키던 곳이 팔랑치이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은 정령치 휴게소에서 바래봉 방면의 큰고리봉으로 20분쯤 가다 보면  있다. 보물 제 1123호이다.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인근 마을 사람들 사이에선 마한의 장군상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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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부탁해에 나온 충북괴산의 명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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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부탁해>에 나온 충북 괴산의 명소들

 

지난주에 이어 어제(7월 19일) <아빠를 부탁해>에서는 충북 괴산의 오지마을 갈론 마을이 나왔다. 조재현과 그의 딸 조혜정이 하룻밤을 지낸 곳이다. 이번 방송에서는 갈론 마을 외에도 조혜정이 108배를 한 각연사와 조재현 부녀가 걸었던 산막이 옛길이 소개되었다. 여행자가 이곳을 다녀온 지는 벌써 5년이 지났다. 당시 괴산 일대를 사나흘 정도 떠돌아 다녔었다. 그럼, <아빠를 부탁해>에 나온 괴산의 명소들을 둘러보자.

 

 

갈론 마을, 조재현과 조혜정이 하룻밤 묵은 곳

갈론 마을은 과연 어떤 곳일까. 갈론 마을은 괴산군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이다. 또한 갈론 마을은 수려한 경관의 ‘갈은 구곡’이 있어 괴산의 대표적인 구곡문학의 장소이기도 하다.

 

 

예전 이곳은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극소수의 여행자만 찾던 곳이었는데, 몇 년 전 <1박2일> 팀이 다녀간 후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불과 수 년 전만해도 자동차가 닿지 않았던 오지 갈론 마을. 지금도 승용차 한 대 겨우 지날 정도의 좁은 포장길을 한참이나 달려야 이를 수 있는 산골이다. 달래강을 옆구리에 끼고 지칠 즈음 산자락을 어깨에 이고 가야 하는 마을이 갈론이다.

 

 

마을 이름은 도연명의 <오류선생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즉 욕심이 없는 이상 세계의 순박한 사람들인 ‘갈천씨지민葛天氏之民’들이 은거하여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당초 칡이 많이 우거져서 은거하기 좋은 곳이란 뜻의 갈은葛隱 마을이었으나 언제부턴가 갈론葛論 마을로 바뀌었다고 한다.

 

 

마을 안쪽의 ‘갈은 구곡’에는 신선과 관련된 이름들이 많다. 신선이 내려왔다는 강선대를 비롯하여 갈은동문, 갈천정, 옥류벽, 금병, 구암, 고송유수재, 칠학동천, 선국암이 9곡을 이루고 있다. 괴산의 갈은구곡은 전덕호(1844-1922)가 설정했다고 전해진다.

 

 

각연사, 조혜정이 108배를 올린 고요한 산사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2년인 515년에 유일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각연사 앞산인 칠보산 너머의 사동 근처에 절을 지으려고 공사를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나무를 다듬고 남은 대팻밥이 늘 없어졌다. 이를 수상히 여긴 유일 스님이 밤에 몰래 지켜보니 까치가 대팻밥을 물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이었다. 스님이 뒤를 따라 가보니 까치들이 산 너머 못에 대팻밥을 떨어뜨려 못을 메우고 있었다. 그 못에서 이상한 빛이 나서 들여다보니 석불 한 기가 들어 있었다. 이에 스님은 절을 못 있는 데로 옮겨 세우고 석불을 모신 후 ‘깨달음이 연못의 부처님에서 비롯되었다覺有佛於淵’고 하여 각연사로 절 이름을 지었다.

 

 

지금 비로전에 모신 보물 제433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그것이라고 한다. 석조불상은 각연사의 창건 설화와도 연관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단아한 아름다움으로 인해 통일신라 말의 빼어난 불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각연사는 고려 초기 통일대사가 중창을 하여 대찰이 되었고 그 후에도 몇 번 중수를 했다고 하나 지금은 대웅전과 비로전, 삼성각 등 몇 채의 전각만 있을 뿐이다.

 

 

 

산막이 옛길, 조재현과 조혜정이 산책한 괴산의 명품 산길

산막이 마을이 있는 칠성면 사은리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유배지였을 만큼 멀고 외진 곳이었다. 댐이 생기고 나서 50년간 섬 같은 육지로 고립된 산막이 마을은 배가 아니면 건널 수 없었던 오지 중의 오지였다. 덕분에 달래강은 아직도 천연의 생태계를 간직하고 있다.

 

 

 

 

2009년에 이 길이 열리고 난 후 이곳을 찾는 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제주 올레, 지리산 둘레와 더불어 이곳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기도 했다. 예전에는 이곳에도 35가구 정도가 살았던 제법 큰 마을이었는데, 댐이 생기고 난 후에도 15가구가 남았다고 한다. 지금은 단 세 가구만 살고 있다.

 

 

산이 막혀 길이 끝나는 산막이마을은 충북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에 있다. 산막이 마을을 가려면 <괴산수력발전소>를 찾으면 제일 쉽다. 수력발전소에서 강 오른쪽 길을 따라가면 주차장이 나온다. 이곳이 외사리 사오랑마을이다. 복원된 산길을 따라 2.5km 정도 가면 산막이 마을이 나온다. 길은 누구나 편히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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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신비, 문창대는 과연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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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신비, 문창대는 과연 어디인가!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 28> 하늘에 가까운 절, 법계사

 

 

 
 법계사에서 본 중산리 일대 능선
ⓒ 김종길

 


천왕봉 남쪽을 대표하는 지리산 관문은 중산리이다. 예부터 많은 이들이 중산리를 통해 천왕봉을 올랐다. 탁영 김일손(1464~1498)은 26세 때인 1489년(성종 20)에 일두 정여창(1450~1504)과 함께 지리산을 찾았다. '다섯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한 번 쉬면서'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올랐던 그는 제석봉, 연화봉, 촛대봉을 거쳐 대성골로 하산했다. 그리고 쌍계사와 불일암을 거쳐 모두 16일이 걸려서야 지리산 유람을 마쳤다. 김일손은 <두류기행록>에서 지리산을 오르는 기쁨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시내가 끝나고 조금 더 북쪽으로 가다가 참대 속을 헤치며 걸었다. 산은 온통 돌로 덮여 있었다. 바위나 칡넝쿨을 부여잡고 한걸음 한걸음씩 10여 리를 숨 가쁘게 기어올랐다. 높고 가파른 산 하나를 오르니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는데, 별천지에 온 것처럼 기뻤다. 꽃 한 송이를 꺾어 머리에 꽂고, 따라온 사람들에게도 모두 꽃을 꽂고 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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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계사
ⓒ 김종길

 


여기가 법계

예나 지금이나 천왕봉을 가장 단시간에 오를 수 있는 등산로는 중산리 코스이다. 가장 짧은 거리의 산행길이라 시간은 단축되지만 경사가 가팔라 힘든 코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중산리보다 시간은 더 걸리지만 좀 더 완만하고 여유 있는 순두류 코스로 천왕봉을 오른 이들도 많았다. 지금은 순두류에서 환경교육원까지의 3km 길이 포장이 되어 1시간 간격으로 법계사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어 좀 더 편리하게 천왕봉에 오를 수 있다.

순두류는 이름 그대로 지리산의 산세가 순하게 흘러내려 평원을 이룬 곳으로 산길 또한 완만하여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신선너덜'이라고도 불리는 순두류는 그 풍경 또한 수려하다. 당일치기로 천왕봉까지 올랐다가 장터목을 들러 중산리 계곡 길로 하산하려면 순두류 코스가 가장 무난하다.

순두류 환경교육원에서 1시간 남짓 오르니 어느덧 로타리 대피소이다. 완만한 숲길에 졸졸졸 계곡물을 따라 오르는 순두류 산행은 부드럽기 한량없다. 산장 바로 위가 법계사, 숲 속 길에는 일주문을 짓느라 분주했다. 공사 중인 일주문 아래를 지나니 해발 1450m에 자리한 법계사가 눈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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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계사 삼층석탑
ⓒ 김종길

 


돌층계를 올라 산신각 앞에서 경내를 내려다본다. 법계사의 상징인 3층 석탑이 거대한 자연석 위에 우뚝 솟아 있다. 그 너머로 아침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을 덮고 있던 구름이 어느새 짝 갈라지더니 신선의 풍경을 그려낸다. 그 황홀한 풍경에 잠시 넋을 빼고 있는데, 어디선가 길고 묵직한 종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산신각에 오르던 스님도 순간 발길을 멈추고 몸을 돌려 산 아래 풍경을 한참이나 내려다봤다.

종소리는 고요와 침묵의 순간을 넘어 영원으로 흘러갔다. 저 넓고 아득한 허공에 진리가 두루 걸쳐 있으리라. 형체도, 모양도 없지만 모든 세계에 가득하고, 온갖 존재들을 품고 있는 법계. 저기 어딘가가 아니라 모든 중생들의 여기 이곳, 이 마음에 우주가 담겨 있으리라. 하나의 존재에 무한한 우주 법계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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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계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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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계
ⓒ 김종길

 


문창대는 과연 어딜까

"보살님, 문창대가 어디쯤인가요."
"저기 어디라던데…."

경내를 한 번 둘러보고 나서 입구의 보살에게 다시 물었다.

"보살님, 문창대가 저쪽은 아닌 듯한데요."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문창대는 과연 어디일까. 법계사에 오기를 고대할 때부터 문창대는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고운 최치원이 법계사에 자주 왕래를 하면서 오가던 문창대는 천왕봉 남쪽에 남은 유일한 그의 자취이다. 최치원의 족적은 쌍계사가 있는 화개동천에 거의 집중되어 있다. 쌍계사 입구의 쌍계석문과 경내에 있는 진감선사 대공탑비, 신흥 마을의 삼신동과 세이암, 불일폭포의 환학대 등이 있고, 조금 떨어진 산청 단속사지에 '광제암문' 각자가 있다.

산신각 댓돌에 앉아 맞은편 봉우리를 보았다.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층계를 올라온다. 스님이니 알겠거니 하고 문창대가 어디인지 여쭈었지만 역시 모른다고 했다. 이곳에 온 지 겨우 한 달 되었다는 스님은 오히려 되물었다. "밤이 되면 저기 저쪽으로 엄청난 불기둥이 올라와요. 거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진주라고 했더니 "아!"하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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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계사
ⓒ 김종길

 


문창대에 대한 조선 선비들의 기록은 유람록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제일 먼저 '문창대'라는 이름을 기록한 사람은 조선 중기 영남사림의 중심인물이었던 부사 성여신(1546~1632)이다. 그는 일흔이 넘은 1617년에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오른 후 <유두류산시(遊頭流山詩)>를 남겼는데, '동쪽에 걸터앉은 세존봉에는/ 우뚝한 바위가 사람이 서 있는 듯/ 서쪽에 문창대 솟아 있으니/ 고운이 옛 자취 남긴 곳이네./ 바위에 고운의 필적 새겨 있다 하는데/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라 가볼 길이 없네.'라며 문창대를 언급했다.

이후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오른 조선 선비들이 문창대를 유람록에 기록하면서 문창대는 이 일대의 명소가 되었다. 성여신보다 앞선 시기인 1489년 김일손도 문창대를 다녀갔다. 그러나 김일손은 <두류기행록>에서 세존암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곳이 지금의 세존봉에 있는 문창대임을 알 수 있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巘崿)를 만났는데 세존암이라고 했다. 세존암은 매우 가파르고 높았으나 사다리가 있어 올라갈 수 있었다. 올라가 천왕봉을 바라보니 몇십 리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기뻐서 따라온 사람들에게 힘내어 다시 올라가자고 말했다. 여기서부터 길이 차츰 평탄해졌다. 5리쯤 더 가니 법계사에 이르렀는데, 절에는 승려 한 사람만 있었다. 나뭇잎은 이제 막 파릇파릇 자라나고 산꽃은 울긋불긋 한창 피었으니, 때는 늦은 봄이었다. 조금 쉬었다가 바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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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신각에서 본 법계사 경내
ⓒ 김종길

 


그럼, 문창대는 어떤 곳이었을까. 문창대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유람록으로는 1902년 2월부터 3월까지 40일 동안 지리산 일대를 유람한 김회석(1856~1934)의 <지리산유상록>과 송병순(1839~1912)의 <유방장록>을 들 수 있다. 두 사람은 유람록에서 문창대의 험함과 돌우물의 기이함, 최치원의 활쏘기 행적 등을 묘사했다. 그중 김회석의 <지리산유상록>을 보자.

"점심을 먹은 뒤 문창대(文昌臺)에 올랐다. 바위 사이에 구멍이 하나 있는데,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했다. 부여잡고 올라가니 수십 명이 앉을 만한 평평한 바위가 나왔다. 바위에는 두 개의 구덩이가 있었다. 맑고 시원한 물이 가득했고 깊이는 한 자 정도 됐다. 이 물을 감로수라고 불렀다. 큰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으며, 긴 장마에도 넘친 적이 없다고 했다. 모두 둘러앉아 각자 물을 떠마셨다.

우리를 따라온 승려가 '만약 이 물을 다 떠내면 하늘이 바로 비를 보내니 다 뜨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승려가 그렇게 말하여 한 표주박의 물만 남기고 한참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조금도 빈틈이 없는 구덩이에 절로 물이 스며들어 구덩이를 가득 채우고는 넘치거나 줄지 않아 물을 뜨지 않았을 때와 같아졌다.

구경하던 10여 명의 사람들이 두세 번 이와 같이 해도 구덩이의 물은 이전과 같았다. 괴이하여 승려에게 물어보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 이 우물은 최치원 선생이 판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위 끝에는 발을 디딜 만한 곳이 있는데, 그곳은 최 선생이 화살을 쏘던 곳입니다. 봉우리 아래에 과녁을 걸던 옛터가 있는데, 지금도 화살을 줍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 매우 허황되었다. 각자 시 한 수를 짓고 벽계암(법계사)으로 내려왔다."

김회석의 글처럼 예전에는 문창대를 최치원이 활을 쏘았다고 해서 '시궁대' 또는 그의 호를 따서 '고운대'로 불렀다가 나중에 그의 시호인 문창후를 따서 문창대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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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존봉과 큰 바위를 기단으로 삼은 삼층석탑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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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계사에서 본 문창대(왼쪽 바위)
ⓒ 김종길

 


문창대 바위 위의 돌우물에는 '감로수' 외에도 '세심천', '천년석천' 등의 다양한 이름과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늘 물이 고여 있는 이곳에 부정한 자가 오르면 비바람이 몰아쳐 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산 아랫마을 주민들이 날이 가물면 이 물을 퍼 나르는데 그러면 곧 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내려서 이 돌우물은 끝내 마르지 않는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문창대는 현재 법계사 남쪽 500미터쯤에 있는 세존봉으로 불리는 1368봉이다. 한때 문창대는 법계사 서북쪽 30m에 있는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1970년대 진주산악회 학술조사반의 답사에서 <진양지>의 '문에서 서쪽으로 수십 보쯤에 문창대가 있으니 최 고운이 놀던 곳이요.'라는 기록과 '고운최선생 장구지소(孤雲崔先生 杖屨之所, 고운 최치원이 지팡이와 짚신을 놓아두었던 곳)'라고 새겨진 바위 각자 등을 근거로 그렇게 확정했다.

그러나 <진양지>가 증보 과정에서 실증 없이 보강된 점, 바위 각자 또한 후대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는 점, 옛 문헌들에서 문창대는 법계사 가기 전의 산봉우리인 지금의 세존봉에 있던 바위로 기록되고 있는 점 등을 살펴보면 지금의 세존봉에 문창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병순도 <유방장록>에서 벽계암(법계사)에서 "점심을 먹은 뒤 문창대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승려가 '저 앞의 봉우리 정상이 바로 문창대입니다. 그런데 길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어 법계사 앞 봉우리 정상이 문장대임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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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계사
ⓒ 김종길

 


애초 법계사를 마지막으로 암자 연재를 마치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지리산에는 소개하지 못한 수많은 암자들이 있다. 근래에 세운 암자는 차치하더라도 지금은 터만 남은 곳을 어떻게든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자유로이 출입을 할 수 없는 통제구역인데다 그 수가 수십, 수백은 되어 별도로 묶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해서 옛날 천왕봉 주위에 있었던 수많은 암자 중 천불암과 향적사 터를 다음 회에서 마지막으로 다루고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 연재를 마치고자 한다.

법계사와 벽계 정심
법계사는 해인사의 말사로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높은 곳(해발 1450m)에 위치하고 있다. 544년(신라 진흥왕 5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1380년(고려 우왕 6년)에 황산대첩에서 이성계에게 패한 왜군에 의해 분풀이로 불탔다고 한다.

1405년 선사 벽계 정심이 중창했다. 1908년 박동의 의병부대가 덕산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뒤 이곳으로 후퇴해 다시 맞섰지만 결국 패하여 법계사는 다시 불타게 된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또다시 불탄 채 토굴만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1981년 법당과 산신각, 칠성각 등이 재건되면서 겨우 절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산신각 앞에 자연암석을 기단으로 삼은 고려 초기의 삼층석탑이 있다. 보물 제473호로 지정된 법계사삼층석탑이다.

법계사는 예전 벽계암으로도 불렸다. 조선 초기의 승려 벽계 정심(생몰연대 미상)이 중창을 해서 절 이름도 그렇게 붙은 것이다. 벽계 정심은 누구인가. 흔히 우리나라 불교사를 이야기할 때 그 법맥을 고려 후기 태고 보우 이래로 환암 혼수, 구곡 각운, 벽계 정심, 벽송 지엄, 부용 영관, 청허 휴정으로 이어지는 계보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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