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김천령의 바람흔적
Viewing all 237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늙어간다는 것!


지리산 벽송사 미인송과 도인송

$
0
0

 

 

 

 

지리산 벽송사 미인송과 도인송

 

지리산 골짜기에 벽송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조선 선불교의 종가로 선풍을 날리던 도량입니다.

 

 

깊은 산중임에도 절집의 앉음새가 넉넉합니다.

단청을 하지 않은 검박한 전각들 뒤를 오르면 널따란 공터가 있습니다.

승탑 몇 기와 삼층석탑이 있는 이 공간에 서면

그 옛날 벽송사가 원래 어떠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산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기슭에는

오랜 세월 절의 성쇠를 보아온 두 그루의 소나무가 있습니다.

‘미인송’과 ‘도인송’입니다.

 

 

한 그루가 넉넉하게 잘 자랐다면

나머지 한 그루는 기울어져 위태위태해 보입니다.

 

 

도인에게 연정을 품었던 미인의 유혹에도

도인이 흔들림 없이 도에만 전념하자

미인도 연정을 버리고 사모와 존경으로

도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수도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야 하루아침에 쉬 가라앉을까요?

자꾸만 기우는 마음이야 어쩔 도리가 없겠지요.

그 위태한 마음을 도인송이 받쳐주고

미인송은 아슬아슬한 마음을 단속하며 도인송을 감싸 안습니다.

 

 

두 소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이곳 벽송사가 어떤 절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듯합니다.

 

 

하얀 토끼풀이 빈터를 가득 채웁니다.

한국전쟁 때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쓰인 탓에 몽땅 불타버렸던 벽송사,

그 아픔을 기억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죠.

흔하디흔한 이 토끼풀이 먼 나라 아일랜드에서는 나라의 꽃이랍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며칠간의 남원 여행, 남원 노신사의 위엄

$
0
0

 

 

 

며칠간의 남원 여행, 남원 노신사의 위엄

 

남원이라는 남도의 고을은 오늘날의 그 흔한 '도시'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정작 도시의 모습보다는 소읍의 정겨움이 물씬 풍기는 곳입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하다는 상투적인 말보다는 이곳에선 시간이 더디 가고 있다는 말이 적확할 겁니다. 평화로운 골목길 풍경과, 느긋한 행인들의 걸음걸이와, 노인들의 깊고 맑은 오랜 얼굴에서, 남원이라는 도시의 위엄과 풍류를 알겠습니다. 오래되어도 낡아 보이지 않고 소박해도 위엄을 잃지 않는 것, 며칠간의 여행에서 느낀 남원의 모습이었습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남원 춘향제의 하이라이트, 신판춘향길놀이

$
0
0

 

 

 

 

 

 

남원 춘향제의 하이라이트, 신판춘향길놀이

 

제84회 남원 춘향제가 ‘사랑이야기, 남원에 물들다’는 주제로 지난 6월 12일부터 17일까지 남원시 광한루원과 요천 일대에서 열렸다. 여행자는 13일부터 15일까지 남원에 사흘을 머물면서 춘향제를 취재했다.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지만 아무래도 춘향제의 하이라이트는 신판 춘향길놀이(용마놀이)가 아니었나 싶다. 특히, 12일 선발된 미스춘향이 나타나자 행사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미스춘향은 다른 대회와 달리 진․선․미 외에 정․숙․현 등이 더해져 총 6명이 선발되었다. 올해 미스춘향에는 진 임하늘, 선 박우정, 미 강아랑, 정 김재은, 숙 양소연, 현 정윤주가 선정되었다.

 

신판 춘향길놀이(용마놀이)는 주말인 14일(토), 15일(일) 이틀에 걸쳐 오후 4시 30분에서 6시 30분까지 두 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신판 춘향길놀이는 춘향 정신을 주제로 한 행렬이다. 미스 춘향을 비롯한 춘향과 관련한 긴 행렬이 춤과 퍼포먼스 등으로 관광객들을 축제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애초 12년 만에 춘향 길놀이의 대미를 장식할 용마놀이가 재현된다고 했지만 행사 당일 정작 볼 수는 없었다. 용마놀이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남원의 전통 민속놀이다.

 

특히 이번 신판 춘향 길놀이는 전국 공모를 해서 눈길을 끌었다. 과거 70년대 춘향제 길놀이는 춘향제의 대표 종목으로 인기가 높았으나 교육 경쟁 심화에 따른 학생참여 저조와 읍면동 인원감소, 노령화로 매력이 점차 감소되어 왔고 특히 농번기 읍면동 주민의 대표적 민원이 되어왔다.

 

이에 춘향제전위원회는 읍면동 대동길놀이를 “신판 춘향길놀이”로 전환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길놀이 경연 참여자를 모집했다. 이로써 과거 의무참여형 길놀이를 폐지하고 자율참여로 전환하여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 참여형 길놀이로 진행된 것이다. 동시에 국민 참여 활성화와 길놀이 매력 강화를 위해 기존의 단순행렬에서 벗어나 춤과 퍼포먼스 경연으로 바뀌어 함께 즐기고 노는 방식, 관객 호응에 주안점을 두었다고 했다. 길놀이는 용성초등학교를 출발해 남원 시내를 돌아 광한루 앞에 이르는 2km 정도의 구간에서 퍼레이드를 펼치는 긴 행렬이다.

 

춘향제는 원래 매년 4월에 열렸으나 올해는 세월호 여파로 6월에 열리게 되었다.

 

 

 

 

 

 

 

 

 

 

 

 

 

 

 

 

미스춘향 진 임하늘

 

 

 

선 박우정

 

미 강아랑

 

정 김재은

 

숙 양소연

 

현 정윤주

 

격려차 나타난 2013년 미스 춘향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지리산 벽송사 스님들의 울력

$
0
0

 

 

 

 

지리산 벽송사 스님들의 울력

 

한밤중 새 한 마리 날아오더니 선방에서 밤새 울었다.

 

‘홀. 딱. 벗. 고.’

 

 

12시를 넘긴 시간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언가에 화들짝 놀라 잠이 깼다. 방문을 두드리는 맑은 소리가 처음엔 저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사람의 노랫소리처럼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어느 새 방문 앞에서 요란히 울렸다. 너무나 간절한 목소리에 비몽사몽간에 방문을 열고 쪽마루에 걸터앉았다.

 

“나무화장세계해 비로자나진법신 현재설법노사나 석가모니제여해…”

 

울림이 깊고 아름다운 염불은 아니었지만 간절한 그리고 정성어린 염불이었다.

 

 

 

도량석이다. 도량 곳곳을 돌며 새벽예불을 시작하는 것이다. 보통 때보다 큰 목탁을 치며 절집을 돌며 염불을 한다. 처음에는 약한 음에서 서서히 높은 음으로 올렸다가 내리기를 반복한다. 일체 중생이 놀라지 않고 천천히 깨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대개 천수경을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경전도 하는데 이 스님은 ‘화엄경 약찬게’를 한 것이다. 도량을 깨끗하게 하고, 잠들어 있는 천지만물을 깨우며 일체 중생들이 미혹에서 깨어나게 한다.

 

 

 

쪽마루에 정좌를 하고 어둠속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10여 분을 같이 염불을 외다 다시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모두가 깨어 있는 데 홀로 잠이 들다니…. 잠시 후 눈을 다시 뜨고 세수를 한 후 정좌를 하고 명상에 잠겼다.

 

 

 

여섯 시 아침 공양을 마치자 원돈 스님이 일곱 시에 비질을 한다고 했다. 절 아래에 있는 서암정사 입구까지 비질이다. 꽤 긴 구간이다. 벽송사에서 하안거를 하고 있는 10여 명의 스님들이 비를 들고 절마당에 모였다.

 

 

 

울력이다. 절에는 ‘삼사(三事)’라는 말이 있다. 수행에 가장 기초가 되는 일상적인 행위인 예불, 공양, 울력 세 가지를 이르는 말이다. 수행하는 이라면 누구든 함께해야 하는 일이다. 예불은 부처님에 대한 인사, 공양은 하루 세 끼 끼니를 잇는 일, 울력은 공동노동을 말한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것이 예불이고 생리적 욕구를 채워 생명을 지속시키는 것이 공양이라면 늘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꼭 필요한 것이 울력이다. 여행자는 아침에 의중마을까지의 트레킹이 있어 비질하는 대신 사진을 담기로 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기차역에서 열린 이색 북콘서트, 남도여행법

$
0
0

 

 

 

 

 

기차역에서 열린 이색 북콘서트, 남도여행법

 

지난 6월 27일(금)에 저의 책 《남도여행법》북콘서트가 있었습니다. 당초 50분을 모시기로 했는데, 많은 분들이 오시는 바람에 서 계시거나 주위를 배회하신 분들이 계셔서 죄송했습니다. 멀리 강원도에서부터 서울, 경기도, 대전, 전주, 남원, 대구, 부산, 창원, 거제, 사천, 하동, 진주 등 전국 각지에서 오셨습니다. 특히, 블로거 분들이 많이 참석하셨는데요. 서울에서 온 보라미랑 장유근 님, 창원의 김주완․김훤주 님, 달그리메 님, 강원도에서 온 한사 정덕수 님, 대전에서 오신 펠콘 김대영 님 등이 참석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날 북콘서트에서는 여러 가지 사연이 있었습니다. 북콘서트 날짜를 잘못 알고 3번이나 진주역을 찾으신 분, 신문보도를 보고 기사를 잘라서 부러 찾아와서 책을 사 가신 할아버지, 기차에서 내려 저자 사인을 수줍게 받아가던 아가씨, 야근이 있어 저녁시간에 잠시 나와 책만 사 간다는 직장인, 페북에서만 뵙다가 오프에서 처음 뵈었던 분, 일면식도 없는데도 오시다가 교통사고로 못 오신 분 등 많은 분들의 사연이 있었습니다.

 

책은 넉넉잡아 100권을 준비했는데도, 부족해서 미처 구입하지 못한 분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폭풍 사인을 해드리겠습니다.

 

저의 《남도여행법》 북콘서트가 기존의 출판기념회와 조금은 다르고자 노력했습니다.

 

1. 기차역에서 열린 조금은 이색적인 북콘서트

북콘서트 하면 대개 레스토랑, 카페, 혹은 실내 문화 공간 등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기는데요. 저의 책이 기차여행인 만큼 조금은 특별한 공간을 찾았습니다. 처음엔 한적한 시골 간이역에서 하는 것도 생각했으나 멀리서 오는 분들도 있고, 준비과정이 만만치 않아 경전선 진주역 대합실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조금은 이색적인 장소였습니다. 역에서 북콘서트를 한다고 하니 역에 있는 회의실에서 한다고 생각한 분들도 더러 있었던 모양입니다. 기차가 다니지 않는 저녁 6시 45분과 8시 15분 사이인 7시에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7시 39분에 도착하는 기차가 있었는데, 대합실로 승객들이 우르르 몰리는 순간도 하나의 연출된 장면처럼 재미있었다고들 했습니다.

 

2. 봉투와 화환이 없는 북콘서트

북콘서트에서 유일하게 화분 하나가 딱 들어왔는데요. 행사 당일 경황이 없어 다음 날에야 알았습니다. 처음엔 화분을 돌려줄까도 생각했는데, 아내의 말에 따르면 화환이 아니라 저의 건강을 위해 후배가 특별히 가져온 거라고 강조했다는군요. 해서 화분은 제 서재에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봉투도 몇 개 들어와서 고민이었는데, 다행히 그 액수만큼 책을 가져갔다고 해서 그냥 감사히 받기로 했습니다. 다음엔 앙돼용~~

제가 몸담고 있는 대학의 총장님도 봉투를 보내셨는데요. 봉투 안에 책값 1만 8천원만 들어 있었습니다. 홍보실에서 화환을 안 받는다고 하니 비서실에서 그렇게 책값을 준비했다는군요. 물론 책은 총장님께 잘 전달했습니다. 이런 봉투라면 부담 없이 받을 수 있겠지요. 이번 행사에는 모든 분들이 책값만 내도록 했습니다.

 

3. 식순에서 내빈 인사말 없는 북콘서트

사실 어떤 행사를 가도 제일 지루한 게 내빈 소개와 인사말입니다. 학창시절 교장선생님 훈시만큼이나 지루하죠. 다분히 권위적인 성격이 강한 내빈 소개와 인사말을 이번 북콘서트에서 과감히 뺐습니다. 대신 저자가 참석자 분들을 간단히 소개하는 식으로 했죠. 물론 소개한 사람도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먼 곳에서 오신 분들, 특이한 이력을 가지신 분들, 처음 뵙는 분들을 위주로 소개했습니다. 그렇게 하니 시간절약도 되고 즐거운 행사가 되었습니다.

 

4. 식사 대접 없는 북콘서트

아직도 우리에게는 초청받는 사람만 참석하는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데요. 사실 모든 행사는 초청하는 분들이 참석하는 것이 준비하는 측에서도 편리하고 낭비도 없고 준비를 알차게 할 수 있습니다. 식사 대접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렇게 되면 회비를 별도로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저자나 출판사의 부담이 너무 커서 원래의 소박한 취지가 없어지겠지요. 대신 참석자들의 출출함을 다랠 수 있는 작은 다과를 준비했습니다.

 

5. 뒤풀이와 숙박비용을 저자가 부담하는 북콘서트

소박한 북콘서트인 만큼 참가하신 분들은 책을 읽으실 분들만, 즉 책값만 부담하도록 했습니다. 봉투를 준비하는 등 다른 행사와 같다면 참가하는 이들도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북콘서트에 참석하는 모든 분들이 즐길 수 있도록 뒤풀이 비용과 멀리서 온 분들을 위해 숙박비용을 저자가 내는 걸로 했습니다.

 

경남도민일보에 보도된 <남도여행법> 북콘서트 관련 기사

 

북콘서트는 대략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사회는 경기도 여주에서 도예소를 운영하고 있는 김원주 화가(도예가)가 봤습니다. 포스가 대단한 분이죠. 축가는 <남도기행> 앨범을 낸 가수 김산 씨가, 축시는 양희은의 <한계령> 작사자인 한사 정덕수 시인이 직접 지은 시를 낭송해 주셨습니다(이 글 끝에 시가 있습니다.). 출판사 생각을 담는 집 임후남 대표가 책에 대해 잠시 설명을 한 다음에 저의 짧은 강연이 있었습니다. 전주에서 오신 아동문학가이자 시인이신 소야 신천희 스님의 시 낭송을 끝으로 북콘서트는 끝났습니다. 이윽고 이어진 저자 사인회에서 많은 분들과 눈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촬영은 블로거 보라미랑 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뒤풀이는 치맥집 등지에서 이어졌고요.

 

한사 정덕수 시인의 축시 낭송

 

가수 김산의 축가

 

생각을담는집 임후남 대표

 

 

저자의 짧은 강연

 

아동문학가 소야 신천희 스님의 축시 낭송

 

이번 북콘서트는 여행하는 즐거움, 책 읽는 즐거움, 기차 타는 즐거움을 느끼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가을에는 남도 사진전을 할까 생각 중입니다. 항상 길 위에서 저에게 많은 힘을 주시는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혹시 이번에 부족한 점이 있었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고 다음에 또 좋은 자리에서 뵈었으면 합니다. 참석하신 모든 분들과 비록 사정상 오시지는 못했지만 마음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진은 김대영 님, 이우기 님 제공입니다.)

 

- 끝 -

 

 

 

 


 

 

 

경전선 철길 위에 서면

-김종길 작가의 남도여행법에 붙여

 

정덕수

 

삶이 문 닫은 빈 점포처럼 고단하고

마음이 가야의 운명처럼 흔들리면

봄날 같던 시간으로 떠날 때임을 알자

삼랑진역이나 송정역에서

잃어진 꿈을 이어 줄 기차표 한 장 받으면

그 시절 당당하게 이름 걸고 있던 앵남역에서

하루 몇 번 정차하는 통일호 시간 맞춰

간이역 역장이 되던 그 친구 안부 정도는

바람결에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함초롬 비 젖은 안부를 묻고

바람 부는 들녘을 지나며

갈래머리 고운 소녀들의 추억 하나쯤

기억의 틈에서 꺼내도 좋겠다.

기적 길게 울리며 정차하던 통일호 열차처럼

어느 한 순간 정도는 가슴에 간직했으면

간이역엔 더 이상 기차는 멈추지 않더라도

살뜰한 추억 한 자락 정도야

목 쉰 가락으로나마 들리지 않으랴

 

이 땅 밖으로 벗어나야 여행인 줄 아는

그들에게야 대단할 거 없는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줄 알겠지만

갈비뼈 사이 설렁거리는 바람 한 올 맞이하였을 때

정작으로 소중한 것들을 만날 수 있다네

그때쯤에야 느릿하게 움직이는 경전선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는 남루함이

차고 넘치는 행복인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건 말이지, 행운을 찾아

행복을 짓밟는 어리석음으로

불행을 맞이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과 같은 일

 

청보리 익어가는 들판을 지나

매미 요란하게 울던 숲에 쏟아지는

여름 한 낮의 소나기처럼 들리는

갯내음 물씬한 사투리가 따숩게 하니

억새 하얗게 핀 강변 한달음에 달려와

덥석 안겨 올 것 같은 행복 아니랴

 

다시 한 장의 차표를 받아들고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도 좋을 길을 떠나자

떠나야만 돌아와 다시 만날

그런 행복이 있으니

얼마쯤 느리게 도착하더라도

그게 덜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 있는 길

한 장의 차표만큼 떠나자.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여행 서적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남도여행법

$
0
0

 

 

 

 

 

여행 서적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남도여행법

- 알뜰한 여정을 위한 정보와 감성 충만한 스토리를 함께 담은 책

 

국민일보에서 여행 서적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3권의 책을 소개했는데요. 저의 《남도여행법》과 정여울의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이상헌의 《지극히 주관적인 여행》을 꼽았습니다.

 

기사에서 이들 세 권의 책은 ‘여행 서적의 새로운 트렌드로 알뜰한 여정을 위한 정보와 감성 충만한 스토리를 함께 담은 책들이다’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감성과 정보를 묶은 신개념 여행서적은 그 경계를 지우며 새로운 장르를 만들고 있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다음은 기사의 일부입니다.

 

“본격적인 휴가철을 앞두고 새롭게 출간되는 여행 서적들도 감성과 정보의 두 마리를 잡으려 하고 있다.

 

‘남도여행법’(김종길)을 펴낸 생각을담는집의 임후남 대표는 “느린 여행이라는 콘셉트에 충실한 정보를 담았다”며 “8쪽에 걸쳐 펼쳐진 경전선 열차 시각표를 뒤지는 아날로그적 경험은 스마트폰으로는 느낄 수 없는 여행의 또 다른 맛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경전선 열차를 타고 가면서 마주치는 풍광을 꼼꼼하게 기록하면서도 열차시간표와 노선도, 남도 여행을 위한 팁까지 챙겼다.”

 

 

여행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기사원문보기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지리산의 전설 오지암자를 찾아

$
0
0

 

 

 

지리산의 전설 오지암자를 찾아, 도솔암

 

도솔암은 해발 1200고지에 있었다. 커다란 바위가 병풍처럼 암자를 두르고, 장한 소나무 몇 그루가 든든하게 뒤를 버티고 있는 암자는 아늑하고 넉넉했다. 하늘과 가까운 이 높은 곳에 어떻게 이처럼 너른 마당이 있을 수 있는지. 법당에 절을 올리고 마루를 내려서니 스님이 댓돌 앞에 서 있다.

 

 

“어디서 왔어요?”

“멀리서 왔습니다.”

 

자연스레 대화는 이어졌다.

 

“이곳에선 천왕봉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마당에서 이렇게 지리산 능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드뭅니다.”

 

나중에 스님은 삼소굴에 앉아 내다보는 지리조망이 으뜸이라며 여행자를 방안에 들게 했다. 여행자도 맞장구를 쳤다.

 

 

지리능선을 바라보고 있는 정견 스님

 

“금대지리라 했지요. 금대암에서 보는 천왕봉과 지리능선이 천하제일이라고 하지만 오늘 여기서 보니 이곳의 조망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금대암에서 본 풍경이 장엄하고 화려하다면, 이곳에서 보는 지리능선은 안온하고 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천왕봉, 중봉, 하봉, 그리고 제석봉. 저기 잘록한 곳이 장터목이고, 오른쪽 진한 곳이 세석입니다. 맞아요. 저기 세석 왼쪽에 삐죽 솟은 것이 촛대봉입니다.”

 

스님의 손가락을 따라 지리능선을 더듬듯 살폈다. 제법 너른 안마당 끝으로 천왕봉과 지리능선이 손에 잡힐 듯 아주 가까이 보인다.

 

▲▼ 혜암종정이 쓴 도솔암과 삼소굴 현판

 

 

법당 뒤를 돌아 정견 스님이 말한 전망대로 향했다. 산짐승이나 다닐 법한 오솔길은 좁지만 뚜렷하다. 바람이 쏴 하며 소사나무 가지를 흔든다. 나무꾼들이 다녔다는 산길은 커다란 바위 끝에서 멈췄다. 연둣빛 능선 건너편 산중턱에 영원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영원사가 앉은 자리는 아늑하고 푸근하기 이를 데 없다.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영원사 위쪽 벼랑 끝으로 전각 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인다. 아, 저곳은! 그랬다. 수년 전에 가봤던 상무주암이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정견 스님이 말한 바위에서 본 영원사, 아늑하고 푸근하기 이를 데 없다. 다음 순례지다.

 

상무주암이 벼랑 끝에 희미하게 보인다.

 

“어때요? 멋지지요. 이번에는 저쪽 전망대를 가보시지요?”

 

스님의 말대로 암자마당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오솔길을 따라갔다. 발걸음을 옮기다 ‘아’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마치 비밀의 공간처럼 철쭉과 갖은 꽃나무에 둘러싸인 양지바른 공터가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일산처럼 잘 자란 소나무 한 그루가 반들반들한 공터의 끝에 자리하고 그 앞으로 스님이 늘 좌선하는 작은 평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평상이 향하는 곳은 지리능선,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도의 공간으로 이만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몇 번이나 혼자 감탄사를 쏟으며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정견 스님이 늘 좌선하는 평상에 앉아 본 지리능선. 천왕봉, 중봉, 하봉, 제석봉, 세석고원 등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절간은 고요했다. 삼소굴 툇마루에 걸터앉아 천왕봉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삼소굴은 30여 년 전에 이곳에 들어온 정견 스님이 혜암 종정을 모신 곳이다.

 

“우리 사진 한 장 찍어줘요.”

 

스님이 아이를 불렀다. 이 깊은 산중 암자에 꼬마 아가씨가 오기는 처음이란다. 아이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활짝 웃으며 스님 옆에 섰다.

 

"이번에는 제가 찍어 볼 게요. 거기 한 번 서 보세요. 천왕봉이 잘 나올 겁니다. 저도 예전엔 제법 사진을 찍었습니다.”

몇 번 셔터를 누르더니 카메라에 부쩍 관심을 가지신다. 광각렌즈로 교환하자 스님의 눈이 번쩍인다.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연신 셔터를 누른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맑고 즐겁다. 그 자체로 즐거운 기운이 느껴지고 순진한 웃음이 절로 터져 나온다. 결국 도라는 것도 이 순진하고 맑은 즐거움 아니겠는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암자엔 하늘빛만 선연하다. 암자 마당 끝에는 스님이 패다 만 장작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다. 겨울이 오면 땔감 구하는 게 가장 큰일이라는 스님의 눈빛이 깊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스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니 마음마저 맑아진다. 청담淸談. 이제는 산을 내려가야 했다. 스님께 인사를 하고 산길을 터벅터벅 내려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난다. 스님이다. 지게를 진 스님의 발길이 바쁘다.

 

 

“어디 가시게요.”

“아, 저 아래 누가 물건을 갖다 놓은 모양이오.”

 

그러더니 어느새 앞서간다. 축지법을 쓰는지 상체는 그대로인데, 쓱쓱 발길이 보이지 않는다. 숲길 끝으로 지게만 보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바람이 자작나무를 흔들었다.

 

 

* 도솔암은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 있다. 신라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도솔암은 사명대사의 법제자인 청매 스님이 머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때 불탔던 것을 1986년경 지금의 정견 스님이 혜암종정을 모시고 들어왔다. 도솔암과 삼소굴의 현판은 혜암종정이 썼다. 영원사 뒤쪽 산에는 도솔암을 중건한 청매조사 승탑이 있다. 마천에서 함양읍으로 넘어가는 재가 오도재인데, 청매조사가 도를 깨쳤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서가에 꽂힌 여행 이야기, 남도여행법

$
0
0

 

 

 

 

서가에 꽂힌 여행 이야기, 남도여행법

- 연합이매진 7월호에 소개된 《남도여행법》

 

"이 책은 여행기이자 인문서이고 정보서다."

 

연합뉴스의 월간지인 연합이매진 7월호 이달의 Travel book에서 '사라져 가는 경전선에 대한 기록' 이라는 제목으로 제 책 《남도여행법》을 소개했습니다. 보도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기자가 제 책을 꼼꼼히 읽은 후 지난 6월 인터뷰까지 해서 작성했기에 더욱 만족스럽습니다.

 

 

여행자에게 책은 대리만족의 수단이다.

오감으로 즐거움을 향유할 수는 없지만,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낯선 곳을 간접 체험하고 흥미를 얻을 수 있다.

또 서적은 새로운 여행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할 신간을 소개한다.

 

 

사라져 가는 경전선에 대한 기록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은 물리학에만 적용되는 이론이 아닌 듯하다. 일상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여가 시간에 ‘느림’을 찾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열차 여행이 대표적이다. 철도 여행 마니아들은 고속철도 대신 완행열차를 타고 각지를 누빈다. 그들에게 느린 열차는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기에 더 좋은 수단이다.

 

여행 스토리텔러 ‘김천령’이란 필명으로 알려진 저자는 경전선에 주목했다. 경전선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앞 글자를 딴 노선으로 밀양 삼랑진역을 출발해 800리를 달려 광주송정역에 닿는다. 1903년 공사를 시작해 모든 구간이 개통되기까지 65년이 걸렸다. 완전 개통 이후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경전선에는 여전히 사람 냄새가 나는 열차가 운행된다. 그는 2012년 8월부터 1년 동안 주말마다 경전선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모든 역에 내렸다. 그중에는 대도시의 현대화된 역도 있고, 시간이 멈춘 듯한 간이역도 있었다. 그의 여행은 기차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기차역에서 버스를 타고 조용한 암자를 방문하거나 인심이 푸진 시골 장을 찾았다. 더 이상 승객을 맞아들이지 않는 폐역으로 향했다. 유명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장소에 들러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서민적이고 맛있는 음식도 맛봤다. 경전선처럼 느리고 진득하게 돌아다녔다.

 

책은 여행기이자 인문서이고 정보서다. 각 지방의 문화와 역사를 들여다봤다. 권말에는 경전선의 등록문화재, 접속노선과 지선, 오일장, 열차 운행 시각표 등이 실렸다. 아쉽게도 내년이면 이 시각표는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 광양에서 진주까지 복선 철도가 깔리기 때문이다. 옛 모습이 사라지기 전에 떠나야 할 듯싶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어느 중년의 조금은 특별한 여행

$
0
0


 

 

 

 

 

 

 

어느 중년의 조금은 특별한 여행

 

책이 나온 지 한 달이 되어가면서 여기저기서 리뷰가 많이 올라옵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글은 ‘신의 딸’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어느 중년의 조금은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야기가 잔잔한 울림을 주는군요.

 

 

"그럼에도 걸음은 옛 시간의 흐름에 맞추느라 자연히 느려졌다"(223).
 
책상 속에 사표가 들어 있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 일한지도 20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렇게 훌쩍 흘러가버린 청춘입니다. 돌아보니 바쁘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일상은 미친 속도로 돌아가는데 인생은 오래 전에 일시정지되어 버린 느낌입니다.
 
이대로 살다가는 더 깊은 후회가 남을 것 같아 인생의 하프 타임을 가질 결심을 했습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친구들에게 산티에고로 순례를 가보자고 제안했는데 아무래도 선뜻 나서기가 어려운지 관심을 보이는 친구가 많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일 듯합니다.
 
그런데 우연치 않게 <남도여행법>을 보았는데, 먼 산티에고까지 갈 필요 없이 남도로 순례길을 떠나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관광지를 전투적으로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느린 여행이라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매혹적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느린 경전선"
 
<남도여행법>은 경전선을 타고 남도를 순례하듯이 떠나는 여행법입니다. "경상남도 밀양 삼랑진역에서 출발하여 남도의 구석구석을 800리쯤 돌아 광주송정역에서 멈춘다"는 경전선은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기차라고 합니다. "경정선의 느린 풍경 속에 쉼표처럼 찍혀 있는 역은 모두 60개인데, 60개 중 폐역이 16곳, 기차가 서는 역이 34곳, 기차가 서지 않는 역이 10곳"이라고 합니다. 삼량진에서 광주송정까지 총 300.6km를 1년간 여행한 기록이 바로 이 책, <남도여행법>입니다.
 
저자는 "경전선 여행은 좀 더 느린 방식의 여행, 떠나기만 해도 치유가 되는 여행, 일체의 근심걱정을 떨칠 수 있는 여행"이며, "이 책은 단순한 여행안내서가 아니라 사라져 가는 것들의 기록, 잊혀가는 것들의 기록이다. 로드다큐이자 인문지리서이다. 또한 문화기행서이자 철도여행서이다"라고 소개합니다. 저자의 말처럼 남도의 삶과 역사와 문화를 찾아떠난 로드다큐 같은 분위기가 강합니다. 또한 <남도여행법>은 매끈한 자동차를 몰고 편리하게 옮겨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기차를 타고 내려서 걷고 때로는 버스로 이동하며 다시 또 기차를 타고 그렇게 천천히 이동하며 그곳의 풍경과 사람과 과거와 이야기와 하나가 되는 순례의 길이자, 그렇게 떠난 길 끝에서 또다른 나와 만나게 되는 구도자의 길과 같은 분위기가 짙게 풍깁니다!
 


 

 


 


 

 

부모님 고향이 남도인데도 어쩌자고 그렇게 동해쪽으로만 휴가를 갔는지, 이 땅에 태어나 40년 넘게 발 딛고 살았으면서도 이 책에서 소개하는 곳 중 어느 한 곳도 제대로 가본 곳이 없습니다. 그동안 뭘하면서 살았나 싶습니다.

 

남도 여행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고 펼쳐 들었던 책인데, 남도를 어떻게 여행해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아름다운 사진에 마음이 끌려 가보지 않고 벌써 남도의 풍경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봉하마을에 가서 봉화산을 일러 '낮지만 높은 산'이라고 했던 노 대통령의 말의 의미도 알아보고, 마산역에 내려 예술인촌으로 조성된 골목길도 걸어보고, 함안역에 내려 왁자지껄한 가야시장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함안 말이산 고분군도 찾아보고, 반성역에 내려 줄을 서서 사먹는다는 순두부집에 가서 줄도 서보고, 횡천역에 내려 스탬프도 찍어오고, 순천역에 내려 법정 스님이 계시다는 불일암에도 올라보고, 벌교역에 내려 그 유명한 꼬막도 맛을 보고, 코스모스 축제로 유명하다는 북천역에도 가보고,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이라는 남평역에도 가보고 싶습니다. 아니, 새롭게 길을 낸 이 책을 따라 나도 삼랑진역에서 광주송정역까지 완주를 해보고 싶습니다. 친구와 함께 간다면 이 책에서 알게 된 코스모스의 슬픈 사랑이야기도 들려주고, "논두렁에 덩그러니 버려진 듯 무심하게 서 있다.(232)"는 작은 불상(석조인왕상)도 꼭 찾아 보여주고 싶습니다.
 
언젠가 이유도 없이 끓어오르는 마음의 불안과 격동을 이기지 못하여 춘천행 기차에 홀로 몸을 실었던 20대의 그 어느 날처럼, 나는 또다시 낯선 길로 뛰어들고 싶어집니다. 조금 특별한 여행을 원한다면, 낯선 곳에서 나와 마주할 고독한 시간이 필요하다면, 과거로의 여행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남도여행법>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고요한 사찰, 선원사

$
0
0

 

 

 

 

 

 

남원시 한복판에 자리한 고요한 사찰, 선원사

 

지난 유월, 남원을 다녀왔다. 3일간 남원시내에서 벌어진 춘향제를 보고 마지막 날 선원사에 들렀다. 선원사는 남원 시내 가운데에 있다. 대개의 사찰이 산에 있다는 생각에 도심에서 만나는 사찰은 당혹스럽기도 하다.

 

 

사실 지금이야 선원사가 시내 한가운데인 도통동에 있지만, 예전에는 선원사는 산의 끝자락에 있었다. 만행산의 산기슭에 있었던 절은 도시가 팽창하면서 주위에 집들이 들어서고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다.

 

 

이미 선원사를 몇 차례 다녀갔지만 언제 와도 이곳은 고즈넉하다. 차들이 오가는 도로가 있지만 문을 들어서는 순간 속세와는 단절된 고요함이 깃든다. 가지가 붙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눈길을 끈다.

 

 

‘만행산 선원사’라는 현판이 달린 문을 들어서면 대웅전과 약사전, 칠성각, 명부전 등이 자리한 조촐한 경내가 나타난다. 종으로 배치되어 있는 일반적인 사찰구조와는 달리 선원사는 횡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선원사는 예부터 남원팔경의 하나로 꼽혀 왔다. 남원을 대표하는 사찰은 만복사와 선원사가 있다. 수백의 승려가 아침에 시주 받으러 갔다가 저녁에 돌아올 때의 행렬이 장관인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과 해질녘에 은은히 들려오는 선원사의 종소리를 꼽는 ‘(선원모종禪院暮鐘)’이 그것이다.

 

 

소담한 경내와는 달리 이 작은 절의 속은 옹골차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119호인 약사전과 그 안에 모신 고려시대의 철불인 보물 제422호 철조여래좌상, 전북 문화재자료 제45호 대웅전과 그 안에 있는 조선시대 말기에 만든 전북 유형문화재 제25호인 동종이 있다.

 

 

신라 헌강왕 1년(875)에 도선국사가 세운 선원사는 처음 진압사찰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도선국사가 남쪽의 산천을 유람하다가 남원에 이르러 지세를 살펴보니 객산인 교룡산이 힘이 세고 주산인 백공산이 너무 허약하여, 지세를 돋우고자 선원사를 비롯하여 만복사, 대복사를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선원사가 자리한 백공산은 만행산의 한 줄기에 불과한데 굳이 만행산이라 한 것은 큰 산의 힘을 빌려 교룡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함이었다고 전한다.

 

 

이 유산들만 보아도 예전에는 제법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때 만복사에 버금가는 큰 사찰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만복사와 함께 불타 버린 뒤 1754년(영조 30)에 다시 짓고 철불을 약사전에 모셨다고 한다.

 

 

 

약사전에 있는 철조여래좌상은 높이 1.2.m 정도로 대좌와 광배는 없고 불신만 남아 있다.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금칠을 하여 마치 금동불처럼 보인다. 동종은 대웅전 안에 있는데 높이 66cm 정도로 조선시대의 범종이다.

 

 

대웅전과 약사전은 둘 다 사람 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용마루와 처마의 선이 직선에 가까워 작은 건물임에도 무거운 느낌을 준다. 맞배지붕에 흔히 보이는 풍판이 옆에 달려 있다. 비와 바람을 막기 위한 용도이다. 약사전에는 철불을, 대웅전에는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의 주불을 옮겨 모시고 있다.

 

 

 

그 외에도 괘불이 약사전 뒤에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 앞의 석탑은 1960년대에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선원사는 남원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절이 도시 가운데에 있는 것이 말해주듯 예부터 남원시의 번영은 곧 선원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걸 보여준다.

 

 

 

 

 

 

요사에서 아침 공양을 했다. 깔끔하니 잘 차려진 밥상이다. 공양이 끝나자 잘 우린 돼지감자차를 내어온다. 선원사에서는 청정한 지리산에 돼지감자를 키우고 있다.

 

 

주지 스님인 운천 스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운천 스님은 ‘착한스님짜장’으로 전국 각지를 돌며 짜장 봉사를 하고 있다.

 

 

‘착한스님짜장“ 운천 스님의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집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지리산 산동네에서의 소소한 행복

$
0
0

 

 

 

 

 

 

주말 지리산 산동네에서의 소소한 행복

 

<남도여행법> 북콘서트가 끝나자 몸살이 찾아왔습니다.

책 출간으로 무리를 했던 모양입니다.

 

 

주말,

집에서 쉬고 있는데, 동서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시골집에 놀러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서의 시골집은 지리산 백운동에 있습니다.

몸이 무거웠지만 상쾌한 산 공기를 쐬면 좋지 않겠나 싶어 집을 나섰습니다.

 

 

시골집은 예전의 집을 다시 고쳐 지었는데 아주 예뻤습니다.

구석구석 정성어린 손길이 가 있더군요.

 

 

집구경을 마치고 인근 덕산장에 갔습니다.

오일장이 서지는 않았지만 시골장터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습니다.

 

 

덕산은 작은 면 소재지로 한적하지만 지리산 아래에서는 제법 번화한 곳이기도 합니다.

 

 

철물전에 들러 시골집에 필요한 호미나 낫 등도 샀습니다.

 

 

가끔 이런 난전도 있어 시골 풍경이 더 정겨워 보입니다.

 

 

집에 돌아오니 아이들이 신났습니다.

 

 

물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간식 시간을 가졌습니다.

 

 

덕산장에서 사온 수박과 손두부집에서 가져온 두부 스낵입니다.

 

 

감자도 한 솥 삶았습니다.

 

 

이렇게 간만의 여유를 느끼다 보니 몸살도 어느새 달아난 모양입니다.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서 느긋한 오후를 읽습니다.

세상 부러울 게 없는 하루였지요.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지리산 속 제일의 암자, 영원사

$
0
0

 

 

 

 

지리산 속 제일의 암자, 고승들의 수행처 영원사

 

10시 30분. 허름한 사무실 안, 어두컴컴한 방에서 자고 있던 사내가 부스스 일어났다.

“영원사까진 1만 8천 원입니다.”

나중에 도마 마을로 내려올 거라고 하자 도마 마을에서 영원사까지는 2만 2천 원이란다. 앞선 그를 따라 도마 마을에 일단 차를 세워두고, 마천을 통틀어 세 대뿐인 택시 중의 한 대인 그의 택시를 타고 영원사에 올랐다. 이곳 토박이인 그는 옛 군자사 절터와 하정, 음정, 양정 마을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침 길 공사가 한창이라 하필 바쁠 때 일하는 군청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이 고장에 대해 설명하는 걸 잊지 않았다.

“좋은 산행 되세요.”3만 원을 건네자 그가 내민 거스름돈은 6천 원이었다. 아까 2만 2천 원이라고 하지 않았냐고 되물었더니 거스름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음에 만나게 되면 2천 원을 주겠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건성으로 말했다. 대개 거스름돈이 없으면 ‘다음에 만나면 주세요.’라고 하는 게 도리인 듯한데 사내는 언제 만날지 알 수 없는 이방의 손님에게 다음에 받아가라는 특이한 셈법을 구사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리산 속 제일의 절

영원사는 해발 900미터가 넘는 곳에 있다. 입구는 호로병의 목처럼 좁지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탁 트인 공간과 마주치게 된다. 뒤로는 산이 푸근하고 앞으로는 산봉우리가 멀찌감치 감싸주는 양지바른 곳이다. 전망 좋고 햇빛이 넘치는 고요한 땅, 수행처로는 이만한 곳이 없겠다 싶다.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에만 해도 100여 칸이 넘는 아홉 채의 건물이 있었던 제법 큰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전각 몇 채가 전부다. 그래도 풍경만큼은 넉넉하고 평온하다. 이곳을 찾은 옛 선현들의 눈에도 영원사는 산중의 깊고 고요한 암자였던 것 같다.

 

 

지리산을 유람하고 <유두류산록>을 남긴 유몽인은 1611년(광해 3) 4월 2일에 갈월령을 넘어 영원사(영원암)에 이르게 된다. 지금의 영원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여길 정도로 그는 당시의 영원사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다시 지친 걸음을 옮겨 영원암에 이르렀다. 영원암은 고요한 곳이다. 높은 터에 시원하게 탁 트인 곳이어서, 눈앞에 펼쳐진 나무숲을 내려다보았다. 왕대나무를 잘라다 샘물을 끌어왔는데, 졸졸졸 옥 구르는 소리를 내며 나무통 속으로 흘러내렸다. 물이 청량하여 갈증을 풀 수 있었다. 암자는 자그마하여 기둥이 서너 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깨끗하고 외진 것은 사랑할 만하였다. 이곳은 남쪽으로는 마이봉을 마주하고, 동쪽으로는 천왕봉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상무주암을 등지고 있다.”

 

 

유몽인보다 앞선 1580년(선조 13) 4월 6일에 영원암을 찾은 변사정도 <유두류록>에서 “산이 깊어 세속과는 단절되었는데, 푸른 회나무와 초록 단풍이 비단을 펼친 듯 사람을 가로막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보다 한참 뒤인 1910년 3월 18일에 영원암에 오른 배성호는 <유두류록>에서 “한 줄기 조계(漕溪)는 아홉 굽이 계곡을 울리고, 골짜기를 가득 메운 등나무 그늘은 빽빽하여 마치 푸른 연기 같았다. (…) 뒷산은 날개를 펴서 에워싼 듯하고, 앞의 봉우리는 병풍을 두른 것 같아 조용하고 밝았다.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았는데, 방호산 만 겹의 봉우리들이 한 손에 잡을 수 있을 듯하였으니, 과연 산 속 제일의 절이었다.”고 영원사를 묘사하고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영원동, 둔자사, 유점촌을 남사고(조선 중기의 학자로 풍수학에 조예가 깊었다.)가 ‘복지’라 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렇듯 영원사는 풍수적으로 빼어난 땅으로 수행하기에 좋은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지리산 속 제일의 절이었다.

 

 

그럼에도 이 높은 곳까지 오르기는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도 양정 마을에서 한 시간 남짓 가파른 산길을 오르거나 차 한 대 겨우 지날 급경사의 길을 한참이나 올라서야 영원사에 이를 수 있다. 1869년 2월에 지리산을 유람한 송병선은 <지리산북록기>에서 아직 눈이 쌓여 있는 상봉을 보며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영원암을 찾아가 볼 수 없음을 탄식했으며, 1902년 40일간 지리산을 유람한 송병선의 아우 송병순은 <유방장록>에서 다리의 힘이 소진되어 매우 그윽하고 깊숙한 영원암을 갈 수 없는 아쉬운 심정을 토로했다.

 

 

담박하고 고요한 기풍이 길이 이어진 고승들의 수행처

법당을 찾았다. 인기척이 없다. 늦은 봄날의 나른함이 법당 깊숙이 들어왔다. 영원, 이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절 이름이 어째서 영원사일까. 모든 것은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으니 나 또한 없는데, 영원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여기에 실마리를 준 분이 있으니 경암 응윤 스님(1743~1804)이다.

 

 

“나는 이와 같이 보았다. 영원암의 담박하고 고요한 기풍이 예로부터 지금까지 길이 이어진 것을. 티끌 세상에 묻혀 살던 중생들, 메마른 마음이 모두 소생하리라. 이 문 안으로 들어온 자는 마땅히 번뇌를 내려놓고 평안히 수양하리니, 어찌 굳이 서방정토로 왕생할 필요가 있으랴. 이 법당으로 들어온 자는 곧 여래를 친견하리니, 어찌 굳이 다른 부처를 별도로 염불하리. 오랜 세월 이루어지고 사라진 것들, 얽히고 얽힌 공적과 허물, 모두 영원(靈源)의 그림자에 불과하리. 미혹되는 허상과 묵은 자취는 모두 이 영원 속에 있는 사람과 상관없는 일, 그러므로 ‘모든 상(相)은 실제의 상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눈으로 보고 소리로 구하는 것은 모두 삿된 행위이다.”

 

 

응윤 스님은 <경암집-영원암 설회 사적기>에서 영원암은 1722년 화재로 소실되어 고찰할 수 있는 사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절의 유래를 옛날 조사 영원이 이 암자에 주석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만수동 가장 깊은 근원에 있다 하여 ‘영원암’이라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만력연간(1573~1619)에 부용 영관, 청허 휴정, 청매 인오 세 분 조사께서 서로 이어 주석하며 득도했다고 덧붙이며 이로 인해 영원암의 이름이 더욱 드러났다고 했다.

 

 

한편 영원사는 신라 경문왕 때 영원조사가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나 이를 뒷받침할 문헌과 유물도 없을 뿐더러 영원조사는 경상도 함양 사람으로 조선 중기의 스님이다. 10세 때 범어사에서 출가하여 재물에 욕심이 많은 스승을 떠나 금강산 영원동에서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었으며 만년에 지리산으로 들어와 이곳 영원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기록으로 보아 영원사는 조선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1610년(광해 2)에 박명부, 정경운 등과 지리산을 유람한 박여량은 <두류산일록>에서 “서쪽으로 1백여 리쯤 되는 곳을 바라보니 새로 지은 두 절이 있는데, 무주암 서쪽에 있는 절을 ‘영원암(靈源庵)’이라 하고, 직령 서쪽에 있는 절을 ‘도솔암(兜率菴)’이라 하였다. (…) 사찰로서 말한다면 금대암, 무주암, 두류암 외에 영원암, 도솔암, 상류암, 대승암 등은 예전에 없었던 절이다.”라고 했다. 이보다 앞선 1580년(선조 13) 4월 6일에 변사정이 영원암을 찾았다는 기록이 <유두류록>에 있는 걸로 보아 이때쯤 영원암(영원사)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영원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승들의 방명록이라 할 수 있는 <조실안록(祖室案錄)>에는 부용 영관, 청허 휴정, 사명 유정, 청매 인오 스님 등 109명의 고승들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만 해도 100칸이 넘는 아홉 채의 전각이 있었던 영원사는 1948년 여순사건 때 소실되었다가 1971년 상무주암에 머물던 김대일 스님이 복원하였다고 한다.

 

 

해우소 옆의 고목은 그대로였다. 수년 전에 봤던 널찍한 바위도 그대로 있었다. 다만 평평한 바위에 올려놓았던 그릇이 없었다. 다람쥐가 절간을 드나들며 시나브로 먹었던 넙데데한 밥그릇. 어디로 갔을까. 그때의 보살님도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절에 나오시지 않는 걸까. 절간은 너무나 고요했다. 마음씨 좋은 보살님이 산짐승과 다람쥐를 위해 매 끼니때마다 내놨던 보시그릇이 지금은 없어졌다.

 

 

 

여행자가 다가가도 먹는 데에만 집중했던 다람쥐는 전혀 놀라지도 않았었다. 다람쥐의 눈에는 낯선 사람도 자신에게 밥을 주는 보살님처럼 선한 존재로 보였으리라. 깨우침을 얻고자 하는 수행자의 육바라밀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보살님은 몸으로 행하고 있었다. 절의 오랜 역사와 이곳을 거쳐 간 고승들의 행적도 대단하지만 이 작은 보시그릇이 주는 울림은 컸다. 보살님도, 다람쥐도, 밥그릇도 보이지 않는 오늘, 빈 바람만 절 기둥에 기댄 스님의 지팡이를 흔든다.

 

 

졸졸졸 물소리가 났다. 상무주암 가는 길로 들어섰다.

 

 

지리산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였던 마천면 삼정리 일대는 최근 들어 찾는 이들이 부쩍 늘고 있다. 인근 백무동의 명성에 가려 있다가 지리산자연휴양림이 생기고 벽소령으로 오르는 산길로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면서부터다. 삼정리를 대표하는 것은 ‘칠암자 순례길’이라 부르는 산길이다. 지리산 중북부능선 자락에 도솔암,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사, 약수암, 실상사 등 일곱 개의 암자와 사찰을 잇는 산길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영원사는 이 ‘칠암자 순례길’의 베이스캠프 같은 역할을 한다. 도솔암이 출입금지 구역인 탓도 있지만 대개의 산행 코스는 영원사에서 출발하여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사를 거쳐 도마마을로 하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솔암에서 실상사까지의 일곱 암자를 모두 순례하는 당일 코스는 건각이 아니라면 힘들기 때문이다. 하루 만에 이 일곱 개의 암자와 절을 둘러볼 수는 있겠으나 자신을 찾아가는 사색과 순례가 목적인 이 길에서 굳이 속도를 다투는 세속의 시간으로 무리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영원사에서 삼불사, 삼불사에서 약수암까지 산길이 개방되어 가파른 견성골을 내려가서 다시 약수암을 오르는 번거로움은 없어졌다.

 

 

청매조사 승탑이 영원사 오른쪽 능선 솔숲에 있다. 예전 이 승탑은 영원사 동쪽 능선에 있었는데 환하게 빛을 발해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신도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뒷날 승탑을 영원사에 가까운 아래쪽으로 옮겼더니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매조사 인오는 휴정 서산대사의 법제자로 선풍을 날린 스님으로 유명하다. 인근 도솔암도 청매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중국을 거쳐 인도까지 간다는 착한스님짜장

$
0
0

 

 

 

중국을 거쳐 인도까지 간다는 ‘착한스님짜장’

- ‘착한스님짜장’ 남원 선원사 운천 스님을 만나다

 

 

지난 유월, 춘향제가 열리는 남원을 찾았다. 축제도 축제거니와 조금은 색다른 만남, 세간에 ‘착한스님짜장’으로 알려진 운천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선원사를 몇 번이나 들렀지만 스님이 짜장 봉사를 한다는 걸 알게 된 건 작년인가, TV와 언론보도를 통해서였다. 그때만 해도 스님을 뵈었지만 별도로 여쭙는 일은 없었다. 처음엔 다만 그러려니 했지만 스님의 짜장 봉사는 중단 없이 4년째 이어졌고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과연 무엇이 스님에게 짜장 봉사에 매진하게 했는지 그 궁금증을 이길 수 없어 스님이 계신 선원사를 다시 찾았다.

 

운천 스님이 주지로 있는 선원사는 예전 남원 팔경의 하나로 이름난 절이지만, 지금은 남원 시내 한복판에 있는 조용한 사찰이다. 공양주가 정성스레 차린 아침 공양을 한 뒤 시원하게 내어놓은 돼지감자차를 한 잔 마시며 스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6월 춘향제 기간 동안의착한스님짜장, 초등학생과 군인, 성직자, 외국인은 무료로 먹을 수 있었다.

 

- 지금 짜장 봉사를 4년째 하고 계시죠?

4년이 넘었죠.

 

- 짜장면을 봉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지요?

저는 고향이 수원인데, 어머니 고향이 전남입니다. 어렸을 때 역 근처에 살았는데 어머니께선 행상을 하시는 분들을 집으로 모시고 와서 재이고 먹이고 했어요. 그 기억들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편안히 잘 사는 것 같아요. 여기 와서 무엇을 시작할까 하다가 스님들이 면을 좋아하고 대중들도 좋아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짜장면 봉사를 4년 넘게 해온 남원 선원사 주지 운천 스님

 

- 짜장 봉사를 하면서 가장 뿌듯했을 때는 언제였나요?

요새는 주로 교도소를 많이 다닙니다. 교도소는 인원이 많아요. 많은 데는 삼천 명, 적은 곳은 2천 몇백 명인데, 그분들이 하는 얘기가 전체 수용자들에게 짜장면을 먹이기는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분들은 돈이 있어도 사먹을 수가 없는데 맛있게 먹고 고맙다는 얘기를 소장이나 직원들에게 들을 때 뿌듯하고 좋습니다.

 

▲ 남원 선원사에서 '착한스님짜장' 운천 스님을 만났다.

 

- 짜장 봉사를 하면서 어렵고 힘든 점은 없었는지요?

글쎄요. 지나고 나니까 그런 것들은 잘 모르겠고…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근데 안타까운 것은 같이 해 오신 분이 계속 그런 마음으로 처음과 끝이 이어졌으면 좋은데 하나둘 떠날 때 조금은 마음이 그렇죠. 일이라는 게 그렇더라고요. 일체유심조라고, 마음만 가면 다 되는데 그 마음이 안 가서 못하는 것 같아요.

 

 

- 봉사를 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나 봉사를 하면서 만난 분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은요?

한번은 전라북도 도청에 갔더니 도지사실에서 그런 제기를 하더라고요. 위도에 짜장면 집이 없다고 거기를 한 번 가서 해주면 어떻겠느냐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거기를 가기로 했는데, 네 번 만에 겨우 갔어요. 날짜를 잡고 가려고 하면 파도 때문에 배가 못 뜨고, 근데 거기 갔던 게 제일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그리고 경치가 너무 아름답더라고요.

우리가 한 달에 한두 번씩 부산 구서역에 가는데 한 노보살님이 짜장면을 드시면서 우시더라고요. 할아버지가 짜장면을 참 좋아하는데 몸이 아파서 못 나오신다고, 할아버지 생각하면서 우시기에 마음이 짠했던 기억이 남습니다. 아버지 생각도 나고요.

 

 

- 짜장 봉사를 하시려면 재료비 등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마련하나요?

선원사에서 돼지감자를 재배해서 판매한 수익금으로 비용을 마련합니다만, 그것으로는 부족해요. 출가하기 전에 형님이라 그러죠. 친형이 도움을 많이 주고요. 고등학교 동창도 있고요. 힘들 때 연락하면 그 두 분이 도와주십니다. 사업을 하고 있는데, 잘 돼요. 작년에 그 친구가 2천만 원 기부를 했어요. 수원 시민에게 짜장면 2만 그릇 해주라고요. 그래서인지 3개월 만에 진급을 했다네요. 부장으로. 하하하. 지점장에서 7백 개 지점을 관리하는 부장으로 진급해서 오히려 저에게 고맙다고 하죠. 올해도 3천만 원 지원해줬답니다.

 

 

- 한 번에 만드는 짜장면의 양은 보통 어느 정도 인가요?

짜장면을 가장 적게 만들었을 때는 30인분, 가장 많이 만들었을 때는 4500인분을 만들어 봤습니다. 성동구치소는 2500인분을 혼자 했어요. 대전교도소 같이 큰 곳은 인건비를 주고 두세 명을 데리고 갑니다.

 

 

- 준비과정과 소요시간은요?

작년에 MBC뉴스 앵커 출동에 나갔는데요. 신동호 아나운서가 저에게 꼭 방송에 나왔으면 좋겠다 하기에 저는 방송은 싫다며 나가야 되는 세 가지 이유를 대라고 했지요. 성직자가 한 장소에서 하는 경우는 많은데, 전국적으로 한 달에 10번 이상 꾸준히 나가는 사람은 저밖에 없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요. 대개 돈을 주고 재료비를 사서 하는데 저처럼 농사를 지어서 하는 사람이 두 번째 이유였지요. 나머지 하나는 기억에 나지 않는데요. 직접 농사를 지어서 하니 농사짓는 시간까지 합치면 3월부터니까 짜장면을 준비하는 기간이 꽤 길죠. 농사는 양파, 감자, 무, 배추, 파, 깻잎 등 한 열 가지 넘게 농사를 짓죠. 작년에 6군데 4000평정도 지었지요. 4000평이라 하더라고 몇백 평씩 떨어져 있다 보니 참 힘들어요. 얼마 전에 청송교도소를 갔다 왔는데, 마침 청송에 가니까 땅이 몇만 평 있다는 거예요. 그걸 위탁을 받아서 한 군데서 농사를 지으면 더 많이 봉사할 수 있고 일하기도 수월하지 않을까 싶네요.

 

 

- 왜 하필 짜장면인가요?

저만의 추억인지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 짜장면이 워낙 귀해서 그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어요. 그리고 스님들이 면을 좋아해요. 절에서는 매일 똑같은 밥에 반찬을 먹다가 면이 나오면 스님들이 입가에 절로 미소를 짓죠. 처음에는 50인분 100인분 정도였는데, 이제는 몇천인분이죠. 짜장면은 쉬운 것 같아도 중국집에 가지 않으면 개인적으로 먹기 힘들잖아요. 다른 메뉴로는 여름에는 냉짬뽕, 겨울에는 짬뽕을 생각하고 있어요.

 

 

- 체력관리를 별도로 하시나요?

이런 게 있더라고요. 일이라고 생각하면 체력이 들어가고 힘들겠지만요. 즐겁게 하면 힘든 줄 모르겠더라고요. 단지 운전이 힘들어요. 다른 건 힘든 건 없어요.

 

- 운전이 힘드시나요?

봉사가 있는 날이면 보통 새벽 5시에 절에서 출발을 해요. 온종일 봉사를 하고 돌아오면 대여섯 시에요. 거의 길 위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셈이죠.

 

 

- 주로 교도소를 많이 가시는데요. 재소자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굉장히 좋아합니다. 평소에 먹을 수 없으니까요. 그분들이 먹는 것은 대개 컵라면 등인데요. 생면을 바로 뽑아서 하니까 살아 있으니 굉장히 좋아하죠. 근데 모르겠어요. 우리나라 교도소가 문이 높아요. 계속 가고 싶은데, 문을 잘 안 열어줘요. 직원들이 번거로워서 그러가 봐요. 외부에서 사람이 들어오고 특별한 음식이라 신경이 많이 쓰이나 봐요. 직원들이 잘 오케이 안 해요. 교도관들은 조금 싫어하는 것 같아요. 또 종교적인 문제도 있는 것 같고요. 불교보다는 기독교나 타 종교가 많으니까요. 사실 이런 일은 종교를 초월해야 되는데, 저는 불교기관에만 가지 않습니다. 기독교든, 천주교든 원불교든, 원하고 부르면 다 갑니다.

 

 

- 결국 지금 스님께서 하시는 일이 어떻게 보면 사회복지에 관한 일인데, 우리나라 사회복지 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했는데, 제가 복지관이라든가 이런 데를 나가보면 우리나라 복지는 조금 문제가 있는 같아요.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면요. 보통 종교단체에서 복지관을 시 등에서 위탁을 받아 운영을 많이 하는데 자립을 다 해야 돼요. 예를 들어 인건비 정도는 나라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어도 다른 비용은 보통 한 10%정도를 부담하고 있는데, 차차 늘려가서 자립해야죠. 나랏돈으로 봉사를 한다는 것, 엄밀히 말하면, 봉사라는 의미하고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모든 복지관이 다 자립을 해서 전 국민이 보편적 복지로 다 이용할 수 있게 해야지, 일정한 사람들만 이용하는 건 잘못된 것 같아요.

 

 

 

 

- 스님께서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은요?제가 얼마 전에 팽목항에도 짜장면 해주러 갔다 왔는데요. 그걸 바라보면서 느꼈던 게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는 많이 발전했는데, 내면적으로는 굉장히 아픔을 깔고 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게 참 안타까워요. 아름다운 세상을 서로 주고받으면…. 우리 민족이 참 대단한 민족이잖아요. 제가 싱가포르에 유학 갔을 때 교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민족이 한국 사람, 한민족이라 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IMF 터졌을 때를 이야기하더라고요. 서민들이 집안에 있는 금을 꺼낼 수 있는 민족은 우리 한국 사람밖에 없다는 거였죠. 근데 경제가 나아지면서 사람들이 마음이 넓어져야하는데 더 좁아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타까워요. 국민들뿐 아니라 정치인, 성직자들 다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지도자들이 먼저 기부하고 베푸는 문화가 되었으면 해요. 스님들이 먼저 보시하는 거로 바뀌어야겠죠. 베풀고 사는 백의민족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6월 춘향제 기간 동안 운천 스님을 돕고 있는 아동문학가 소야 스님

 

- 지금까지 봉사한 짜장면의 길이를 다 합치면 얼마나 될까요?

한 7만 그릇 가까이 돼요. 한 번 재보려고요. 기록은 해 뒀습니다. 그거 참 재밌겠네요.

 

 

 

 

- 앞으로의 봉사 계획은요?

보통 우리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왔잖아요. 중국 조선족들이 많이 있는 연길에 교도소가 있다고 하는데 연길에서 짜장 봉사를 시작해서 중국 교도소라든가, 인도까지 가서 짜장면을 직접 해줬으면 하는 게 꿈이고 계획입니다.

 

소야 스님과 운천 스님

 

이로써 운천 스님과의 인터뷰는 끝이 났다. 인터뷰 내내 막힘이 없었다. 최근에 방송출연을 많이 한 것도 있겠지만, 거침없는 당당함, 자긍심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겠다. 보시, 무언가 준비 된 후에, 그리고 이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욕구가 있다면 제대로 되겠는가. 자신의 모든 걸 비우니 비로소 채울 수 있는 것이다.

 

 

▲필자의 <남도여행법> 북콘서트에서 축시를 낭송하고 있는 소야 신천희 스님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천하제일의 참선암자, 상무주암

$
0
0

 

 

 

 

 

 

화엄사도 기이함에선 여기 못 따라갑니다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③] 칠암자 순례길, 삼정산 상무주암

   

 

영원사의 사립문을 벗어나면 상무주암 가는 길이다. 이제부턴 그 흔한 세속의 찻길도 없이 오롯이 발품으로만 다녀야 하는 산길이다. 능선을 오르는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바위돌길을 한참이나 올라야 하는 비탈길, 시쳇말로 ‘된비알’이다. 산성의 석문처럼 우람한 바위가 버티고 있는 비티재까지는 숨이 깔딱깔딱 차오르는 길이지만 짙은 녹음과 아름드리 신갈나무 숲이 잠시 가픈 숨을 멈추게 한다.

 

 

암자로 가는 길

고개를 오르자 길은 평탄해진다. 황홀한 들꽃이 지천에 피어 있고 싱그러운 흙길에 발걸음이 상쾌하다. 가지 사이를 비집어 내리쬐는 햇빛에 산길은 한층 부드러워진다. 1000고지가 넘는 산중은 봄날이 낳은 꽃들로 곳곳이 선경이다. 눈부신 햇살, 가지를 흔드는 바람에 온몸이 청량해진다. 이 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진다. 산 능선을 따라가는 길은 전망도 좋거니와 산죽과 소나무, 바위가 절묘하게 어울리는 매혹적인 오솔길이다.

 

 

상무주암 못 미친 곳, 벼랑 끝 고대가 있다. 10여 명은 족히 앉을 너럭바위 끝으로 쓰러진 고목 한 그루. 그 너머로 천왕봉에서 벽소령으로 이어지는 지리 능선이 손에 잡힐 듯 아스라이 펼쳐지고, 장한 노송 한 그루가 위태하게 서 있다. 일산처럼 펼쳐진 소나무 가지 아래로 방금 지나온 산 능선이 부드럽게 펼쳐지고, 연둣빛 양탄자 깔린 숲에 불쑥 솟은 기암과 소나무 두 그루가 한 폭의 산수화처럼 다가온다. 가까운 산자락의 잘록한 능선 너머로는 희미하지만 장대한 산 능선이 아득히 물결을 이루어 신비감을 자아낸다.

 

 

고개를 넘자 울창한 숲 사이로 집 한 채가 언뜻 보인다. 상무주암上無住庵이다. 아, 이렇게 느닷없이 나타난단 말인가! 움막처럼 얼기설기 엮은 허름한 산중의 해우소 위로 예전에 보이지 않던 남녀로 구분한 신식 화장실도 보인다. 왼편에는 마대로 출입문을 만든 남자 전용 소변기도 보인다. 산중 암자의 토굴 같은 곳, 하얀 소변기가 낯설다.

 

 

암자는 입구부터 소란스러웠다. 적막 같던 예전의 풍경이 아니었다. 암자 한쪽 평평한 곳에는 앞서가던 등산객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암자 아래로 깎아지른 산비탈에 층층 펼쳐진 텃밭은 지리산 능선에 묻힌 듯 아득하다. 보살 아주머니들이 분주히 오가고, 마당에는 초파일을 앞두고 인근 함양에서 온 듯한 대여섯 명의 신자들이 노스님 주위에 서 있었다.

 

 

“들어가도 되겠는지요.”

 

제주도의 정낭처럼 굵은 나무 두 개를 걸쳐 놓은 입구에는 ‘사진촬영금지, 출입금지’ 글씨가 선명했다.

 

“아, 저는 주인이 아니오. 저기 스님한테 여쭈어 보시오.”

그제야 암자에서 양치질을 하며 나오는 스님과 눈길이 마주쳤다.

 

 

 

“들어오시오.”

 

지리산의 은자 현기 스님이다. 스님은 이곳에서 30년 넘게 수행을 해온 선승이시다. 30여 년 동안의 은둔 수행에서 벗어나 2013년 처음으로 산문을 나와 서울 조계사에서 대중법문을 해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었다. 수년 전에 뵈었을 때보다 세월이 보였지만 눈빛은 여전히 형형했다.

 

암자 마당에는 봄빛이 넘쳤다. 경봉 스님이 쓴 ‘상무주上無住’ 현판이 선연하다. 비좁지만 햇살이 골고루 비추는 암자 마당. 각운 스님의 사리를 모신 작은 삼층석탑이 불안정하다. 탑을 살짝 돌아가니 제법 널따란 공간이 있다. 평상 하나와 빨래줄, 나무에 매단 철봉과 녹슨 아령. 수행과 휴식, 빨래를 널 수 있는 이 공간이 한없이 넓어 보인다.

 

 

이번에는 마당을 가로질러 반대편 바위에 올랐다. 법당 옆 벼랑으로는 작은 산신각이 있고, 솥을 내건 오솔길 끝에는 초입에 봤던 건물이 한 채 있다. 마당 가운데에는 차를 마시거나 좌선하기에 맞춤인 잘생긴 바위 하나가 있고 그 옆으로 평상 하나가 놓여 있다. 법당 앞 댓돌에 서서 햇빛 넘치는 암자 마당을 지그시 바라본다. 경계를 지은 듯 짓지 않은 담장 너머로 펼쳐진 연둣빛 산자락과 반야봉으로 치달리는 지리 능선을 보는 맛이 그윽하니 깊다. 모나지도 둥글지도 않은 반야봉, 번뇌와 무지를 단박에 깰 지혜의 봉우리를 바라보는 이곳이 ‘천하제일갑지’로 불린 이유를 알 듯하다. 향일암에서 왔다는 노스님이 문득 뜰에 서 있는 불자들에게 ‘무주’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침묵이 흘렀다.

 

 

천하제일의 참선하기 좋은 곳

상무주암은 예전 무주암으로 불렸다. ‘무주(無住)’는 《금강경》의 <장엄정토분>에 나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基心)‘에서 따온 말로,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라’는 뜻이다. 달마 이후 선불교의 중흥조로 숭앙받고 있는 육조 혜능선사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봉양하던 일자무식의 나무꾼이었다. 어느 날 주막에서 나무를 팔고 문을 나서다 어느 객승이 외는 금강경의 이 구절을 듣고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출가하여 오조 홍인대사를 찾아가게 된다. “무주란 사람의 본성이 찰나마다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찰나마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도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한 찰나라도 얽매이게 되면 모든 찰나에 얽매이게 되니, 이것을 속박이라 한다. 모든 것에서 어떤 찰나에도 얽매이지 않으면 속박이 없으니, 그래서 무주를 근본으로 삼는다.”- <돈황본 육조단경>

 

 

상무주암이 언제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기록도 보이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보조국사 지눌이 1198년부터 1200년까지 이곳에 머물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198년 봄 지눌은 몇 사람의 선려(禪侶)와 함께 가사 세 벌과 바리때 하나만 달랑 갖고 이곳 상무주암으로 들어왔다.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비명>에는 상무주암을 “경치가 그윽하고 고요함이 천하에 으뜸(甲)이니 참으로 참선하기 좋은 곳”이라고 적고 있다.

 

1188년 31세였던 지눌은 대구 팔공산 거조암에서 정혜결사를 결성했다. 그런 그가 꼭 10년 만인 41세에 왜 이곳 지리산 상무주암까지 왔을까? 그 이유로 “보문사에서 지낸 이후 10여 년이 지났는데, 비록 뜻을 얻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허송한 적이 없으나 아직 정견(情見)이 사라지지 아니하여,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에 걸려 원수와 함께 있는 것처럼 항상 꺼림칙해서”라고 했다. 스님은 여기서 모든 바깥 인연을 끊고 오로지 선에만 몰입했다. 갈고 닦아 예리한 지혜를 발하며, 깊이깊이 잠심하여 궁극의 근원까지 속속들이 파고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혜보각선사의 어록을 보다가 "선이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반연(攀緣)에 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그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이나 날마다 반연에 응하는 곳이나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고 참선하지 않아야만 홀연히 눈이 열리어서 이것이 다 집안의 일임을 알 수 있느니라."라는 구절에 이르러 뜻이 딱 들어맞아 마음에 깨달으니, 자연히 가슴이 후련해지고 곧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지리산 생활 3년을 끝낸 그는 은둔적 분위기를 벗고 대중과 함께 호흡할 곳을 찾아 나섰다. 예전의 정혜결사가 속세의 명리만을 버리려던 구도결사였다면 이제는 속세에 물들지 않고 현실과 직면하여 현실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행도결사 단계로 나아가는 계기를 이곳에서 고민하고 설계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송광사의 전신인 조계산 길상사에 자리를 잡아 정혜결사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여나갔다.

 

 

천지의 신이 솜씨를 아끼지 않은 암자

예부터 지리산에서 장엄하고 화려함은 화엄사가 제일이고, 맑고 깨끗함은 금대암과 벽송암이 제일이고, 기이하고 빼어남은 칠불암, 불일암, 무주암이 제일로 알려져 왔다. 이처럼 기이하고 빼어남이 으뜸인 상무주를 풍수가들은 ‘어린 송아지가 어미를 돌아보는 형국’이라고 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봉우리들이 병풍을 둘러친 듯, 깃발이 사방에서 나부끼는 듯한 이곳은 이미 제일의 선방 터였다. ‘형체를 잊고 깨달은 사람이 아니면, 이곳에 거처할 수 없다‘고 했을 정도로 천하제일의 참선하기 좋은 곳이 상무주암이었다.

 

 

상무주암은 또한 신성한 외경의 대상이었다. 1860년에 무주암 일대를 유람한 하달홍은 ‘무주암은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무주로 이름 지었으며 최고의 뜻이다. 하늘 위로 솟구친 암자를 둘러싼 봉우리는 가파르고 뾰족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외경심을 갖게 했다.’고 한 뒤 ‘천지의 신이 이곳을 만드는데 솜씨를 아끼지 않은 듯하다.’라고 적고 있다.

 

스님과 불자들이 옆 동산으로 가자 암자는 텅 비었다. 가만히 암자 마당을 거닐었다. 고요한 법당. 천왕봉의 신이 신력으로 뚫었다는 샘물이 돌구멍에서 솟아났다.

 

 

 

상무주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의 <지리산일과>에 전해진다. 1487년 10월 2일, 지리산을 유람하던 남효온은 의신암에 이르렀다. 서쪽 방에 있는 승려 상(像)을 보고 한 승려에게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는 (허풍이 심해 보이는) 승려에게서 상무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분은 의신조사인데, 이곳에 이르러 도를 닦았습니다. 도가 반쯤 닦여지자, 이 산의 천왕이 조사에게 다른 곳으로 옮겨가길 권했습니다. 그리고는 천왕은 스스로 초료새(뱁새)가 되어 길을 인도했고, 선사는 따라갔습니다. 큰 고개에 이르자 초료새가 수리새로 변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고개를 초료조재라고 부릅니다. 수리새가 또 길을 인도하여 하무주(下無住) 터에 이르렀습니다. 선사가 말하기를 ”이곳에서는 며칠이면 도를 이루겠습니까?”라고 하니, 수리새가 “21일이면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선사는 너무 더디다고 여겼습니다. 선사는 다시 중무주(中無住) 터에 이르렀습니다. 선사가 말하기를 “이곳에서는 며칠이면 도를 이루겠습니까?” 라고 하니, 수리새가 “7일이면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선사는 그것도 더디다고 여겼습니다. 수리새는 또다시 상무주(上無住) 터로 인도했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수리새가 말하기를 “이곳에서는 하루면 도를 이룰 수 있으나, 여인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선사는 그곳으로 들어가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승명을 바꾸어 무주조사라 했습니다.” 여기서 하무주, 중무주, 상무주는 깨달음의 단계를 상징하는 말로 보인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절로 도가 트인다는 수행처로 그만인 문수암

$
0
0

 

 

 

 

 

 

수행처로 그만인 암자, 절로 도가 트입니다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④] 칠암자 순례길, 문수암

 

상무주암에서 문수암 가는 길은 평탄하다. 내면에 집중해서 걷을 수 있는 길. 그러다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오솔길. 얼마간 걸으니 바위 벼랑 아래로 맑은 샘이 보인다. 여기서 다리쉼을 해도 좋겠지만 문수암이 지척이라 그냥 스쳐간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편 언덕에서 한줄기 빛이 어둑한 숲속을 환하게 비춘다. 마치 삼천대천세계를 비추듯. 순간 사방이 환해지더니 앞이 탁 트인 전망이 나타났다. 언덕처럼 불쑥 솟은 평평한 땅을 둘러싼 나무 몇 그루, 그 사이로 아스라이 펼쳐진 장대한 능선 물결에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이야!’

 

 

감탄도 잠시,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 이번에는 벼랑 끝에 매달린 집 한 채가 아득하다. 초록색 지붕에 갈색 벽을 두른,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퇴락한 건물 한 채. 그 뒤로 다시 집 한 채가 암벽에 기대어 공중에 매달려 있다. 앞으로는 일망무제. 비록 천왕봉은 보이지 않고 중봉만 보이지만 이곳의 풍경은 선경이 따로 없다. 절로 도가 트일 만한 땅이다. 암자를 중심으로 아기자기한 산자락들이 겹겹 펼쳐지고, 그 아래로 사바세계가 정감 있게 골짜기마다 깃들어 있다. 거대한 바위봉우리 아래, 문수암과의 첫 대면은 이렇듯 드라마틱했다.

 

 

암자에서 쉬고 있는 부부로 보이는 산객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인기척을 느낀 스님이 손바닥만 한 암자마당 끝에 서서 이쪽 언덕을 지그시 올려다본다. 금낭화 붉은 포실한 오솔길을 따라 암자로 내려갔다. 암자에 이르자 벼랑 끝 해우소는 산자락에 깊이 싸여 있고 선방은 구름 위에 걸려 있다.

 

 

산객 둘이 사라지자 암자는 이내 적막에 휩싸인다. 돌층계를 오른다. 바위에서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동굴을 울린다. 천인굴에서 솟는 물이다. 천인굴은 예전 임진왜란 때 인근 마을 사람들이 피신해 온 곳으로 알려져 있다. 동굴 안은 천 명이 몸을 숨긴 곳이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지만 수십 명은 거뜬히 들어앉을 정도로 널찍하다.

 

 

스님은 툇마루에 앉아 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엄나무란다. 그 손길이 정성스럽다. 나물을 매만지는 산승은 침묵을 지키고, 나그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이따금 새 소리가 적막을 깰 뿐 아무 말도 아무 소리도 없었다. 산중 암자엔 정적만 가득했다. 나물을 다듬는 것은 스님의 일상, 이것 또한 수행의 방편일까.

 

 

한참 후에 스님이 침묵을 깼다.

“몇 해 전 이곳에 어느 신문사에서 기자가 왔다갔지요. 나중에 우연히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세상에 그 기자라는 양반이 나를 도인으로 만들었어요. 내가 하는 일이라곤 고작 이렇게 앉아 나물이나 다듬다가 배고프면 밥 먹고 사는 게 전부인데, 도인이라니….”

 

 

평상심이 곧 도이다

문득 마조 도일(709~788) 선사의 말씀이 떠올랐다. 마조 선사는 당나라 말의 유명한 선승이다. 육조 혜능의 손제자로 중국의 전통적인 조사선을 확립한 인물이다.

 

“도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오염시키지만 마라. 무엇을 오염이라 하는가? 나고 죽는 마음을 일으켜 꾸며대고 취향을 갖는 것은 모두 오염이다. 곧 바로 말하면 평상심이 도이다(平常心是道). 평상심이란 꾸밈도 없고, 옳음과 그름도 없고, 취함과 버림도 없고, 연속과 단절도 없고, 천함과 성스러움도 없는 것이다. 다만 지금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행위가 다 도이다.“ - <경덕전등록>

 

 

일상 속에서 선을 실천하는 조사선의 선법이 잘 드러난 법문이다. 걸을 때는 걷기만 하고, 밥 먹을 때는 밥만 먹고, 누울 때는 눕기만 하는 게 ‘평상심’이고 그것이 곧 ‘도’라는 것이다. 얼핏 지극히 쉬운 당연한 말로 보인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걸을 때는 걷기만 하고, 밥 먹을 때는 밥만 먹고, 누울 때는 눕기만 하고 있을까. 걸을 때 온갖 것에 눈길을 빼앗기고, 밥 먹을 때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고, 잠잘 때 온갖 걱정에 뒤척이는 게 우리의 모습 아닌가. 온갖 생각을 하고, 그 생각들이 다시 망상이 되어 떠도는 게 우리의 일상이다.

 

 

제대로 먹는 것, 제대로 눕는 것, 제대로 자는 것, 그래서 몸이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도의 시작이 아닐까. 마조 선사는 이러한 일상의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고, 그 근원을 달마의 ‘일심(一心)’에 두었다. “너희들 각자의 마음이 부처임을 확신하라. 이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다.”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자신의 성품을 오염시키지 않는 ‘본래의 마음’, 번뇌와 집착이 없는 평상무사(平常無事)한 마음이 곧 평상심이다.

 

 

 

임제원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킨 임제 의현(?~867)도 “불법에는 인위적인 꾸밈이 없다. 오직 애써 꾸며대지 않는 평상시의 생활뿐이다. 변소에 가고, 옷 입고, 밥 먹고, 피곤하면 눕는다. 어리석은 자는 웃겠지만 지혜로운 자는 알 것이다. 이르는 곳마다 주체적이면 머무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隨處作主 立處皆眞).” - <임제록>

 

 

‘어디에 가 있건 주인이 되라. 그러면 참되리라’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을 ‘밖에서 구하지 말고’ 일상 속에서 자신의 본성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몸은 지금 ‘여기’에 있는데, 생각은 ‘여기’를 떠나 안 가는 곳이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이것’, 이게 전부다. 그 외는 모두 오염이다.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통찰하여 발견하는 것, 이것이 모든 것 속에서 궁극의 차원을 만나는 길이다. 결국 당신에게 불성이 있으므로 당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밖에서 부처를 찾는 이에게는 ‘마음이 곧 부처’라고 했지만, 여기에 집착하는 이에게는 ‘부처는 없다’고까지 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도 결국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 결국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그 무엇도 아니다. 부처와 도는 저기에, 저 너머에 있는 게 아니라 여기, 오염되지 않은 이곳에 있다. 그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이 사바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즐겁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한눈팔지 말고 그 길로 쭉 가시오

“이제 여기를 떠나야 될 지도 모르겠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요. 작년에는 모 방송국에서 칠암자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며 인터뷰를 요청해서 산 아래로 내려갔다가 촬영이 끝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에야 다시 올라왔지요.”

 

 

스님의 이름을 여쭙자 ‘그거 알아서 뭐 하게’ 하면서도 인터넷에 이미 많이 올라와 있다고 하신다. 사실 여행자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직접 뵙기는 처음이라 여쭈었던 것이다. 나중에 헤어질 즈음 스님은 자신이 도봉 스님이라고 했다.

 

 

문수암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의 문수암은 1960년대에 지었다. 전하는 얘기로는 선학원 소속의 암자로 1965년 혜암 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비구니 스님이 20년 정도 머물다가 도봉 스님이 30년 전부터 머물고 있다. 도봉 스님은 1982년부터 도솔암에 있다가 1984년쯤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이 오지암자에 전기가 들어온 때는 1991년이었다. 산 아래 도마 마을에서 견성골 골짜기를 거쳐 삼불사, 상무주암까지 전기가 들어왔다.

 

 

봄여름가을에는 암자 생활에 문제가 없는데, 겨울이 문제였다. 높은 지대다 보니 겨울이면 암자 옆 샘물이 꽁꽁 얼어 붙어버린다.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 고개 넘어 상무주암 가는 길에 있는 샘까지 가야 한다. 암자 주위에서 유일하게 얼지 않아 거기에서 물을 길어온다.

 

 

그래도 이곳은 수행처로 그만이었던 모양이다. 이곳에서 수행했던 비구니 스님들이 지금은 이곳이 그리워 암자를 떠난 것을 여간 아쉬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도봉 스님과 영원사의 법철 스님, 도솔암의 정견 스님은 혜암 스님에게서 배웠던 사제 간이었다. 문수암이라는 현판 글씨를 보니 앞서 본 상무주암의 현판을 쏙 빼닮았다. 경봉 스님의 글씨란다. 도봉 스님은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1892~1982) 스님을 모셨다고 했다.

 

 

스님이 차 한 잔을 건넨다. 인터넷에선 이곳 문수암에 오면 스님이 오미자차를 준다는 많은 글들이 올라와 있다.

 

“참, 이제 뭐 주기도 겁이 나요. 그냥 마시고 가면 될 것을 굳이 올린답니다. 아무나 붙들고 그냥 차를 건넬 수는 없는 일이지요. 이곳까지 와서 인연이 닿으니 차 한 잔 드리는 거지요. 이건 네 가지 약재를 넣은 것이니 한 번 드셔보시오.”

 

그 맛이 오묘했다. 툇마루에 앉아 탁 트인 전망을 보고 마시는 차 한 잔은 마치 신선의 묘약을 먹는 듯 신비롭기까지 했다.

 

 

“처사님, 보아하니 글 쓰시는 분 같은데 부탁이요. 나에 대해서는 쓰지 마시오. 굳이 쓰려거든 그냥 이곳 풍경이 참 좋더라고만 적어 주시오.”

 

칠순을 넘기고도 몇 해가 지났는데도 스님의 눈빛은 맑다.

 

 

지팡이를 들어 길을 나서니 스님이 마당까지 나와 배웅을 하신다. 돌층계를 내려와 삼불사 가는 길을 가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길은 두 갈래. 아래로 곧장 가면 견성골, 전신주를 따라가면 삼불사다. 높은 축대 끝에 서서 스님이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한눈팔지 말고 그 길로 쭉 가시오.”

 

 

문수암에 대하여...

 

우리나라에서 문수암이라는 이름을 가진 암자를 흔히 볼 수 있다. 경남 고성의 문수암, 전북 고창의 문수사 등을 비롯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게다가 비록 문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오대산(상원사)을 비롯하여 춘천의 청평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수도량이다. 지리산에만 해도 이곳 삼정산의 문수암, 함양의 문수사, 노고단 아래의 문수대, 구례 문수골의 문수사 등이 있다.

 

문수사리(文殊師利)는 산스크리트어 mañjuśrī의 음사로 묘길상(妙吉祥)·묘덕(妙德)·유수(濡首)라 번역되어 ‘지혜가 뛰어난 공덕’이라는 뜻으로 반야지혜의 상징한다. ≪화엄경≫에서 문수보살은 보현보살과 함께 비로자나불의 양쪽 협시보살이 되어 삼존불의 일원을 이루고 있다. 보현보살이 세상 속에서 실천적 구도자의 모습을 띠고 행동할 때 문수보살은 사람들의 지혜의 좌표가 되었다.

 

문수보살에 대한 신앙은 삼국시대부터 널리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에 문수신앙을 최초로 들어온 이는 자장이다. 문수보살의 상주처는 신라의 고승 자장이 문수보살을 만나기 위해 기도를 드렸던 중국 산서성 청량산(오대산)으로, 1만 명의 보살과 함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원도의 오대산을 문수보살의 상주도량으로 믿고 신봉한다. 지금도 그곳의 상원사는 문수보살을 주존으로 모시고 예불하며 수행하는 도량이다.

 

문수보살은 동자승으로도 나타나고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노인이나 동물로도 나타나 문수보살과 인연이 깊은 사람만이 그를 알아본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대산이 예로부터 문수보살의 처소로 알려져, 세조의 병을 고쳤다는 전설까지 생겨났고, 신라 때의 고승인 원효와 의상이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는 전설도 전해 내려온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구둣방 사장님의 기발한 우유 팩 활용법

$
0
0

 

 

 

 

 

구둣방 사장님의 기발한 우유 팩 활용법

 

주말, 노트북 가방 어깨끈에 문제가 생겨 구둣방을 찾았습니다.

인터넷으로 가방 수선가게를 찾았더니 마침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대개의 수선집이 그렇듯 실내는 채 한 평이 될까 싶을 정도로 비좁았습니다.

구두를 주로 수선하면서 가방 수선도 하더군요.

 

 

잠시 기다리면 된다는 사장님의 말에 두리번거리다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들어올 때는 벽에 붙어 있어 몰랐는데 아주 낯익은, 그렇지만 기발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입구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것이 고개를 돌리자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놀랍게도 우유 팩이었습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무슨 가구처럼 짜임새 있게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우유 팩의 숫자는 모두 216개였습니다.

12개씩 묶어서 수선에 필요한 각종 부품들을 모아두는 용도로 쓰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더 많았었다고 합니다.

근데 놀라운 건, 이 수많은 우유 팩들이 같은 상표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발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잘 정리되어 있으니 보기에도 좋을 뿐더러 실용성이 돋보이는 재활용의 모범으로 보입니다.

30년 넘게 구두수선을 하고 있다는 사장님은 시종 순박한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길 위에 서면 그 길이 말해줄 것입니다. 남도여행법

$
0
0

 

 

 

 

“길 위에 서면 그 길이 말해줄 것입니다"

- 전문여행작가 김종길씨(경상대 출판부 편집장)

 

 

북콘서트를 앞둔 지난 6월 중순경,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남도여행법>이라는 책이 나왔다는데 책과 나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했다. 경남도민신문의 연중기획으로 '와이드 인터뷰-피플'이라는 제목으로 각계각층의 인물을 소개하는 코너였다. 신문 한 면을 모두 할애하는 비중 있는 기사라고 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어제 기사가 나왔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현대인들에게 제 책이 독자들의 삶에 조금은 여유와 느긋함을 주고 싶습니다”

밀양 삼랑진에서 광주송정까지의 300km 정도의 경전선 여행기를 ‘남도여행법’이란 책으로 펴낸 김종길(43) 작가.
김 씨는 1년 동안 주말마다 경전선을 타고 경전선의 이름이 남아 있는 60개 역에 대한 기록을 책에 담았다. 기차가 서는 34개 역과 기차가 서지 않는 10곳, 폐역이 된 16곳을 모두 둘러봤다고 한다. 특히 김 씨는 역 주위의 가볼만한 곳, 먹거리, 문화유산, 사람들 등을 책에 기록하면서 새로운 ‘남도여행법’을 탄생시켰다. 김종길씨는 “남도여행법은 ‘빨리빨리’와 철저하게 반대편에 서 있다”며 “가장 느린 기차 경전선을 타고 가장 느린 여행지 남도를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찍은 모든 것들을 갈무리 했다”고 말했다. 한편 인터넷에서 ‘김천령’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전문여행작가 김 씨의 여행기는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은 김종길 작가와의 인터뷰이다.

- 남도여행법 책 출판 동기는
▲2012년 7월부터 2013년 6월까지 경전선을 여행하면서 1년 동안 오마이뉴스에 연재를 했습니다. 그 연재한 것을 다시 6개월 동안 보충 취재하여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점점 사라져가는 경전선의 역과 문화들을 기록해 둘 필요성을 느낀 거죠.

 

-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밀양 삼랑진에서 광주송정까지의 300km 정도의 경전선 여행을 담고 있습니다. 여행은 진주역에서 34개 역을 모두 기차로 이동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기차로 이동해 목적한 역에서 내려 그 주위를 대개 도보로 여행했습니다. 그래서 그 역 주위의 가볼만한 곳, 먹거리, 문화유산, 사람들 등을 기록하면서 저만의 여행지도를 그린 셈이죠. 경전선의 이름이 남아 있는 60개 역에 대한 기록입니다. 기차가 서는 34개 역과 기차가 서지 않는 10곳, 폐역이 된 16곳을 모두 둘러보았죠.

 

- 책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글쎄요. 어떤 구체적인 메시지가 있기보다는 사라지고 잊히는 것들에 대한 기록, 그 기록들을 공유하고 싶은 것이겠죠. 너무나 빠른 오늘날, 어찌 보면 우리는 중요한 무언가를 잃은 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느린 여행을 통해 돌아보자는 의미일 수도 있겠고요.

  

 ▲ 2012년 10월 23일 폐선이 된 경전선 원북역 일대의 옛 철길을 달리는 무궁화호.

 

  

▲ 전남 화순군 능주 영벽정과 경전선 철길.

 

- 첫 번째 출판인가
▲예전에 몇 번 출판제의가 있었으나 대개 여행가이드북으로 거절하고, 이번에 인문서 계통의 여행산문집을 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여행정보도 실려 있습니다.

 

- 경상대 출판부에 계신데 어떤 업무를 하는가
▲편집장이자 에디터입니다. 출판부에 근무하다 보니 제 책이 경상대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 분도 간혹 계신데요. 제 책은 서울에 있는 ‘생각을담는집’이라는 인문예술전문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 김천령이란 필명으로 전문 여행작가로도 활동하는데
▲2008년 제주도의 숨은 비경을 소개하는 제주도 명예기자로 활동했습니다. 현재 코레일 여행칼럼작가와 오마이뉴스 여행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6년 연속 Daum-Tistory 우수(파워)블로거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월간 사진, 시사저널, 미디어삼성, 빙그레, 경남도민일보 등 각종 매체에 여행 관련 기사를 쓰고 있고요. 2010년에는 SK텔레콤과 ‘올댓 여름휴가, 가을여행, 겨울여행’ 등 여행 어플을 개발했으며 그중 가을여행은 당시 어플 중 최고의 기록인 14만에 달하는 다운로드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각종 방송사의 여행 프로그램 자문을 해왔으며 KBS 창원 ‘경남 100경 완전정복’ 자문위원과 MBC 경남 ‘경남아 사랑해-경남의 길’ 진행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
경전선 60개 역 둘러보며
사라지는 기록 공유하고 싶어
‘남도여행법’ 여행기 펴내
여행하고 책 읽는 즐거움
기차타는 즐거움 책으로 전해

다양한 매체서 여행전문작가 활동
주말엔 여행…여행기만 2000회
여행 통해 자신을 되돌아 보며
내면과의 대화가 시작 된다

인터넷서 김천령으로 활동
6년 연속 파워블로거 선정
----------------

 

- 김천령은 어떤 의미인가
▲천령이라는 이름은 벽초 홍명희의 소설에 나오는 왕실종친 단천령이라는 인물에서 따온 것입니다. 조선팔도를 유람하며 안빈낙도의 삶을 살던 단천령이 임꺽정에게 잡혀서도 위엄을 잃지 않고 당당했었지요. 임꺽정에게 붙잡혀 살려달라고 애걸하던 다른 양반들과는 달랐죠. 피리를 잘 불러 임꺽정의 눈물을 자아내게 한 장면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삶의 방식에 매력을 느껴 ‘천령’이라는 이름을 따왔고, 또한 지리산을 좋아해서 옛날 지리산 함양 땅을 가리키던 ‘천령’이라는 필명을 쓰게 된 겁니다.

 

- 지금까지 소개한 여행기는 몇 회인가
▲블로그에선 1300회를 훌쩍 넘겼고 오마이뉴스에 기사로만 360회 정도 됩니다. 물론 다른 매체까지 합친다면 더 많습니다. 정확한 수치는 잘 모릅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기가 있다면
▲글쎄요. 모든 여행이 저에겐 새로운데요. 아무래도 저의 이번 책 ‘남도여행법’에 나오는 경전선 여행이겠지요. 1년 6개월 동안 한 주제에만 몰입했으니까요.

 

- 한 달에 몇 회 정도 여행을 다니나
▲딱히 정한 횟수는 없고요. 주말이면 거의 여행을 다닌다고 보면 됩니다. 휴일도 물론이고요. 서너 달에 한 번씩은 휴가를 내고 2박3일 내지 3박4일 정도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요.

 

- 여행은 혼자 다니나
▲글쎄요. 혼자 다니는 경우도 많지만, 절반 정도는 아내와 딸아이가 같이 다닙니다. 혼자 갈 때는 많이 걷거나 산을 오르거나 험한 곳을 갈 때에 주로 혼자 다니죠. 혼자 다녀야 자신을 돌아다보게 되고 내면과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 김종길씨의 <남도여행법> 북콘서트

 

- 북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지난 6월 27일 진주역 대합실에서 <남도여행법> 북콘서트를 개최했습니다. 진주선과 마산선, 경전선, 광주선에 걸친 철도역 60개를 탐방하면서 주변의 볼거리와 먹을거리, 사람과 역사, 문화를 책에 담았는데, 북콘서트 장소 또한 내용에 걸맞게 진주역 대합실로 정했습니다. 북콘서트에서는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 강원도와 서울, 대전, 대구, 창원 등 전국의 유명 블로거들과 독자 등 100여명이 참석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 북 콘서트 개최 의미는
▲지역에서 출판기념회는 종종 있지만 북 콘서트는 거의 없습니다. 책이 정치적인 수단이나 인간관계의 수단이 아닌 책 자체가 문화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준비했습니다. 봉투와 화환을 받지 않는 것도 그러한 맥락입니다. 북 콘서트 자체가 하나의 문화이고, 책을 읽는 이들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문화공간을 만드는 것이겠지요.

 

-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이 있다면
▲일단은 지난 7월부터 시작해 1년 동안 진행될 신문연재를 잘 마무리해서 책으로 낼 생각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계획했던 부산에서 목포까지의 남해안 해안선을 따라 도보여행을 몇 년 안에 실행할 거고요. 먼 훗날에는 부산에서 포르투칼 리스본까지 도보나 기차로 여행을 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현대인들은 무척이나 바쁘죠. 저 또한 마찬가지고요. 직장에서는 모두가 ‘빨리빨리’를 외칠 수밖에 없는데요. 그렇더라도 주말이나 휴가 때 여행을 가시게 되면 조금은 느리게, 좀 더 느리게 여행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 책이 여러분들의 삶에 조금은 여유와 느긋함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감사합니다.

 

- 여행 팁이 있다면
▲글쎄요. 그것은 각자의 몫이겠지요. 길 위에 서면 그 길이 말해줄 것입니다.

 

- 책 구입은 어떻게
▲인터넷서점과 지역서점에서 살 수 있습니다.

 

기사 원문 보기

 

한송학 기자 < 저작권자 © 경남도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이 기사는 경남도민신문의 허락을 얻어 게재하였음을 밝힙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여기가 최참판댁 모델... 진짜일까?

$
0
0

 

 

 

 

 

 

 

여기가 박경리의 <토지> 최참판댁 모델... 진짜일까?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조씨 고가 방문기

 

비가 내렸다. 그냥 무한정 달리고 싶었다. 어쩌다 보니 섬진강. 골짜기로 차를 돌렸다. 악양면 소재지를 지나 그 끝에 나타난 정동마을. 비를 머금은 산 구름이 두터운 띠를 두르더니 온통 산을 가려버렸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허리께나 옴직한 낮은 돌담길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돌담길 안으로는 감나무가 대종을 이룬 과실수가 심겨져 있다. 끝없이 펼쳐진 돌담길과 그 사이사이 집 몇 채를 지나니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인다. 이제까지의 좁은 골목길과는 달리 차 두 대가 교행을 할 정도의 제법 넓은 도로가 나타났다. 건너편 산 아래까지 점점 들판이 펼쳐지고 산자락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모든 것이 푸근했다.

 

 

길의 끝에 오래된 고가가 한 채 보인다. 경사진 곳에 지어진 집의 규모는 상당했다. 층을 이룬 장대한 담장 길이에 입이 절로 벌어졌지만 담장 너머 하늘로 불쑥 솟은 건물의 처마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예전에 제법 떵떵거렸을 위풍당당한 집이다.

 

 

대문은 잠겨 있었다. 대문 앞의 작은 표지판을 읽고 있는데 골목 저편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잰걸음으로 다가오신다. 안경을 쓴 학자풍인데 허리가 꼿꼿하다.

 

“들어와요. 차 한 잔 하고 가요. 허어 참, 들어오라니까.”

 

마치 일가친척이 방문한 것처럼 할아버지는 초행자인 길손을 반갑게 맞이했다.

 

 

“여기가 사랑채 자린데 지금은 없어졌지. 몸채로 오르는 저 돌계단에는 중문이 있었지요. 이런 연못 봤어요? 대한민국에선 보기 힘들 걸.”

 

대문 안을 들어서자마자 할아버지의 집 안내가 이어진다.

 

“어서 와요. 참말로 앉으라니까. 차 한 잔 내어줄테니….”

 

 

집 안 어디서 봐도 탁 트인 전망

경사진 땅의 생김대로 짓다 보니 집은 크게 3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통가옥을 세 개의 영역으로 나눈다는 것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고가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이 3개의 공간이 애써 담을 둘러 나눈 것이 아니라 땅의 높낮이로 인해 공간의 독립성이 자연스레 보장된다는 것이다. 경사를 이룬 자연지형에 집을 짓다 보니 사랑채 자리에서 봐도 앞이 탁 트이고, 안채 툇마루에서 봐도 그렇고, 예전 초당과 가묘가 있었던 후원 차밭에서 봐도 전망이 끝내준다.

 

 

대개 옛집에서 안채의 경우 사랑채에 가려 겨우 하늘만 보일 뿐이고, 그래서 더러 별당을 꾸미거나 2층 다락에서 바깥 풍경을 훔쳐볼 수 있는 구조로 만들곤 했으나 이 가옥은 안채가 사랑채보다 한 단 위에 훌쩍 앉아 있으니 자연스럽게 바깥 풍경이 안채로 그대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 흔한 내외담 등의 헛담을 둘러 외부인의 시선을 애써 막을 필요도 없다. 사랑채보다 한 길이나 높은 곳에 안채가 있어 바깥에서는 전혀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 집의 특이한 구조는 연못에서도 볼 수 있다. 사랑마당 한구석에 있는 연못은 땅속으로 한참이나 푹 꺼진 곳에 있다. 담장 위에서 연못까지는 족히 5m는 될 정도로 깊다. 경사진 지형이다 보니 집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더 깊이 팔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못에는 특이한 공간이 있는데 일명 석빙고다. 계곡에서 끌어들인 물이 연못으로 들어가는 지점에 굴처럼 안쪽으로 너른 공간을 따로 만들어 여름에 각종 음식을 보관하던 천연냉장고 역할을 했다.

 

             ▲ 연못가의 석빙고

 

 

사랑마당에 서서 집을 돌아보면 집 뒤의 산봉우리가 예사롭지 않다. 할아버지께 물어보니 ‘꽃뫼’라 했다. 꽃의 봉오리 형상이란다. 앞쪽 들판에 낮은 동산이 하나 있는데, 뒤의 산봉우리가 꽃이니 앞의 동산은 자연스레 나비가 된다. 게다가 좌우로 다시 낮은 산이 감싸 도니 이곳은 누가 봐도 명당이다. 해서 이곳은 서울 아래 최고의 자리고 그다음이 구례 운조루라고 할아버지는 넌지시 자부했다. 집의 형국 또한 ‘자자형’으로 쥐가 드나드는 곳이라 문을 많이 냈는데, 지금은 쇠락해서 어쩔 수 없이 문 중 일부는 막아버렸다고 했다.

 

 

고택 마루 할아버지의 노래방

이 집의 주인 조한승 할아버지는 올해 여든아홉 되신다. 할아버지의 나이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이 큰집에 할아버지는 홀로 사신다. 그래도 어디 하나 어지러운 곳이 없다. 매일 대청을 걸레질하고 음식도 직접 해 드신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할아버지가 74살 일 때, 당시 70살이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처음 몇 해는 힘들었지만 그 뒤로 혼자 음식을 해 드시면서 이제는 여자들이 하는 음식이 성에 차지 않을 정도의 요리 실력을 자랑하신단다. 나물도 직접 무쳐서 드실 정도다.

 

 

집 뒤에 있는 차밭은 할아버지가 직접 심었다. 건물이 없어진 빈터에 차를 심고 쌍계사 주지 스님을 만나 직접 차에 대해 배우기도 했다. 내년 봄에 와서 찻잎을 따가란다. 나중에 돌아갈 때 찻잎을 따서 베개에 꼭 넣어보기를 권했다. 잠이 기막히게 잘 온다고.

 

             ▲ 조한승 할아버지가 직접 심고 가꾼 차밭

 

 

차를 우려내는 손길이 분주하다. 몇 번을 걸러내시더니 종이컵에 한 잔씩 내미신다. 이곳 하동에는 차를 마시는 데 번다한 의식이 없다. 이곳에선 적어도 차는 의식이 아닌 생활 그 자체다. 그래서 어떤 격식을 차리거나 차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해서 도리어 차 맛을 달아나게 하지 않는다. 그냥 물 마시듯 숭늉 마시듯 대접이나 그릇에 따라 훌쩍 마시면 그만이다.

 

 

차를 마시다 문득 시선이 문으로 갔다. 마루에 문이 달려 있는 것도 특이하지만 대청에 노래방기기가 있다. 할아버지는 노래를 즐겨 부르신다. 이 마루 노래방이 할아버지의 장수 비결이라고 했다.

 

방 구경도 했는데, 사진은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찍지 않았다. 마치 스님들의 선방처럼 할아버지의 방에는 아무런 장식도, 어떤 물건도 없었다. 다만, 다리 없는 침대 매트만 방구석에 달랑 놓여 있었다. 사방 벽도 할아버지의 성품을 말하듯 하얀 벽지를 발라 단정하기 그지없다. 다른 방도 봤지만 매한가지, 깔끔한 성격을 집안 구석구석에서 엿볼 수 있었다. 그 너른 마당에 잡풀 하나 없고, 마루에도 먼지 하나 없다. 1200평에 달하는 이 너른 대저택을 혼자서 관리하신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부지런함과 깔끔함이 몸에 배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밥하는 하인들을 위해 지은 임시 부엌

마루에서 한참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문득 눈길이 가는 곳이 있었다. 안마당 끝으로 정자도 아닌 것이 창고도 아닌 것이 괴이한 건물이 하나 보였다.

 

                                          ▲ 조한승(89) 할아버지

 

             ▲ 하인을 위해 만든 마당의 여름 임시 부엌

 

“저거 말이요. 여름에 밥하고 국 끓이는 곳이라. 내가 여섯 살 때 학교에 들어갔는데, 그때 우리 집에 하인들이 한 40, 50명 정도 되었지. 여름이 되면 더워서 밥하고 국 끓이는 게 힘들다고 하인들이 볼멘소리를 하자 할아버지가 목수를 불러서 지은 거지. 82년 전에 지은 거요.”

 

 

 

안채는 180년 전에 지었다고 했다. 둥근 두리기둥을 쓴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쯤으로 여겨진다. 안채 옆 아래채에 할아버지의 부엌이 있다. 생활은 안채에서, 식사는 아래채에서 하신다. 아래채의 지붕은 기와가 아니고 슬레이트다. 할아버지가 잠시 타지에서 생활할 때 친척에게 집을 맡겼더니 기와지붕을 다 걷어내고 당시 최신식이라며 슬레이트 지붕을 이었다고 했다. 뒤에 할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고 기와로 다시 이으려고 했지만 2000만 원이 넘는 비용 때문에 그대로 두었단다.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이 많이 와야지, 사람 싫어하는 사람치고 잘 되는 사람 하나도 못 봤어. 나중에 감자 삶아 먹으로 한번 와요. 가을에 고구마도 먹으러 오고.”

 

내남 구분 없는 할아버지의 말에 정이 듬뿍 묻어났다. 집을 나서니 할아버지가 따라 나오신다. 돌층계만 남은 중문을 지나 휑한 공터로만 남은 사랑채를 거쳐 대문을 나섰다. 예전에 대문 밖에 있었다는 남자용 뒷간은 흔적도 없었다. 다시 비가 후드득 쏟아졌다.

 

 

이곳이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일까

이곳이 박경리의 소설 <토지>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이라는 소문이 나자 찾는 사람도 늘어나고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도 경쟁적으로 취재를 해갔다. 그러나 박경리 선생은 <토지>를 쓰면서 이곳을 다녀간 적은 없다. 다만 평사리를 차안으로 이동하며 스쳐 지나 간 것으로 전해진다. 박경리 선생은 살아생전 “평사리를 감싸 안은 지리산과 섬진강이 지닌 역사적 자취, 경상도 땅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넓은 들녘이 구상 중인 소설의 배경에 더없이 어울려 보였다. 큰 부잣집이 있었는데 역병으로 가솔들을 잃어 넓은 들판의 곡식을 추수하지도 못한 채 버려두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작품 구상에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 말들이 있었으나 박경리가 말한 ‘큰 부잣집’을, 이 일대에서 조부잣집으로 알려져 있는 조씨 고가로 보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씨 고가는 조선 개국공신 조준의 후손인 조재희가 19세기 중반에 지은 집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6년여에 걸쳐 지었다고 한다.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에 있다.

 

             ▲ 공루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곳에 오니, 해우소도 그림 같구나!

$
0
0

 

 

 

 

이곳에 오니, 해우소도 그림 같구나!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⑤] 칠암자 순례길, 삼불사

 

‘이곳은 삼불사.’ 스님의 글씨일까? 하얗게 쓴 글씨. 돌층계 입구 나무둥치에 올려 둔 작은 푯말. 그 옆으로는 문수암과 약수암, 마을길을 가리키는 작은 푯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널브러져 있다. 무심한 자연에 무심히 남긴 흔적이다.

 

 

기다란 돌층계, 산중에 이런 수고로운 돌길이 놓이다니. 한 층 한 층 쌓아 올린 돌층계는 이곳이 암자가 아니라 절이라는 걸 애써 강조하는 것일까. 오랜 감나무 한 그루가 사천왕상인 양 위엄 있게 절을 지키고 있다. 절 마당 가득 봄빛이 넘치고 넘쳤다. 마당 끝으론 평상 하나를 두어 나그네의 여로를 풀어준다.

 

 

 

해우소마저 그림이 되는 곳

적막했다. 바람도 숨을 멈췄다. 삼불사는 지나온 상무주암, 문수암과는 달리 조금은 큰 규모다. 법당을 중심으로 뒤로는 산신각이, 앞으로는 탑과 석등이 놓여 있다. 조금 떨어진 아래에는 요사채로 보이는 건물이 한 채 있고, 온통 녹색 칠을 한 함석으로 지은 해우소가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볼썽사나울 수도 있는 건물이 이곳에선 그마저도 그림이 된다. 작은 텃밭의 푸성귀도 녹색을 닮았다.

 

 

 

인기척이 없다. 법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을 흘깃 보니 비구니 스님 한 분이 마루에 앉아 가만히 나물을 다듬고 계신다. 그 무심함을 깨뜨릴 수 없어 한참을 서성거렸다. 모든 것은 멈췄고, 그 정적 속으로 봄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주 느리게 침묵을 지키며. 그러기를 한참, 조심스럽게 스님에게 길을 물었다. 그제야 무거운 침묵을 깨고 스님이 차를 한 잔 건넸다. 다듬는 나물은 제피(초피)이고 차는 약식혜란다. 약간 싸한 맛이 입안을 감돌더니 목덜미를 시원하게 훑고 내려갔다. 초파일에 남은 밥에다 약재를 넣어 만든 것이라고 했다.

 

 

법당 외벽에는 아주 작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쌀, 밑반찬, 소금 주고 가시면 고맙겠습니다.’ 배낭을 뒤졌으나 텅텅 비어 있었다. ‘쌀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스님이 이를 듣고 지금은 하안거 중이라 양식은 이미 다 마련했노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법명을 여쭙자 다음에 두세 번 인연이 닿으면 그때 자연스레 알 일이라며 부드러운 미소만 짓는다. 삼불사의 이름이 궁금하여 또한 여쭈었더니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며 다만 삼정 마을, 삼정산 등의 ‘삼’에서 이름을 따온 게 아닌가 했다.

 

 

“저기 보이는 곳이 천왕봉이지요.”

자리에서 막 일어서려는데 스님이 말을 건넸다. 아예, 그렇군요. 짧은 숨을 내쉬었다 도로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스님은 여전히 나물을 매만졌고 나그네는 하염없이 천왕봉을 바라보았다.

 

 

마당 끝 석등 하나. 천왕봉을 바라보다 문득 눈길이 간다. 저 멀리 아득한 어딘가에 있을 거라 믿었던 피안의 세계가 바로 석등이 비추는 이곳임을 깨닫는다. 산신각에 오르니 삼불사와 주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희미한 형체의 오랜 석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님이 이곳에 온 지는 삼년, 비구니 스님 혼자 있기가 쉽지 않을 터. 전기는 들어오지만 난방은 나무를 땔감으로 해서 방을 데운단다. 발아래 산마을이 고요했다. 평온히 앉은 스님께 깊게 합장을 하고 돌층계를 내려섰다. 견성골로 내려서는 돌길은 몸이 앞으로 고꾸라질 정도로 심한 경사길이다. 이 가파른 내리막길은 골짜기로 끝없이 이어져 비록 삼불사가 절의 모양새는 하고 있으나 역시 깊은 산중의 암자와 별반 차이가 없음을 절로 깨닫게 한다.

 

 

마을이 지척인 줄 알았는데, 가파른 비탈길은 끝이 없다. 내리막인데도 땀이 비 오듯 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너덜해진 무릎이 땅에 닿을 무렵 계곡 물소리가 나더니 돌길이 흙길로 바뀌었다. 계곡으로 다가섰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에 소스라치듯 놀라 서늘한 마음이 일었다. 순간 물소리에 모든 것이 내려앉았다.

 

 

견성골, 무슨 뜻일까. 하필 골짜기 이름이 왜 ‘견성’일까. 그럼, 삼불사의 ‘삼불’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계곡 바위에 걸터앉았다. ‘견성, 삼불, 견성, 삼불….’ 어느덧 물소리가 잦아들고 머리가 맑아졌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견성. 견성성불이라 했다. ‘견성’은 달마를 초조로 하는 선종에서 근본 취지로 한다. 9세기 초 당나라 때에 편찬된 선의 역사서 <보림전>에 처음 등장한다. 문자에 있지 않아서(不立文字) 교설을 따로 전하니(敎外別傳), 인간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直指人心) 그 성품을 보고 깨달음을 이룬다(見性成佛)에서 ‘견성’을 말한다. 인간의 본성이 곧 불성이라는 것, 참된 자기를 깨닫고 앎으로써 깨달은 자인 부처가 된다는 말이겠다. 번뇌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던 자신의 청정한 성품을 드러내어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 ’견성성불‘이다. <대승열반경>에서는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누구든 열심히 수행하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사고가 곧 ‘즉심시불(마음이 곧 부처, 卽心是佛)’이다. ‘본래청정심(本來淸淨心)’을 찾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여래는 어디서도 오지 않고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세계 불교계의 대표 선승인 틱낫한 스님은 “불상을 향해 절을 할 때도, 그 상에 내 자신이 비춰져 있음을 깨닫고, 내 안에서 궁극의 완전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배하는 대상과 우리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면서, 내 안의 부처와 깊이 연결된다.”고 했다. 스님은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음을 깨닫고, 이 불성의 발현을 통해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 누구나 부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 <법화경>의 핵심 가르침이자 참된 종교 행위라고 말했다. 부처는 말했다. “이 썩어질 몸뚱이를 예배를 해서 어쩌자는 것이냐.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는 사람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아야 한다. 나를 보려거든 법을 보아라.”

 

 

춥다고 법당의 목불을 도끼로 쪼개 불태운 단하(738~824) 선사, 부처의 진리를 묻자, ‘똥 닦는 막대기(간시궐, 乾屎橛)’라고 서슴지 않고 말했던 운문(864~949) 선사, 수행승들이 찾아오면 언제나 ‘차나 들지(끽다거, 喫茶去)’라고 했던 조주(778~897) 선사, 심지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외쳤던 임제(?~867) 선사… 이 선어들로 고정관념에 갇혀 있던 우리들의 꼭꼭 닫힌 눈은 번쩍 뜨인다.

 

천왕봉

그러고 보니 나 또한 너무 멀리 온 게 아닌가. 무엇을 구하러 이 지리산 오지를 헤매고 있단 말인가. 봄이 왔다고 해서 봄을 찾아 나섰다가 어디에도 없어 집으로 돌아왔더니 뜰에 핀 매화에 봄이 있더라는 어느 시인의 시처럼, 파랑새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지만 결국 집안의 새장에서 파랑새를 찾게 된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에서처럼, 깨닫고 보니 길을 떠난 바로 그 자리였다는 선재동자처럼… 결국 모든 것은 ‘저기’가 아닌 ‘여기’ 자신에게 있다.

 

 

자신 속의 삼신불을 보라

그렇다면 삼불은 무엇인가. 삼불사의 삼불은 혹여 ‘삼신불(三身佛)’이 아닐까. 천왕봉, 제석봉을 거쳐 도솔암,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 이곳 삼불사, 견성골까지 모두 불교의 세계이다. 견성하여 자신 속의 부처(삼불)를 보라는 것 아닐까. 삼불은 곧 삼신불이다. 법신불(法身佛), 보신불(報身佛), 화신불(응신불, 應身佛)이 그것이다.

 

결국 이 삼신불 또한 자신 속에 있다는 것. <임제록>에서는 “자신 속의 삼신불을 찾고 순간순간 밖에서 찾는 마음을 다스린다면, 부처나 조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육조 혜능은 형식적인 일체의 형상과 의례를 배척하고 오로지 자신의 청정한 본성에 갖추어져 있는 삼신불에 귀의하는 무상계를 설했다.

“육신(색신)은 집과 같다. 삼신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자성(자신의 성품) 속에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다 있으나 어리석어 보지 못하고 밖에서 삼신불을 찾는다. 그래서 자신의 육신 속에 있는 삼신불을 보지 못한다. <돈황본 육조단경>

 

 

자신의 육신 속에 있는 청정한 ‘법신’에 따라 생각하는 작용이 ‘화신’이고, 생각마다 선하면 ‘보신’이다. 이 도리를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닦는 게 귀의이다. 자성이 깨달으면 부처이고, 자성이 미혹되면 부처가 중생이다. 어리석은 부처가 중생이며, 지혜로운 중생이 부처라는 말과 다름 아니다. 결국 중생의 자성이 부처이고, 부처란 자신의 자성을 깨우친 중생인 것이다. 부처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 부처임을 깨닫고, 그것을 믿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여기서 부처란 바로 진리 그 자체를 발견하는 일이다.

 

견성골 계곡, 바위에 부서지는 물소리가 세차다.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이자 북송 제일의 문장가였던 소동파(1036~1101)가 상총(1025~1091) 선사를 찾아 법문을 청했다. 상총 선사는 사람이 설해 주는 말만이 법문이 아니라 우주만상이 모두 법을 설하고 있으니 그 법을 들을 줄 알아야 된다고 말했다. 마침 소동파는 절을 나서 골짜기 계곡을 지나는데 전날 밤 내린 비로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세차게 들렸다. 순간 소동파는 무언가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오도송(悟道頌)을 지었다.

 

시냇물 소리가 부처님 설법이니 溪聲便是廣長舌계성변시광장설

산빛이 어찌 청정한 법신이 아니랴 山色豈非淸情身산색기비청정신

밤새 내린 물소리 법문(팔만사천게송)을 夜來八萬四千偈야래팔만사천게

뒷날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줄 수 있을까 他日如何擧仰人타일여하거앙인

 

 

 

 

 

 삼불사와 삼신불

삼불사는 조선 초에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유물과 기록은 없다. 지금은 비구니의 참선도량이다. 칠암자 순례길의 여느 암자와는 달리 이곳은 삼불사라는 절 이름을 갖고 있다. 그래서일까. 앞선 상무주암과 문수암과 사세에 있어서는 별반 차이가 없으나 왠지 세상에 조금은 가까워 산속 깊은 암자의 그윽한 맛은 덜한 편이다. 다만 천왕봉이 보이고 금대산과 백운산이 병풍을 두른 듯이 펼쳐져 있어 전망이 매우 좋다.

 

 

흔히 여러 부처를 법신불(法身佛), 보신불(報身佛), 응신불(화신불, 應身佛)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법신불은 진리 그 자체,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를 부처로 사유한 것으로, 비로자나불(대일여래)이 여기에 해당한다. 보신불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서원을 세우고 거듭 수행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가 여기에 해당한다. 응신불은 중생과 같은 몸으로 이 세상에 출현해서 그들의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설법하여 구제하는 부처로, 석가모니불을 포함한 과거불과 미륵불이 여기에 해당한다. 삼신불을 달에 비유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법신불은 하늘에 늘 떠 있는 달이고, 화신불은 물에 비친 달을 말하며, 보신불은 달빛을 말한다. 진리 그 자체인 법신은 영원한 존재이지만, ‘보화비진報化非眞’인 보신과 화신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나타나는 것이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Viewing all 237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