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관광지도나 사진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눈길을 확 끄는 풍경이 있다. 바로 예류지질공원이다. 이곳은 드라마 <온에어> 촬영지로도 알려진 곳으로 독특한 풍경을 자랑한다. 지난 4월 대만 여행에서 이곳을 가게 되었다.
대만의 국가풍경구로 지정되어 있는 예류지질공원은 한자음 표기대로 해서 ‘야류’로도 불리고 예류해양공원 혹은 예류해양세계로도 불린다. 타이베이에서 동쪽으로 가서 바다가 있는 기륭항(지롱항)을 지나 해안을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가면 예류지질공원을 만나게 된다.
처음 안내센터에 내렸을 때만 해도 이곳에 기이한 해변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한국의 여느 관광지처럼 드넓은 주차장을 빼곡 채운 차량들과 북적대는 사람들로 이곳이 대만에서도 손꼽는 관광지임을 짐작할 뿐이다.
매표를 한 후 언덕을 올라서면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잘 깔린 포장도로를 따라 쭉 가다보면 어느 새 푸른 바다가 보이고 기이하게 생긴 바위 모양이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곳에 배치된 조형물은 관광객들의 사진 촬영을 위한 모방 작품들이다.
이어서 해안. 마치 용머리처럼 바다 저 멀리 쭉 뻗은 겨대한 암석이 나온다. 전망대에 먼저 오르면 넘실거리는 푸른 파도 아래 일대 장관이 펼쳐진다. 거대한 암반은 동해 해면을 향해 1700미터 길이로 쭉 뻗어 있다. 해수침식과 풍화작용으로 수많은 기암이 형성되어 장관을 이룬다.
거대한 계란 모양의 바위, 어부들의 승강대로 사용되는 슬리퍼 모양의 바위, 여왕 머리 바위 등 다양한 모습의 바위를 보며 자연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해식구, 촉대석, 담상석, 두부석, 상비석, 선녀화, 여왕머리 등은 예류에서도 가장 이름난 명물이다.
진짜여행은 말이죠. 무작정 떠났다가 이곳저곳 정함 없이 떠돌다 하염없는 시간을 보내는, 목적도 목적지도 없는 그런 여행이겠지요.
지난 주말에 우연히 들른 거창의 어느 고택에서 만난 강아지들입니다.
처음엔 강아지가 한 마리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근데 마루 밑에 어미 개와 강아지 한 마리가 더 있더군요.
어미와는 완전 다른 얼굴형을 가진 강아지였습니다.
잠시 후 장독대 뒤에서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세상에... 다가가 보니 모두 여섯 마리가 더 있었습니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장독대 담장 아래 그늘에 숨어 있더군요.
인기척이 나자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ㅎㅎ, 완전 귀엽죠^^
어쩜 이리도 하나같이 귀여울까요.
그중에서도 이 놈한테 가장 눈길이 갑니다. 세상모르고 자고 있군요.
자기들끼리 대화도 합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요?
이제는 귓속말까지...
근데 어째 듣고 있는 강아지의 반응이 심드렁합니다.
급기야 얘기하던 강아지가 토라졌느지 벌러덩...
여행자의 등장으로 잠시 어수선했던 분위기도 잠시, 강아지들은 자기 자리로 가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원래는 여덟 마리였는데, 슬프게도 한 마리는 죽었답니다. 어미 개가 몸이 약해 그날도 병원에 갔다왔다고 하더군요. 주인이필요하면 한 마리 가져가라 했지만 도시에서 키우기가 힘들 것 같아 마음만 고맙게 받았습니다. 어미 개와 일곱 마리의 강아지가 오래도록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합니다.
경남 거창 황산마을, 마을 앞으로는 위천이 흐르고 그 유명한 명승 수승대가 있다. 여름이면 이곳은 물놀이 인파로 붐빈다. 마을의 고택에서 민박을 한 방문객들이 더위를 피해 위천으로 물놀이를 간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오다 문득 그림 같은 풍경에 걸음을 멈췄다. 야트막한 언덕 위로 장대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언덕을 향해 층층 쌓아진 논들과 그 끝에 하늘과 맞닿은 거대한 느티나무, 긴 가지 아래 자리를 한 육모지붕의 정자가 잘 어울린다. 구름마저 두텁게 깔리니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풍경이 된다. 마치 이곳의 느티나무는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처럼 여겨진다.
입구가 아닌, 마을 옆 조금은 외딴 곳에 서 있는 나무가 생경하기도 하겠지만 마을 앞으로 난 지금의 도로와는 달리 옛적에는 이웃마을과 이어지는 길이 이곳을 지났음이라. 오랜 세월 마을을 지키며,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톡톡히 했을 나무의 나이는 무려 600살이다.
안내문의 보호수 지정일자는 1982년 11월 23일이다. 지금은 나이가 서른두 살을 더 먹었다. 나무의 높이만 18m, 가지를 늘어뜨린 둘레는 730m로 되어 있으나 오기인 듯하다. 그래도 나무가 주는 그늘은 조금 과장하자면 주변 수십 미터를 덮고도 남는다.
마을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이 느티나무 언덕에 서면 황산마을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혹처럼 올록볼록 솟은 옹이들은 비바람을 견뎌온 나무의 자랑스러운 흔적이다.
전나무 두 그루 / 널따란 바위 하나 / 산중의 암자 / 팔순의 보살은 / 종일 이곳에 머문다.
이곳에선 / 숲이 보이고 / 암자가 보이고 / 내가 보인다.
이곳에선 / 숲도 없고 / 암자도 없고 / 나도 없다.
종무소를 찾고 있는데 낯익은 사내가 아는 체를 했다. 알고 지내던 지역신문 기자였다. 주지 스님을 뵙고 막 내려가는 중이란다. 그가 가리키는 대로 종무소를 찾았다. 기와불사 건물에 있는 보살에게 오늘 이곳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고 하니 얼떨떨한 표정이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주지실로 향했다. 이윽고 주지 스님이 나왔다. “어, 내가 오라고 했어. 이 분.” 아뿔싸, 스님의 목소리는 며칠 전 전화기 너머로 들렸던 중년사내의 목소리였다! 스님인 줄도 모르고 식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실없이 물었었다. 전화기 너머로 껄껄껄 웃으며 농을 던지며 스님이 답했었다. "밥 안 주는 절도 있든가요. 여태 다니면서 밥도 못 얻어먹은 모양이오?"
화장실 딸린 암자의 방
원돈 스님은 해인사에서 3개월 전쯤 이곳의 주지 스님으로 왔다. 예전 이곳 지리산의 백장암, 도솔암, 벽송사에 머물렀다가 해인사를 거쳐 다시 이곳으로 온 것이다. “할머니가 쓰는 방을 내주세요. 화장실도 딸려 있어 편할 거요.” 보살은 스님의 다소 극진한 대접에 조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나대로 이 깊은 산중 암자에 화장실 딸린 방이 있다는 말에 의아했다. 청허당과 마주하고 있는 안국당은 템플 스테이나 절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이들을 위한 건물이다. 한옥으로 지은 방에는 실제로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애초에 빈방이 있으면 대충 끼워 자려고 했는데 산중에서 펜션 뺨치는 시설에서 잘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보살이 청소를 하는 동안 절을 둘러보았다.
▲ 변강쇠와 옹녀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나무장승
벽송사는 예전에 두어 번 온 적이 있다. 그때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사세가 제법 커진 것으로 보였다. 전나무 두 그루가 있는 입구 널따란 바위에 서면 벽송사 경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두 그루의 전나무가 벽송사의 중심을 잡아주는 셈이다. 맨 아래 너른 마당을 사이에 두고 청허당과 안국당이 마주하고 있고, 두 벌의 높은 축대를 오르면 ‘벽송선원’ 선방이 가운데에 자리하고 양 옆으로 요사채가 있다. 선방 뒤로 원통전이 있고 그 옆으로 산신각이 있다.
▲ 미인송(좌)과 도인송(우). 미인송과 도인송을 잘못 알고 반대로 쓴 글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는 오류다.
원통전 뒤로는 벽송사의 상징이 된 도인송과 미인송이 있다. 도인송은 꼿꼿한데 비해 미인송은 비스듬히 몸을 눕히고 있다. 제일 뒤쪽 예전 법당 자리로 보이는 곳에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다. 그 옆으로 승탑 세 기가 오순도순 모여 있다. 청허당 뒤 절 입구에는 장승 두 기가 보호각에 둘러싸여 있는데 변강쇠와 옹녀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선방 주위에선 발소리도 죽이시고, 특히 오전에는 멀리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저곳은 스님들이 씻는 곳이니 들어가면 안 되고, 요사채인 저기도 마찬가집니다. 저 꼿꼿한 나무는 도인송, 그 옆은 미인송… 저녁 공양은 5시, 아침 공양은 6시, 점심 공양은 11시니 시간 맞춰 오시고… 옷은 그대로 입으시거나 필요하시면 별도로 드리고… 또 뭐가 있지.” 보살 아주머니의 설명이 끝이 없다. 청소가 끝난 방 한쪽으로 담요 하나, 이불 하나, 베개 하나, 수건 두 장이 놓여 있다.
저녁 5시, 공양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들렸다. 공양간으로 갔다. 무심코 발우에 밥과 반찬을 담아 자리에 앉았더니 할머니 한 분이 야단을 친다. 그건 스님의 발우라며 그냥 접시에 먹으란다. 미처 접시가 있는 줄을 몰랐다. 발우가 먼저 눈에 띄어 거기에 음식을 담은 것이 사달이 났다. 처음이라 어리벙벙해서 주위를 살피고 있는데 불호령이 떨어진다. 불심이 아주 강해 보이는 할머니는 인상이 굳어졌다. 사실 스님들의 식기인 발우를 요즈음은 일반인들도 많이 쓴다고 강변하고 싶었지만 잠자코 있기로 했다. 옆에 있던 보살이 눈치를 채고 미처 설명을 하지 못했다며 할머니께 대신 사과를 했다. 어색한 분위기도 잠시, 묵묵히 공양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떡 한 접시를 내밀었다. 할머니였다. “말을 잘 들어야제. 떡 좀 자셔.” 방금까지 염라대왕 같던 할머니의 얼굴이 이번에는 부처의 얼굴이다. 팔순의 할머니는 두어 달 전 전라도 화순에서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암자에서의 커피 한 잔 그리고 적막
주지실에는 커피향이 자욱했다. 저녁 공양 후에 스님이 차를 한 잔 하자고 해서 올라왔더니 커피를 내놓았다. 찻잔이 수북이 쌓인 차반에 커피향이 진했다. 커피의 유행은 이곳 지리산 선방까지 점령했다. 허기야 우리가 흔히 차라고 할 때 녹차, 화차 정도만 떠올리는 경직된 사고는 커피 또한 차의 한 종류라는 사실을 쉽게 잊게 한다.
저녁 예불을 마치고 아래에 있는 서암정사에 잠시 다녀왔다. 어스레하던 하늘빛이 금세 캄캄해졌다. 선방 앞 돌층계에 걸터앉았다. 선방 문살로 비치는 촛불은 점점 붉어졌고 어스름이 절 마당 깊이 내렸다. 발자국 소리마저 사라지니 사방이 적막하다. 숨소리도 멈췄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정적을 깨는가 싶더니 휘파람 소리가 어두운 허공 가득 울리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우두커니 불 켜진 선방을 응시했다. 검다 못해 푸른빛이 선방 주위를 감쌌고 깨달음의 불빛은 더욱 선명해졌다.
방으로 들어왔다. 모두 네 칸인 안국당에도 불이 모두 꺼졌다. 이곳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여행자와 재수생, 그리고 할머니가 전부였다. 가져온 책을 한 권 꺼냈다. 폴 서루의 <아프리카 방랑>. 이 깊은 산사에서 아프리카 종단여행을 한다. 한참을 보았는데도 고작 두 쪽을 넘기지 못했다. 새 소리는 더욱 또렷해졌고, 다른 새들도 덩달아 울기 시작했다. 방문을 열었다. 새까맣다. 불빛 한 점 없다. 방문 여는 소리를 엿들었는지 새들도 울기를 멈췄다. 고요한 침묵이 천지간을 흘렀다.
스님이 환생해서 운다는 홀딱벗고새
추위가 몰려왔다. 아까 보살 아주머니가 방에 불을 넣어야겠냐고 물어서 새벽에나 넣으면 되지 않겠냐고 했던 게 화근이었다. 방바닥은 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요를 깔고 이불을 덮고도 추위가 가시지 않아 가져온 여벌의 옷을 모두 꺼내어 껴입었다. 목에도 두건을 두르고. 불을 끄고 누웠으나 냉기에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그렇다고 저녁 아홉 시면 모두 잠자리에 드는 산중 암자에서 누군가를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새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호. 호. 호. 호.’ 딱 네 마디로 끊어지는 노래는 어디선가 귀에 익은 듯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이 새가 ‘홀딱벗고새’라는 걸 알았다. 커피를 마시며 스님에게 새의 정체를 물었더니 절에서는 ‘홀딱벗고새’라고 부른다고 했다. 처음에는 농인가 했더니 사실이라고 정색을 했다. 일명 ‘홀딱새’로도 불리는 이 새는 두견과에 속하는 ‘검은등뻐꾸기’란다. 어떤 이는 ‘카. 카. 카. 고.’라고 운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홀. 딱. 벗. 고.’처럼 들린다고 한다. 이 홀딱벗고새가 울 즈음이면 이름도 비슷한 자주색 ‘뻐꾹채’가 피어나고 농부들은 모내기를 시작한다.
공부를 하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다가 세상을 떠난 스님들이 환생했다는 전설을 가진 새, 스님들에게 더 열심히 공부해서 반드시 해탈하라고 밤새 목이 터져라 ‘홀딱 벗고’를 노래한다. 모든 것을 홀딱 벗고 성불하라고. 그래서 오늘도 이곳에 와서 하안거에 들어간 스님의 방에서 밤새 울고 있다. ‘홀. 딱. 벗. 고.’
그러다 스르르 잠이 든 모양이다.
‘홀. 딱. 벗. 고.’
한밤중 다시 새 한 마리 날아오더니 선방 가까이서 울었다. 12시를 넘긴 시간에 겨우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것도 잠시, 무언가에 화들짝 놀라 잠이 깼다. 방문을 두드리는 맑은 소리가 처음엔 저 멀리서부터 아득히 울리더니 점점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사람의 노랫소리처럼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커졌다. 어느새 방문을 와락 열어젖힐 정도로 요란히 울렸다. 너무나 간절한 목소리에 비몽사몽간에 방문을 열고 나와 칠흑의 쪽마루에 걸터앉았다.
“나무화장세계해 비로자나진법신 현재설법노사나 석가모니제여해…”
간절했다. 너무나 간절해서, 애달프기까지 한 깊은 목소리. 마치 엄마를 찾는 아이처럼 구도의 절박한 염불은 짙은 어둠을 갈랐다. 도량석이다. 스님이 도량 곳곳을 돌며 새벽예불을 시작한 것이다. 보통 때보다 큰 목탁을 치며 절집을 돌며 염불을 한다. 처음에는 약한 음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높은 음으로 올렸다가 내리기를 반복한다. 일체 중생이 놀라지 않고 천천히 깨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대개 천수경을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경전도 하는데 이 스님은 ‘화엄경 약찬게’를 한 것이다. 온갖 꽃들로 장엄한 세계.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만난 선재동자, 그 선지식 안에 창녀와 승려가 함께 들어 있는, 자신이 길을 떠난 바로 그 자리에서 법을 깨닫는다.
툇마루에 정좌를 하고 어둠속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염불을 따라 외다 다시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모두가 깨어 있는 데 홀로 잠이 들다니…. 잠시 후 눈을 부릅뜨고 세수를 한 후 정좌를 한 채 명상에 잠겼다. 날이 밝으면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인 이곳에서 옛 조사들을 친견하는 감회에 젖을 수 있을까.
대만 여행이 이틀로 접어들자 바깥 풍경이 친숙해졌다. 잿빛, 아니 무채색의 이 도시가 낯섦이 아니라 꾸미지 않은 순수함으로 오히려 다가온 것이었다. 타이베이는 인구 700만의 대도시임에도 전혀 그런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101타워전망대에 가서야 대도시의 번잡함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여행 2일째, 오늘은 타이베이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갈 계획이다.
송산역에 들어섰다.
타이베이 도심에 있는 송산(松山)역은 지하철역과 기차역이 같이 있었다.
한국과 별반 차이가 없는 기차역 풍경.
매표를 한 후 기차역으로 향했다.
우리가 가는 곳은 타이루거 협곡이 있는 신성역, 출발하기에 앞서 빵집에 들어 간식을 샀다.
지하에 있는 기차역은 지하철도 지나가서 기차역이라기보다는 지하철역 느낌을 더 준다.
대만의 기차들도 우리나라처럼 여러 등급이 있었다. 크게 고속열차와 직행열차(자강호)와 구간열차(완행열차)로 나뉜다.
우리가 탄 기차는 '자강(自强)', 익스프레스 호였다.
이름대로 하면 고속열차인데 실은 직행열차다. 우리나라로 치면 무궁화호 수준이었다. 다만 대만이 산악지대가 많은 걸 고려하면 이 기차 또한 고속에 속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사실 산악지대의 특성으로 도로망이 발달되어 있지 않은 대만은 육로로 이동하면 시간이 갑절이나 더 걸린다.
좌석 번호는 우리와 달리 짝수와 홀수로 좌우가 나누어진다.
시내를 빠져나온 기차가 제일 먼저 선 곳은 빠두(八堵)역. 우리나라의 도시 외곽 기차역과 비슷한 풍경이다.
빠두역을 지나자 한적한 시골 풍경이 이어진다.
터널을 지난 기차는 스펀(十分)을 지나 이윽고 솽시역에 도착, 깊은 협곡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영동선을 타고 백두대간을 지나는 풍경 같다.
지도를 꺼내 기차가 지나는 위치를 확인한다. 기차로 떠나는 여행은 한국이든, 외국이든 아날로그적 풍경이다.
따리(大里)역에 이르자 바다가 보였다. 날씨가 흐려 회색빛이었지만 드넓은 동해는 우리의 바다와 흡사했다.
바다를 왼쪽에 끼고 한참이나 달리던 기차가 잠시 쉰 곳은 터우칭(頭城)역, 승강장에 놓인 나무의자가 인상적이었다.
터우칭부터는 논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드넓은 평야지대가 이어졌다.
쟈오시(礁溪)역 승강장 의자가 눈길을 끈다. 콘크리트로 만든 의자가 앙증맞다. 간이역에 퍽이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오시역을 지난 기차가 큰 도시를 만난다. 이란(宜蘭)시이다. 드넓은 평야지대에 있는 이란시는 대만의 동부에서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다.
기차가 지나는 곳이 어디인가 헷갈릴 때마다 옆자리에 앉은 대만 할머니에게 종종 물었다. 여행자는 중국어를한마디도 못했지만 역시 보디랭귀지는 세상의 모든 언어라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하는 많은 말씀을 다 알아 듣기는 힘들었지만 금세 친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기찻길은 뤄동(羅東), 수아오, 난아오, 허런, 신성을 지나 화련까지 이어진다.
기차가 시내를 가로지르자 오토바이를 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대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전용도로까지 있을 정도로 이곳에서는 오토바이가 아주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수아오역을 지나 난아오역.
한국의 오지 간이역에서처럼 푯말만 외로이 오도카니 서 있다.
드디어 타이루거 협곡으로 가는 신성역에 도착.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세계적인 관광지답게 작고 허름한 역은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타이루거 협곡을 둘러보고 다시 타이베이로 돌아오는 기차. 오후 4시 53분에 신성역을 출발하여 7시 16분에 타이베이역에 도착한다.
돌아오는 기차는 신성역을 출발해서 뤄동, 이란, 치두, 송산을 거쳐 타이베이역에 내렸다.
역무원이 검표를 하고, 마침 저녁시간이라 기차에선 도시락을 팔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거의 모든 승객들이 도시락을 먹었다.
타이베이역은 수도의 역답게 인파로 넘쳤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 건물 내 로비의 엄청난 크기였다. 의자가 아닌 바닥에 사람들이 주저앉아 기차를 기다리거나 이야기하는 모습들이 이색적이었다. 섬인 대만은 습한 편이어서 어디를 가도 냉방이 잘 되어 있다. 기차 안도 에어컨이 빵빵해서 여름이더라도 바람막이 옷 정도는 준비해야 체온을 유지할 수 있다. 대만에서의 기차여행은 느린 아날로그적 느낌이 충만했던, 아주 편안한 여행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노고단에서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화개로 내려갔다. 이즈음에서는 물길이 좁아져 강 아래의 하얀 모래밭은 볼 수 없지만 깊은 산속의 계곡처럼 자연그대로의 강줄기를 탐닉할 수 있다. 그 흔한 논 한 마지기도, 밭 한 뙈기도 없는 산기슭을 에돌아가는 길은 나그네의 들뜬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할 정도로 평탄하다.
미끄러지듯 달리는 강변 풍경이 잠시 멈췄다. 화개 삼거리 못 미친 곳에 있는 아주 오래된 쉼터. 강으로 바짝 붙은 언덕에 있는 이 쉼터엔 27년째 재첩국수를 말아내는 부부가 살고 있다.
등나무 덩굴이 쉼터를 가리고 있는데다 예전에 있던 트럭가게가 보이지 않아 혹시 주인내외가 더 이상 가게를 하지 않나 하며 주빗거리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오랜만에 찾은 여행자를 반가이 맞으신다.
이곳을 들락거린 지도 벌써 15년쯤 되었으니 섬진강 강물만큼이나 깊다면 깊은 인연이겠다. 걸음을 옮기는데 눈에 익은, 가게와 주방으로 쓰던 트럭이 보이지 않았다. 2년 전, 예전의 낡은 트럭은 버티다 못해 내려앉는 바람에 철거했단다. 대신 방도 한 칸 넣은 번듯한 조립식 가게가 새로이 생겼다.
“글쎄, 그 트럭을 치우던 날 어찌 그리 눈물이 나던지 모르겠소. 저 강물처럼 펑펑 울었다오.”
20년 넘게 함께해 온 트럭이 없어졌으니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는가. 트럭은 이미 주인내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 아니 삶 그 자체였으리라. 예전 트럭이 있을 때에는 그 안에서 잠도 자기도 하고, 음식도 만들고, 갖은 산야초 등의 물품들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기도 했다.
강 아래를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모든 게 조금씩 변해갔지만 아주머니의 국수 솜씨는 여전했다. 날씨라도 좋으면 쉼터 이곳저곳에 둘러앉아 아주머니가 말아내는 국수를 먹으면 그만이었다. 행여 날씨라도 추우면 강변 언덕 아래에 얼기설기 지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국수를 먹곤 했었다. 바람을 막아주는 언덕을 등지고 따뜻한 햇볕이 넘치는 강변 풍경을 바라보며 먹는 국수 한 그릇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예전의 낡은 트럭은 없지만 제법 번듯한 새 건물엔 이제 테이블도 몇 개 놓였다. 비바람과 추위를 피할 곳이 생겼으니 편리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허름한 비닐하우스에서 먹는 국수가 가끔 그립겠지만 섬진강 풍경은 변함없으니 애써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는 건 사치이리라.
강변 쉼터에 자리를 잡은 가게여서 이곳에는 원래부터 공원용 벤치와 긴 테이블이 있었다. 거기다 주인내외가 만든 평상 몇 개가 느티나무 아래 강변 쪽으로 놓이면서 강을 품는 곳이 되었다. 아마도 이곳만큼 멋진 풍경을 자아내는 곳은 전국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국수를 먹으면 섬진강이 맛국물이 된다. 아주머니는 푸른 섬진강에 국수를 말아내고 손님은 맑은 섬진강을 들이키는 셈이다.
재첩국수의 가격은 6천 원. 싸다고는 할 수 없는 가격. 그러나 알알이 통통한 재첩과 총총 썬 신선한 부추, 진한 재첩국물, 접시에 덤으로 내놓은 국수면, 잘 익은 묵은지, 메실 장아찌, 아삭한 열무 등을 함께 먹고 나면 비싸다는 생각은 싹 가시게 된다. 재첩국수를 먹는 순간, 누구든 국물 하나 남김없이 그릇을 비우게 된다.
그리고 길거리 쉼터에서 파는 음식이라고 가벼이 봐서는 안 된다. 음식이 맛깔스럽기도 하거니와 국수와 반찬을 내오는 그릇은 묵직하면서도 깨끗한 사기그릇이다. 예전에도, 지금도 아주머니의 정갈함은 여전하다. 게다가 섬진강 풍경까지 덤으로 있으니….
“전국에서 재첩국수를 파는 곳은 여기밖에 없습니다. 예전에 제가 진주에서도 팔았었는데, 지금은 여기서만 팔아요.”
벌써 7, 8년 전인가 보다. 아주머니가 몸이 많이 좋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섬진강을 오가며 아주머니를 볼 때마다 늘 안쓰러웠는데 이제는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전국에서 유일한 섬진강 재첩국수를 오래도록 맛볼 수 있을 터. 산 그림자 저무는 섬진강을 보며 오늘도 난 재첩국수를 먹는다.
“성큼성큼 산길을 걷고 있는 한 남자, 그 뒤를 여인이 총총 따른다. 여인은 애걸복걸했지만 남자는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남자를 찾아 지리산까지 왔건만 남자는 이미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후였다. 그래도 미련이 남은 여자는 매달렸다. 그러나 승려가 된 남자는 끝내 여자를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인은 결국 바위에 엎드려 통곡을 하고 만다. 훗날 사람들은 이 바위를 ‘곡성암’이라고 불렀다.”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 지엄(1464~1534)대사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와는 달리 벽송 지엄대사가 지리산에 들어온 건 57세이던 1520년 3월경이다. 지엄대사는 혜안을 가져 지리에도 통달했다. 수도할 명당을 찾다가 이곳보다 더 나은 곳이 없다고 생각해 이곳에 절터를 잡았다. 초암을 짓고 수도하였는데 이것이 벽송사의 시작이다. 뒷날 어느 사람이 암자를 증축하여 큰 절을 지은 뒤 ‘벽송암’이라 이름 붙였다.
남의 소를 세지 마라
지엄대사는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를 좋아하여 무과에 뽑혔다. 1491년(성종 22) 북방에 여진족이 침입하자 도원수 허종의 휘하에서 공을 세웠으나, ‘마음을 닦지 않고 싸움터에만 쫓아다니는 것은 헛된 이름뿐이다’라는 것을 깨닫고는 계룡산 조징선사의 제자가 되어 28세 때 출가했다. 벽계 정심에게서 법맥을 이어받아 지리산에 있으면서 불도를 닦아 불교계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70세가 되던 어느 날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강론하다가 ‘제법(諸法)의 적멸상(寂滅相)은 말로써 선설(宣說)할 수 없다’는 구절까지 설명한 뒤, 제자들에게 밖에서 구하지 말고 노력하여 진중할 것을 당부하고 입적했다.
붓다 또한 일찍이 경전의 글귀를 외는 사람을 비판하여 ‘남의 소를 세는 것 같다’고 했다. 자기 자신이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붓다도, 지엄대사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년의 붓다는 ‘너희는 자기를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삼되,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며, 또 법(진리)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되,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자주 설했다. 자기 자신과 법에 의지하는 것, <법구경>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자기의 의지처는 자기뿐이니 / 저 밖에 또 무엇을 의지하리오 / 자기가 잘 조어되는 때 / 얻기 힘든 의지처를 얻으리라”
“아침에 울력 있습니다.”
여섯 시 아침 공양을 마치자 원돈 스님이 일곱 시경 울력이 있음을 알렸다. 절 아래에 있는 서암정사까지 비질을 할 요량이란다. 일곱 시가 되자 하안거를 하고 있던 10여 명의 스님들이 요사를 나와 저마다 손에 빗자루를 하나씩 들고 마당에 모였다.
절에는 ‘삼사(三事)’라는 말이 있다. 수행에 가장 기초가 되는 일상적인 행위인 예불, 공양, 울력 세 가지를 이르는 말이다. 수행하는 이라면 누구든 함께해야 하는 일이다. 예불은 부처님에 대한 인사, 공양은 하루 세 끼 끼니를 잇는 일, 울력은 공동노동을 말한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것이 예불이고 생리적 욕구를 채워 생명을 지속시키는 것이 공양이라면 늘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꼭 필요한 것이 울력이다.
스님들의 비질이 경쾌하다. 새벽 공기를 가르는 비질은 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스팔트가 아닌 흙길이었다면 대지는 부드러운 비질에 잠이 깨어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을 것이다.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있는 나무장승에 이르렀을 때도 스님들은 허리를 펴지 않았다. 서암정사까지 내처 비질은 계속되었다.
서암정사에 이르렀을 때 홀로 의중마을 산길로 접어들었다. 서암정사에서 이어지는 의중마을 가는 산길은 옛날 마을에서 벽송사를 오가던 마을길이었다. 아스팔트길이 놓이고 한동안 버려졌던 이 산길은 둘레길이 열리면서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숲길의 청량함도 좋거니와 번잡한 차량을 피해 계곡 물소리를 멀찌감치 들으며 걷는 이 길은 보물 같은 길이다. 의중마을까지는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
“선생님, 스님 오셨습니다.”
주지 스님이 문밖에서 불렀다. 주섬주섬 옷을 챙기고 나왔더니 원응 큰스님 일행이 전각을 둘러보고 있었다. 지척에 있으면서도 스님이 벽송사를 방문한 건 5년 만이었다. 원응 스님이 방문할 거라며 어제 주지 스님이 사진 촬영을 부탁했었다. 원응 스님은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벽송사를 다시 지었고, 서암정사를 불사했다. 한국전쟁에서 숨져간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스님은 감회에 젖은 듯 벽송사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벽송사에는 단청이 없다. 전각들엔 화려한 단청 대신 하나같이 무채색이다. 또한 법당이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방인 벽송선원이 절의 가운데에 있어 여느 절과는 다른 가람 배치를 이루고 있다. 이는 벽송사가 조선 최고의 선풍을 일으킨 종가라는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예부터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벽송사에선 도인이 많이 나왔다. 그야말로 선풍이 넘치고 넘친 절이었다. 선방 사방으론 대나무 울타리를 쳐 세인의 발길을 막고 있다.
원응 스님이 선방에서 법문을 시작했다. 전국의 사찰에서 하안거를 위해 모인 십여 명의 스님들이 큰스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사방은 말 그대로 절간이었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간월루의 깊은 고요가 기둥에 기댄 큰스님의 주장자에 비스듬히 스며들었다. 원응 스님은 먼저 벽송사에 대한 이야기로 운을 띄웠다.
“벽송사는 벽송 지엄대사가….”
누가 상수일까
벽송 지엄에서 시작되어 부용 영관, 청허 휴정, 회암 정혜를 거친 벽송사의 선통은 경암 응윤 스님(1743~1804)에게로 이어진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것 같다. 5세 때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9세에는 이미 경서와 사기에 능통했을 정도로 뛰어났다. 9세 때 지은 시를 보고 스님의 아버지가 “이 아이는 일찍 죽지 않으면 출가하여 승려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15세에 출가하여 한암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38세에 법당을 열어 거의 20여 년 동안 대중들을 교화했다. 스님은 1783년경부터 벽송사에 기거하며 후학을 지도하여 절을 크게 번창시켰다. 저술로 <경암집>이 있는데 ‘벽송암기’가 수록되어 있어 절의 내력을 알 수 있다.
1803년 8월 응윤 스님은 벽송사에서 옥천(지금의 순창) 군수를 맞이한다. 옥천 군수는 “스님에 대해서는 들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직접 만나보니 한 그루 마른 산사나무 같고, 돌로 만든 나한 같습니다.”라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스님이 솔잎차와 산과일을 내어 놓으니 옥천 군수가 맛보고서는 “담박한 맛이 좋습니다. 고목사회(枯木死灰) 같은 스님의 살림살이로서는 제격입니다.”라고 시를 한 수 지어 주었다.
여위고 마른모습 목석처럼 무덤덤,
이 산에 머문 지 몇 년이나 되었는가.
흰 구름과 오래 살며 한 가지 일도 없고,
한 잔의 솔잎차와 상 위에 놓인 책 한 권뿐.
이에 응윤 스님이 화답했다.
마음의 기미 고요하여 불 꺼진 재 같고,
매일 같이 염불하는데 무슨 잡념 있으랴.
선가에는 본래 하나의 물상도 없으니,
오히려 우습구나 상 위에 쌓인 책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이 시들을 읽노라면 담박한 시구에 마음이 절로 맑아진다. 그러면서도 누가 더 상수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는 건 속인으로선 어쩔 수 없는 노릇. 두 사람이 하룻밤을 같이 보내면서 십수 편의 시를 주고받을 정도로 돈독해진 걸로 보아 둘을 놓고 상수와 하수를 따지는 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겠다. 다만, 옥천 군수가 ‘한 가지 일도 없고 한 잔의 솔잎차와 상 위에 놓인 책 한 권뿐’이라고 했지만 응윤 스님은 ‘본래 하나의 물상도 없으니 상 위의 책조차 우습다’고 했으니 알음알이의 불미한 나로서는 스님의 손을 치켜들 수밖에 없다.
구름 위 하늘에 머문 별유천지
법문이 끝나자 선방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스님들은 선방 뒤 원통전을 올랐다. 원통전은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겪을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을 듣고 큰 자비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해서 관음전으로도 불린다. 마침 사시마지를 올릴 때라 예불이 시작되었다. 그 옛날 벽송 지엄대사도 원통 법문의 시 한 수를 남겼다.
“꽃은 섬돌 앞 내리는 비에 웃고(花笑階前雨) / 솔은 난간 밖 바람에 운다(松鳴檻外風) / 오묘한 선지(禪旨) 왜 찾으려 하는가(何須窮妙旨) / 이것이 바로 원통 법문이라네(這箇是圓通)” - <벽송당야로송>
원통전 뒤 도인송을 지나 삼층석탑이 있는 언덕을 오른다. 두 그루의 푸른 소나무. 꼿꼿한 도인송과 그를 향해 비스듬히 누운 미인송. 마치 벽송 지엄의 이야기처럼 애틋한 사랑의 욕망을 넘어선 그윽한 선기가 이곳을 채운다. 소나무에 기대어 절을 내려다보니 그 옛날 응윤 스님의 벽송암에 대한 묘사가 절묘함을 깨닫는다.
“이곳은 평평하고 반듯하고 아늑하고 깊숙하며, 토질은 황토가 쌓인 언덕이다. 이 절터 밖은 모두 날카로운 바위가 험준하다. 이 절에 사는 승려의 마음은 자연히 담박하여, 탐하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도량은 물 뿌리고 비질하지 않아도 먼지가 일어나지 않는다. 혹 수행이 어긋난 자는 반드시 재앙을 만난다. 그러므로 재물을 탐하는 무리는 들어가지 못한다. 표주박을 들고 찾아온 운수납자들이 아침에 들어왔다 저녁에 나가며 이 암자에 머물지 못한다. 그래서 때론 잡초가 무성하다는 탄식이 나올 때도 있다.” - 석응윤의 <경암집-벽송암기>
벽송사는 겹겹 산봉우리들이 마치 활짝 핀 연꽃처럼 두른 곳의 한가운데에 있다. 암자가 앉은 모양새는 어찌 보면 푸른 학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이곳을 일러 ‘부용만개(芙蓉滿開)’ 혹은 ‘청학포란(靑鶴抱卵)’의 형국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또한 옛 사람은 ‘구름 위 하늘에 머물고 / 인간 세상밖에 따로 있는 / 연꽃이 활짝 핀 극락정토에 / 조사의 깨달음이 만대에 이어지는‘ 곳이라고 벽송사의 수려한 풍광을 말했다.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 벽송사
예부터 지리산에서 맑고 깨끗함으로 금대암과 더불어 손꼽혔던 벽송사는 벽송 지엄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층 석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절의 창건 시기를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로 보기도 하고, 다만 조선시대에 통일신라 양식으로 석탑을 만들었을 뿐 실제 절은 벽송 지엄대사 때인 1520년에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아무튼 벽송사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이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禪脈)에서 보면 벽계 정심, 벽송 지엄, 부용 영관, 휴옹 일선, 청허 휴정(서산), 부휴 선수, 송운 유정(사명), 청매 인오, 환성 지안, 호암 체정, 회암 정혜, 경암 응윤, 서룡 상민 등 기라성 같은 정통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 아울러 선교겸수한 대 종장들을 108분이나 배출하여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百八祖師 行化道場)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벽송사는 한국전쟁 때 빨치산의 야전병원(일종의 환자 비트로 보기도 한다)으로 이용되어 국군에 의해 모조리 불타버렸다. 이후 절이 제 모습을 찾은 건 1960년대. 쇠락해질 대로 쇠락해진 사찰을 중창한 이는 지금의 서암정사에 계신 원응 큰스님이었다. 벽송사에는 신라 양식을 계승한 보물 제474호인 3층 석탑과 경남유형문화재인 벽송선사진영, 경암집 책판, 묘법연화경 책판과 경남민속자료 제2호인 목장승의 문화재가 보존되고 있다.
벽송사는 지리산둘레길이 지나는 곳이다. 이 길은 스님들의 포행 길을 내어준 것이다. 여행자도 이날 금계-동강 구간을 걸었다. 벽송사에서 산길을 출발하여 용유담을 구경한 후, 둘레길 버스를 타고 추성동에서 내려 1km 정도의 비탈이 심한 아스팔트길을 걸어올라 다시 벽송사로 돌아왔다.
대만에 가면 누구나 꼭 가본다는, 대만 관광의 하이라이트 화롄(화련)의 타이루거(태로각) 협곡. 국가공원인 타이루거 협곡은 웅장한 대리석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험하고 깊은 협곡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대자연의 걸작으로 아시아의 그랜드캐니언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 세계를 통틀어서 손꼽을 수 있는 절경이다.
20km가 넘는 타이루거 협곡 중 우리가 둘러본 것은 제비가 많다 하여 이름 붙여진 ‘연자구’와 장개석 총통이 어머니를 생각하여 만들었다는 ‘자모교’ 등이었다.
신성역에 내렸을 때는 점심시간. 일단 인근 식당으로이동.
늘 느끼지만 중국 음식은 푸짐하다는 것. 우리는 잠자리를 중요시하는 데 비해 중국인들은 먹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이 맞는 듯. 중국을 몇 번 오가다 보니 이제 음식이 꽤나 맛있다는 사실. 특히 저 마파두부의 맛은...
식당 주위에는 고산족 문화촌이 있었다. 타이루거 협곡에 살던 아미족의 문화촌인데 관광객을 대상으로 각종 공연을 한다.
점심을 먹은 후 타이루거로 이동, 가는 길에 옥수수를 팔고 있어 잠시 차에서 내려 사먹었다. 한국과 별반 차이가 없는 맛, 근데 너무 달다.
고구마도 살까 하다 삶을 곳이 마땅하지 않아 그냥 패스.
드디어 타이루거 협곡으로 들어서다.
절벽에는 제비가 집을 지었다는 구멍들이 곳곳에 보인다. 해서 이곳을 '연자구'라고 한다.
'꽃보다할배'에서 봤던 웅장한 풍경에 절로 입이 벌어진다.
이 절벽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의 얼굴 모양을 한 바위가 있다.
대자연이 만들어낸 협곡도 걸작이지만 이 험한절벽에 도로를 낸 것도 혀를 내두를 만한 일이다.
마치 촉나라의 잔도처럼 허공에 매달린 절벽길과 터널 사이를 비집고 달리는 차들이 아슬아슬하다.
일단 차에서 내려 이 절벽길을 걷기로 했다. 길이 좁고 낙석의 위험이 있어 이곳을 관광하는 이들은 모두 헬멧을 착용해야 한다.
아, 저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강물.
이 길이 20km나 이어진다고 하니 과연 타이루거의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근데 여기서 느끼는 문제 하나.
좁은 도로에 차들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매연 냄새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소음과 매연은 이 경이로운 자연의 풍경을 감상하는데 엄청 방해가 된다는 사실.
이곳이 제대로 보존되려면 차량을 통제하고 셔틀버스를 이용하게 하고 트래킹 길을 만든다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절벽 아래를 보면 까마득하고, 절벽 위를 보면 아득하다.
물이 뿌옇다. '꽃보다할배'에서 이서진이 회색의 물빛이 궁금해서 내려갔던 곳.
한참을 지나나 다시 그림 같은 풍경이 나왔다.
장개석이 어머니를 생각하여 만들었다는 '자모교'.
계곡에 우뚝 솟은 정자 하나가 절경을 빚어낸다.
그 아래로 수십 길이나 되는 하얀 대리석 절벽이 장관을 이룬다.
숨을 멈추고 자연의 걸작에 감탄을 쏟을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자에 올라 다시 협곡 풍경을 내려다본다.
정자도 역시 대리석으로 지었다. 고산족이 운영하고 있는 휴게소에서 유명한 망고 주스를 한 잔 먹은 후 협곡의 삭도를 닦는 장면의 사진을 전시한 전시관에 잠시 들렀다. 이 길을 닦으면서 수백 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오늘 우리가 이곳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것도 모두 그분들의 덕이다. 깊이 합장했다.
타이루거 협곡 일대에는 아미족 문화촌이 있고 대리석과 비취산지로 유명하다. 특히 이곳은 추석이나 연휴에는 귀성객이나 관광객의 증가로 열차 예약이 쉽지 않다는 걸 참고해야 한다.
서산에 노을이 진다. 붉은 노을빛에 마음속 번뇌를 한 움큼 던져 본다. 해가 떨어지자 번뇌도 사라진다.
푸른 눈의 스님이 종을 친다. 종소리는 지리산 북쪽 골짜기를 우렁차게 울린다. 여차하면 칠선계곡을 타고 올라 천왕봉까지 이를 기세다. 모두 서른세 번. 어스름의 고요를 뚫고 멀리 울려 퍼진다. 중생들의 무명을 깨우고 혼을 깨우는 소리이다.
옛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혼백으로 해체된다고 했다. 이승도 저승도 아닌 중음(中陰)이라는 곳을 혼이 떠도는데 불교에서는 그 기간이 49일이라고 봤다. 해서 49제를 지냈다. 혼이 중음을 떠돌면서 유일하게 듣는 지상의 소리가 종소리이다. 종소리를 듣고 망자는 혼미한 정신을 차려 지옥, 축생, 아귀의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좋은 세계로 환생할 수 있다.
절에서 불사를 할 때도 종 만드는 불사가 공덕이 가장 크다고 한다. 종은 아침저녁으로 두 번 치는데 아침에는 스물여덟 번, 저녁에는 서른세 번 친다. 28은 불교에서 삼계(三界)인 욕계의 6천, 색계의 18천, 무색계의 4천을 합한 28천의 중생들이 들으라는 것이고, 33은 욕계 6천의 제2 도리천인 33천의 천상세계에 각각 들리도록 종을 치는 것이다.
해가 지자 종을 치던 스님은 그림자로 남았다. 육신의 모든 껍데기를 훌훌 벗어버린 참그림자. 그 모습이 하도 엄숙하여 심장이 요동친다. 호주에서 온 벽안의 스님은 묵언수행 중,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누르고 말았다.
지리산의 하늘 정원
의탄리에서 계곡을 따라 산길을 오른다. 근래에 벽송사보다 더 알려진 서암정사로 가는 길이다. 여행자는 예전 이곳을 ‘지리산의 하늘정원’이라며 그 아름다움을 여러 매체에 소개한 적이 있다. 지어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연암벽에 새겨진 독특한 불상 조각과 산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쁜 정원을 가진 암자는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최근 사찰에서 불사(佛事)를 하면 형식과 규모에 급급한 나머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공사들이 더러 있다. 그래서일까. 옛것에 대한 강한 믿음은 요즈음 조성한 어떤 불사에도 마음 한 자락 내어줄 여유를 갖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곳의 불상 조각을 처음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뿐만 아니다. 이 불상들이 먼 훗날 훌륭한 유산이 될 것이라는 섣부른 예단조차 할 정도로 조각은 아름다웠다. 층계를 올라 용왕당을 지나 산신각이 있는 비로전에 이르면 그 뛰어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마애불을 만나게 된다. 이 놀라움은 벽면 전체가 불상으로 가득한 석굴법당에 들어서면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 비로전 마애불
그러나 서암정사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예전의 그 소박했던 풍경 대신 화려함이 암자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소박하되 누추하지 않았던 옛 암자와는 달리 지금의 암자는 화려했다. 사치스럽지는 않으나 번듯한 풍경이 낯설었다. 무엇 때문일까. 가만 살펴보니 종이 매달려 있던 소박한 옛 법당 미타굴 대신 새로 지어진 눈부신 대웅전 때문이었다. 지리산 속에 푹 안긴 예전의 소담스런 풍경이 아니라 지리산의 기를 다 모은 채 주위를 호령하는 위압적인 자리매김 때문이었다.
▲ 옛 법당 미타굴
모든 것은 변한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정된 모든 것은 연기처럼 사라지리라. 논밭이 있던 벽송사도 말끔히 정비되었고 돌층계를 올라 고목 사이를 지나갔던 서암정사의 옛길도 달라졌다. 오직 그대로인 건 저 고목인데, 한구석에 널브러진 채 팽개쳐 있다. 쓰임을 다했는지, 그냥 버려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쓸쓸한 기운이 주위를 맴돈다. 벼랑 끝 소나무 한 그루가 지리산 다랑논을 배경으로 매달려 있던 풍경도 사라졌다. 예전의 그 소박했던 굴뚝도 사라지고 금빛으로 광채를 내는 법당이 푸른 잔디밭 위로 우뚝 솟아 있다. 다만, 하늘정원이라는 이름처럼 예뻤던 연못은 그대로였다.
지리산 비극의 현장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정토를 축소시켜 묘사한 석굴법당. 극락이 서쪽에 있으니 불상은 대개 동쪽을 보고 있으나 이곳에선 자연암벽에 불상을 새겨야 했기 때문인지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석굴법당은 암자에서 제일 서쪽에 있다. 서암정사의 동쪽은 수십 년 전 지리산 원혼들이 스러져간 골짜기이다.
왜 이곳에 석굴법당을 조성하고 자연암벽에 불상을 조각했을까. 한라산의 탐라계곡, 설악산의 천불동계곡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꼽히는 칠선계곡엔 우리가 애써 잊고 있던 피비린내 나는 비극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지배와 저항, 유람과 은둔의 역사의 양면에서 지리산은 은둔과 반항, 저항의 역사를 한 축으로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 한국전쟁 전후의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 고스란히 담긴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인근에 있는 벽송사가 빨치산의 야전병원이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지리산 북부에 있는 칠선계곡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빨치산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 잔여세력이 산악지대로 숨어들면서 지리산은 ‘빨치산과 토벌대’라는 역사의 격랑에 휩싸이게 된다. 그해 11월 남로당 연락부장이며 일제 때 일경의 검거를 피해 지리산에 은신한 경험이 있는 이현상이 자진해서 지리산에 들어가면서 여순사건의 잔여세력과 부근의 야산대 등으로 500명 규모의 ‘지리산 유격대’ 일명 빨치산이 조직됐다.
지리산 유격대는 49년 7월부터 그 공식 명칭이 제2병단이 되었다. 병단장은 6연대장을 겸한 이현상이었고, 동부 지리산은 제5연대장 이영회가 맡았다. 바로 이곳 벽송사 일대는 이영회 부대로 일컬어지는 경남도당이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경남도당은 칠선계곡과 벽송사 골짜기로 이어지는 지리산 하봉 근처에 근거지를 두었다. 초기에는 인민군 패잔병 집단인 302, 102부대 등이 핵심 무력이었는데 후에 ‘불꽃사단’이라는 유격대를 편성했다. 사단장은 경남도인민위원회의 부위원장이던 김의장, 참모장은 노영호였다.
그러다 1951년 11월 28일, 경남유격대 사령관인 이영회가 62명의 대원과 함께 천왕봉 동북방의 상봉골이라는 골짜기에서 전경 제5연대 수색대와 교전하던 중 이영회는 죽고 나머지 부대원들도 거의 전멸하게 된다. 경남유격대를 상징하던 이영회의 죽음과 함께 지리산 주변, 아니 남한 전역의 빨치산 편제부대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사실 이곳뿐만 아니라 영원사골, 백무동골, 칠선골, 벽송사골, 조개골, 대원사골, 중산리골, 거림골, 삼점골 등 지리산 일대가 모두 빨치산의 활동지였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고… 그들 빨치산의 운명은 5여 년 만에 비극적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이 비극이 빨치산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그 반쪽인 경찰과 국군의 참담함도 마찬가지였다. 지리산에서 5년간 죽어간 이만 해도 수만 명이었다. 당시에는 서로 죽고 죽이는 적으로, 빨치산과 토벌대로 구분되었지만 결국 하나의 민족일 수밖에 없는… ‘불이(不二)’였다. 외팔이 대장으로 군경 토벌대를 놀라게 했던 유명한 빨치산 최태환은 이 비극이 결국 ‘불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최태환은 낙동강 전선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인민군과 백마고지전투에서 쓰러진 국군이 결국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듯이, 그들에게 있어서 조국은 하나였다고 말했다.
▲ 2007년 어느 가을날의 서암정사
원혼을 달래다
그로부터 한참 후인 1960년대, 한 스님이 벽송사에 들어오게 된다. 청산에 파묻힐 요량으로 심산유곡의 수행처를 찾아 발길 닿는 대로 온 원응 스님이다. 벽송사에 들어온 원응 스님은 1970년대 초 어느 봄날 알 수 없는 기운에 이끌려 걸음을 멈추게 되는데 그곳이 지금의 서암정사이다. 원응 스님은 이곳에서 한국전쟁의 참화로 희생된 무수한 원혼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그 상처를 달래기 위해 1989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불사를 했다.
오늘도 서암정사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특히 젊은 커플들이 많다. 예쁜 연못에 탄성을 지르고, 자연암벽의 불상 조각에 감탄하고, 굴법당에서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빌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온갖 추억에 젖는다. 그러나 까마득한 전설이 아닌 불과 반세기 전에 피로 얼룩졌던 비극이 이곳 골짜기에서 벌어졌다는 걸 아는 청춘들은 없는 듯하다. 그들과 같은 또래의 너무나 많은 청춘들이 이 산에서 죽어갔다는 사실을….
무상한 삶의 진리를 일깨우는 종소리가 어둑어둑한 골짜기에 울려 퍼진다. 지리산 골골마다 서려 있는 비극의 혼을 달래는 것이리라. 사랑도 미움도 환희도 분노도 마침내 모든 것이 투명으로 돌아간 것이리라. 원한이랑 이곳에 묻어두고 영혼이나마 훨훨 극락에 올라 자유로우소서!
수많은 강물 만 갈래 시냇물, 바다에 가니 한 물맛이로다. 百千江河萬溪流 同歸大海一味水
삼라만상 온갖 모습이여, 고향에 돌아오니 본래 한 뿌리이니. 森羅萬象各別色 還鄕元來同根身
- 서암정사 입구 돌기둥에 적힌 시
▲ 원응 큰스님
서암정사
서암정사는 사천왕문을 들어서서 배송대를 지나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다. 대웅전은 2012년도에 완공했고 지하에는 원응 스님이 1985년부터 금니사경을 해온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금니사경전시관이 있다. 범종각이 있는 연못 일대는 이곳이 ‘지리산의 하늘정원’이라 불릴 정도로 공중에 뜬 연못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범종각에서 바라보는, 망망하게 아스라이 펼쳐진 지리산 골짜기로 넘어가는 일몰은 곧 화엄의 세계다.
이곳에서 눈여겨봐야 할 곳은 석굴법당이다. 원응 스님이 한국전쟁의 참화로 희생된 무수한 원혼들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1989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불사를 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춘 곳이다. 석굴법당 안에는 아미타불을 위시한 보살상들이 불교의 이상세계를 상징하는 극락세계로 정교하게 장엄되어 있다. 암자의 가장 높은 곳에는 비로전이 있다.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 선재동자 등의 불보살을 모신 비로전은 극락정토와 화엄세계가 서로 조화로운 화엄정토의 도량을 구현했다.
이처럼 큰 불사를 조성한 데는 석공들의 노고가 많았다. 석굴법당의 아미타 본존불은 이승재 석공이 시작했고, 본존불 외에 석굴법당의 여러 부조는 홍덕회 석공이 조각했으며 맹갑옥 석공이 조역을 했다. 주산신과 독수성은 맹갑옥 석공이 바깥 돌을 치고 홍석희 석공이 세 조각(細彫刻)으로 마무리했다. 사천왕상과 비로전은 이종원 석공이 중심이 되어 완성했고 배송대는 이금원 석공이, 용왕단은 이인호 석공이 각각 조각했다.
지리산 장당골 내원사. 대웅전 옆 층계를 오르면 비로전이다. 비로전에선 아주 특별한 유물을 만날 수 있다. 보물 제1021호로 지정된 비로자나불상이 그것이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풍모를 가진 불상이다. 근데 아무리 둘러봐도 부자연스럽다. 등은 누가 일부러 깎은 듯이 직각이고 엉덩이는 살짝 들린 데다 무릎 부분도 깎여 나갔고 광배는 부러진 상태에다 목에는 시멘트로 깁스를 했다. 도대체 이 불상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기에 온통 상처투성이란 말인가?
원래 이 불상은 내원사에 있었던 불상이 아니다. 1947년 석남리에 사는 이성호 형제는 나무하러 갔다가 험준한 벼랑에서 불상을 발견하게 된다. 형제는 이 불상을 옮기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무게를 줄여 쉽게 가져가려고 무릎 밑과 등 부분을 깎아 버렸다. 즉 광배와 좌대를 몸통과 분리해서 뜯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인근 마을에서는 이 불상을 ‘뜯어온 불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가져온 불상은 약 10년 동안 그들의 집에 보관했다가 내원사 중창 때 주위의 권유로 내원사에 양도하여 옮겼다고 한다. 그들이 갔던 벼랑은 폐사지인 석남사였다.
뜯어온 상태에서 내원사에 방치되다시피 있었던 불상은 1966년 내원사에 들른 신라오악학술조사단에 의해 비로자나불로 판명되었다. 당시 조사단은 광배와 대좌를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그 후 부산시립박물관에 소장 중이던 ‘영태2년명납석제사리호’(국보 제233호)에 새겨진 명문을 보고 본래 불상이 있었던 곳이 석남사 관음전 터임을 알고 좌대와 광배를 찾게 되었다. 상처 난 곳은 시멘트로 붙이고 좌대에 불상을 앉히고 광배를 붙여 비로전에 모셨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사리호에 쓰인 글자를 근거로 연구한 결과 이 사리호가 애초 내원사 비로자나불상 안에 안치되었던 것이며, 불상은 신라 혜공왕 2년인 776년에 제작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로자나불로 판명되었다. 사리호는 불상의 좌대 중대석 중앙의 구멍에 봉안되어 있었다. 모두 15행 136자의 이두명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766년 법승, 법연 두 스님이 젊어서 죽은 두온애랑 소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남암사 관음바위(절벽)에 비로자나석상을 안치한다’는 내용이다. ‘두온애랑’은 화랑으로 추정되며 젊어서 죽은 그를 애석하게 여긴 부모가 비로자나불을 제작하여 안치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사리호의 발견으로 당시 지리산의 노고단과 세석고원이 화랑들의 수련장이었다는 설은 힘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석남사는 어디쯤일까. 조선시대의 문헌에선 석남사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1632년에 성여신이 지은 <진양지> ‘불우’ 편에 석남사에 대한 기록이 한 줄 보인다. <진양지>에는 ‘本石南寺在德山長堂洞廢久, 본래 석남사는 덕산 장당골에 있었는데 폐사된 지 오래됐다’고 적고 있다(진양지 한글 번역본에서는 ‘本’자를 절 이름으로 오인하여 ‘석남사’를 ‘본석남사’로 잘못 적고 있다.). 오늘날의 내원사 장당골에서 오르거나, 석남상촌마을(삼장면 석남리)에서 오르면 900고지 능선에 제법 너른 절터가 있는데, 이곳이 석남사 터로 추정되고 있다.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비로자나불은 세월의 풍파를 이미 달관하고 있는 모습이다. 상처투성이 몸이지만 화엄불의 주존불로서 위엄을 잃지 않고 있다. 어디서나 두루 비치는 광명. 원만하고 자비로운 얼굴 표정과 안정감 있는 풍모에 왼손 검지를 세우고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지권인의 수인에선 엄숙함이 엿보인다. 승과 속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이(不二),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손 모양이 당당하다.
세월 속에 견뎌온 것은 불상만이 아니다. 대웅전 옆에는 1950년대에 도굴꾼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61년 복원해 놓은 석탑 한 기가 있다. 비록 지붕돌이 부셔지고 상륜부가 남아 있지 않지만 보물 제1113호로 지정된 당당한 석탑이다. 철분이 많아 인근 대원사의 석탑만큼 이 탑도 붉다. 지리산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이곳 내원사의 유물들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몇몇 석재들에서도….
순간순간은 아픔이었고 상처였지만 역사의 장대한 흐름에선 일순간의 흔적으로 남을 뿐이다. 오히려 그 상처로 인해 그것의 가치는 한층 돋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이 두 보물로 인해 지리산의 작은 절 내원사는 더욱 속 깊은 산사가 된 듯하다. <보왕삼매론>에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다.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쉬울 터,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고 했으니 그 말씀이 여기에도 꼭 들어맞는다고 하겠다. 그래서일까. 절 마당 한편에 <보왕삼매론>이 걸려 있다.
지리산 덕산 유덕골. 호리병의 병목처럼 좁은 입구와는 달리 안으로 들어서면 산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제법 너른 분지가 있는 마을이다. 야트막한 산이 사방을 둘러싸고 그 바깥으로 지리의 높은 산들이 한 번 더 에워싼다. 그 정점에 천왕봉이 늠름한 자태를 드러내는 이 고장은 큰 선비 남명 조식의 서기가 서린 예로부터 복지로 꼽던 곳이다.
이 복된 땅에서 대원사 방면으로 길을 잡으면 어느 순간 들판은 사라지고 땅은 이내 좁아진다. 다시 깊은 산중의 외딴 길, 그 끝에서 작은 사찰 내원사와 마주하게 된다. 계곡을 따라 간 길은 2.6km. 1632년 부사 성여신이 지은 <진양지>에는 덕산사가 ‘덕산촌 위 5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거리로 환산을 해도 대략 일치한다.
내원사는 사찰이라고 하기에는 작고, 암자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큰 산사이다. 지리산 사찰 중 그나마 세인들의 발길이 덜한 곳이다. 최근에 바로 아래 캠핑장이 생기고 여름이면 물놀이 인파로 붐비지만 그때를 제외하곤 세상의 소란스러움은 계곡 물소리에 묻혀 산사는 늘 고요하다.
온통 초록이다. 가을이 이미 문턱을 넘어섰음에도 산중의 절집은 아직 초록이다. 자동차의 엔진을 끄자 모든 것이 일순간 적막의 포로가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차창을 여니 우렁찬 계곡의 물소리가 순식간에 밀려왔다.
“공양 좀 하시지요.”절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아주머니 둘이 아는 체를 한다. 공양주인가 했는데 부산에서 온 신자란다. 마치 제집인 양 거리낌 없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내남 구분 없는 무등의 세상이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절밥이라는 말에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신 설거지는 하셔야 됩니다.”
비록 억셌지만 정이 푹 묻어나는 경상도, 그것도 부산 말투였다. 전국의 사찰을 가보면 불심이 강한 사람들로 경상도, 특히 부산 불자들을 당할 자는 없다. 강원도 백담사에 가도, 전라도의 어느 외진 사찰에 가도 어김없이 부산 불자들을 쉬이 만날 수 있다. 오죽했으면 전라도 사찰은 경상도 불자 없으면 유지가 안 된다는 말이 나돌겠는가.
물소리를 따라 계곡을 내려갔다. 내원사는 장당골과 내원골의 두 골짜기 몰이 모여드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절묘한 산사의 풍경은 500년 전에도 똑같았던 모양이다. 1487년 9월 27일에서 10월 13일까지 지리산을 유람한 남효온은 <지리산일과>에서 덕산사(내원사)에 대해 아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절은 두 물줄기가 합류하는 언덕에 있는데 대나무가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왼쪽에 있는 냇물은 웅덩이에 고였다가 다시 흐르는데 그곳을 ‘용연’이라 하였다. 오른쪽에 있는 폭포는 물이 떨어져 여울을 이루는데 ‘부연’이라 하였다.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이 깊었다.”
마치 지금의 내원사 풍경을 기록한 것처럼 오늘날의 모습과 똑같이 묘사된 옛 풍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남효온이 다녀간 먼 훗날 절은 폐사가 되어 1959년에야 다시 세워지는 곡절을 겪게 되지만 자연은 늘 한결같았다. <진양지>에는 추강 남효온의 글(다른 판본으로 보인다)을 인용하면서 ‘그 위에 반석이 있어 평평하고 발라서 나무 그늘 아래에 백 명이 앉을 만하다’고 적고 있다. 그 너른 반석이 지금의 ‘명옹대(明翁대)’이다. 백 명은 과장되었지만 수십 명은 너끈히 앉을 정도로 넓고 평평한 바위가 지금도 계곡 가에 그대로 있다. 또 ‘4․5리가 되는 골짜기 입구 좌우의 냇돌이 험하고 기이하여 매우 볼 만하다’고 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내원사로 들어오는 길은 선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내원사로 불리지만 당시는 덕산사였다. 덕산사라는 이름은 그 후에도 더러 문헌에 등장한다. 1651년 11월 지리산을 유람한 오두인은 <두류산기>에서 ‘덕산사의 승려 수십 명이 임무를 교대하여 우리를 맞이하러 왔다(德山寺僧數十人替迎而來)’고 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덕산사가 광해군 1년인 1609년에 원인 모를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전하고 있어 1651년에는 이미 폐사가 된 것으로 보이는데 덕산사의 승려가 마중을 나왔다고 한 것이다. 아마 오두인이 다른 사찰의 승려를 덕산사 소속으로 잘못 알고 기록했을 수도 있겠다.
그로부터 70년 뒤인 1719년 5월 지리산을 유람한 신명구는 그의 <유두류일록>에서 ‘불장암 골짜기를 출발해 2리쯤 가니 덕산사가 있었다. 절터(古基)와 계담, 암석이 볼 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선 덕산사를 이미 폐사된 옛 절터(古基)로 기록하고 있다.
1825년 김선신의 <두류전지>에도 덕산사를 기록했으나 <두류전지>는 직접 가서 보고 적은 기행문 형식의 유산기가 아닌 기존의 자료를 종합하여 지리산에 대해 적은 산지였다는 데서 절의 폐사 여부에 대한 정확성은 기대할 수 없다. 1632년 부사 성여신이 지은 <진양지>에도 덕산사가 ‘덕산촌 위 5리에 있다.’고 간단히 그 위치만 언급하고 있어 폐사 여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비로자나불은 세월의 풍파를 이미 달관하고 있는 모습이다. 상처투성이 몸이지만 화엄불의 주존불로서 위엄을 잃지 않고 있다. 어디서나 두루 비치는 광명. 원만하고 자비로운 얼굴 표정과 안정감 있는 풍모에 왼손 검지를 세우고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지권인의 수인에선 엄숙함이 엿보인다. 승과 속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이(不二),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손 모양이 당당하다.
세월 속에 견뎌온 것은 불상만이 아니다. 대웅전 옆에는 1950년대에 도굴꾼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61년 복원해 놓은 석탑 한 기가 있다. 비록 지붕돌이 부셔지고 상륜부가 남아 있지 않지만 보물 제1113호로 지정된 당당한 석탑이다. 철분이 많아 인근 대원사의 석탑만큼 이 탑도 붉다. 지리산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이곳 내원사의 유물들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몇몇 석재들에서도….
순간순간은 아픔이었고 상처였지만 역사의 장대한 흐름에선 일순간의 흔적으로 남을 뿐이다. 오히려 그 상처로 인해 그것의 가치는 한층 돋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이 두 보물로 인해 지리산의 작은 절 내원사는 더욱 속 깊은 산사가 된 듯하다.
<보왕삼매론>에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다.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쉬울 터,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고 했으니 그 말씀이 여기에도 꼭 들어맞는다고 하겠다. 그래서일까. 절 마당 한편에 <보왕삼매론>이 걸려 있다.
“참, 무료하네!”
적막을 깨는… 무심코 내던진 일행의 한마디가 귓가를 울린다. 몇 시간째 멍하니 앉았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하다. 무료하다? 그래 무료해야지. 삶은 본래 무료한 것인데, 무료함을 느끼는 것이 본디 정상적인 삶인데, 그걸 견디지 못하다니…. 무료함을 느끼지 못하는 오늘날의 우리네 삶을 과연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