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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최고의 전망대, 바로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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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최고의 전망대, 바로 이곳!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⑩] 지리산의 옛 베이스캠프, 금대암

 

마천에서 임천 냇물을 건너지 않고 금대산 비탈을 오른다. 산 그림자에 부셔지는 뿌연 오후의 빛. 길 중간쯤에서 잠시 건너편 마을을 내려다봤다. 도마 마을 다랑논은 예전의 풍경이 아니었다.

 

가을이면 황금빛 다랑논으로 전국의 사진가들을 불러 모았던 지리산의 명소는 더는 찾은 이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돈도 안 되고, 노인밖에 남지 않은 농촌의 현실에서 인내와 고통이 따르는 벼농사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러는 밭으로, 더러는 그나마 편한 작물 재배지로, 돈이 되는 작물이 계단식 논을 채우고 있어 가을인데도 아직 초록으로 푸르기만 하다.

 

▲  금대암 가는 길에서 본 도마마을 다랑논(2009년)

 

벼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건 단순히 풍경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토대가 없어지는 것이다. 문화가 없어지는 삭막함이란 더 이상 기억하고 추억할 것이 없는 불행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것이다.

 

평야지대의 논은 하나같이 반듯하고 산골짜기의 논도 자로 잰 듯 반듯해진 요즈음 이곳 지리산 산간마을에서 그나마 남아 있는 의중, 상황, 사포, 도마 마을 등의 층층 다랑논을 보존할 수는 없을까. 천년 넘게 이어온 이 땅 벼농사의 마지막 서정이 안타깝고 눈물 난다.

 

 지리산 파노라마. 왼쪽부터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장터목, 세석평전, 영신봉, 칠선봉...

 

금대지리, 그 장엄한 파노라마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금대산 바로 아래 벼랑에 있는 금대암은 해발 800미터가 넘는 곳에 있다. 암자에 이르니 스님 혼자 마당을 휘적휘적 걷고 있다. 방금 입구에서 수십 명의 단체 손님이 지나가서인지 “혹시 일행이요.” 하며 묻는 스님의 눈빛엔 언뜻 경계가 비쳤다. 같은 일행이 아니라고 했더니 스님은 순식간에 나한전으로 모습을 감췄다. 스님마저 마당을 비우니 암자는 깊은 적막에 빠졌다. 적막을 깨뜨린 건 누구인가.

 

▼ 나한전

 

일망무제. 금대암에 오르면 지리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금대암에 서면 왜 이곳이 최고의 지리산 전망대로 불리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금대암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노라면 활처럼 뻗은 지리능선이 한 폭의 그림인 양 손을 뻗치면 잡힐 듯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915m인 천왕봉을 위시하여 왼쪽으로 중봉과 하봉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제석봉․장터목․연하봉․촛대봉․세석평전․영신봉․칠선봉 등 1500m가 넘는 거봉들이 구름 위로 솟아 있다.

 

 지리산 파노라마. 왼쪽부터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장터목, 세석평전, 영신봉, 칠선봉...

 

다시 이 거봉들을 호위하듯 해발 1000m가 넘는 20여 개의 높은 봉우리들과 80여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서로 어우러져 한 편의 장엄한 파노마라를 이루고 있다. 이따금 봉우리마다 걸려 있는 구름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뿜는다. 이 장관이 바로 ‘금대지리’라 불리는 함양팔경이다.

 

 

예로부터 금대암에서 보는 지리산 풍경은 최고로 꼽혔다. 그중 1643년 8월 20일에서 26일까지 지리산을 유람한 박장원의 <유두류산기>를 보면 그 감동이 오늘까지도 전해진다.

 

“8월 25일 맑음, 가마를 타고 금대암에 들렀다. 안국사에서 5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지세가 외딴 곳에 있는데, 산의 한 면은 조금도 가려진 곳이 없어 마치 금강산이 한눈에 보이는 정양사의 남루와 같았다.(현재 내금강면 장연리 금강산에 있는 정양사의 남루는 경내에 있는 작은 누각이지만 이곳에 오르면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한꺼번에 구경할 수 있는 금강산에서 가장 유명한 누각이다.)

 

하룻밤 묵었던 제일봉인 천왕봉을 멀리서 바라보니 하늘에 기둥 하나 꽂혀 있고, 구름은 모였다 흩어졌다 하니 참으로 옛사람이 ‘내일이면 인간 세상의 일 해를 따라 갈 터이니, 황홀히 하루저녁 신선세계 나그네 되리’라고 한 것과 같았다. 그래서 시를 지어 읊었다. ‘짚신을 신고 첩첩 산중 험한 길을 다 밟고서 / 다시 오랜 사찰 금대사를 향해 돌아왔네. / 제일봉인 천왕봉 정상 어제 자던 그곳에는 / 흰 구름과 푸른 안개에 보일락 말락 하는구나.’”

 

 

이곳에서 지리능선이 모두 보이니 옛사람들도 지리산을 오를 때 금대암에서 등반 여정을 가늠해봤다. 지리산을 유람할 때 금대암이 일종의 베이스캠프였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전진캠프(advance camp)’였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이야 차로 지리산 아래 마을 어느 곳이든 반나절 만에 이를 수 있고, 종주도 넉넉잡아 3박 4일이면 충분하지만 예전에는 마을까지 오는 데 며칠이 걸리고 등반을 하면 보름에서 한 달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 산청 단성의 단속사지나 쌍계사 등의 큰 사찰은 ‘베이스캠프(base camp)’ 구실을 했고, 천왕봉 바로 아래에 있던 향적사와 천불암 등의 작은 암자는 ‘어택캠프((attack camp, final camp)’, 금대암과 벽송사 등의 주요 암자는 지리산을 오르기 전 전진캠프 역할을 했던 것이다.

 

▲  해우소

 

잘 있느냐 금대암아!

금대암의 명물 전나무를 보기 위해 해우소로 내려간다. 푸른 이끼가 낀 돌층계를 내려서니 양편으로 도열해 있는 전나무들 사이로 아담한 전각 한 채가 보인다. 더 이상 소박할 수 없는 풍경. 삐걱거리는 문을 여니 작은 창으로 숲의 청량한 기운과 초록의 잎들이 해우소 안으로 마구 쏟아진다. 일체의 근심걱정은 이곳에서 모두 사라지고 마니, 금대암에 가면 해우소는 꼭 들를 일이다.

 

 

비탈에 일군 텃밭에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전나무 한 그루. 이제 금대암의 상징이 되어버린 전나무의 나이는 500살이 넘었다. 높이가 40m, 둘레가 2.9m로 현재 우리나라 전나무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찻길이 노이기 전 산길을 오르면 금대암의 입구였던 이곳에는 원래 두 그루의 전나무가 있었는데, 한 그루는 벼락을 맞아 없어졌다. 지리능선의 장엄한 풍경을 재는 긴 자처럼 전나무는 허공에 매달린 듯, 지리산에 기대어 있는 듯하다.

 

조선 성종 때의 문인 뇌계 유호인(1445~1494)은 이곳 금대암을 둘러보고 ‘잘 있느냐 금대암아 / 송하문이 옛날 같구나 / 송풍에 맑은 꿈 깨어 / 문득 잠꼬대를 하는구나.’는 시를 썼다.

 

                           ▲  500살 전나무

 

멀리 서암정사와 벽송사가 보인다. 예부터 지리산에서 맑고 깨끗한 곳으로 금대암과 벽송암이 제일이라고 했는데, 금대암에서 보면 벽송암(사)이 보인다. 서로 마주보는 곳에 있는 맑고 깨끗한 암자는 수행을 하기에 그만이다. 벽송사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수행처라면 금대암은 깨달은 후에 보림하기에 적격한 곳이 아닌가 싶다. 아직 깨닫기 전의 수행자는 맑고 포근한 곳이 수행하기에 좋고, 깨달은 이는 사방이 탁 트인 곳을 수행처로 삼아 큰 뜻을 품는다고 했던가.

 

 

나한전 옆 층계를 오르면 집채만 한 너럭바위가 공중에 솟아 있다. 너럭바위는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만나는 곳에 있다. 한낮의 햇볕이 데운 열기가 아직도 바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 암자에서 좌선하는 ‘선불장’으로 이곳이 제일이겠다. 이곳에 앉으니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합장!

 

 

허공을 걷는 듯 구름 위를 걷는 듯

금대암만큼 조선시대 유람록에 자주 등장하는 암자도 드물다. 1400년대 김종직의 <유두류록> , 남효온의 <지리산일과>, 김일손의 <두류기행록>, 1600년대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등의 유람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김일손이 <두류기행록>에 남긴 글이다. 김일손은 1489년 4월 14일에서 4월 28일까지 지리산을 유람했는데, 등구사에서 2박을 하고 4월 16일 금대암에 이르게 된다.

 

 

“한 승려가 물을 긷고 있었다. 나는 정백욱(일두 정여창)과 함께 불쑥 들어섰다. 뜰에는 모란 몇 그루가 있었는데, 반쯤 시들었어도 그 꽃은 매우 붉었다. 누더기 승복을 입은 승려 20여 명이 가사를 입고서 뒤따르며 범패를 하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내가 물어보니 이곳은 ‘정진도량’이라고 했다. 정백욱이 그럴 듯하게 해석하기를 '그 법이 정일하여 잡됨이 없고, 나아가되 물러섬이 없습니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매진하여 부처가 되는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는 자가 있으면 그 무리 가운데 민첩한 한 사람이 긴 막대기로 내리쳐 깨우치게 하여 잡념과 졸음을 없애게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부처가 되기도 고되군요. 학자가 성인이 되는 공부를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성취함이 없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암자에는 여섯 개의 고리가 달린 석장이 있었는데 매우 오래된 물건이었다.”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것 하나. 금대암의 이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옛날부터 ‘금대’라는 이름이 지어진 이유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지리산의 여러 사찰 가운데서 창건된 지가 오래되었다는 데서, 지리산에서 경치가 으뜸이라는 데서, 금박으로 칠했다는 데서 ‘금대’라는 이름을 유추했지만 이는 억측일 뿐이었다.

 

 

금대는 <정토경>에 나오는 말이다. 정토경은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의 <정토삼부경>을 말한다. <관무량수경-정종본>에 왕비 위제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인도 왕사성의 아사세라는 태자가 나쁜 친구 조달의 꾐에 빠져 부왕인 빈바사라를 잡아 일곱 겹으로 된 감옥에 감금하고 누구도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왕비인 위제희는 몸을 깨끗이 씻어 꿀 반죽을 몸에 발라 남몰래 왕에게 먹였다. 태자 아사세가 이 사실을 알고 어머니를 죽이려 했으나 신하의 만류로 궁궐의 깊은 곳에 어머니를 가두고 만다. 슬픔과 근심에 쌓인 왕비 위제희는 부처가 있는 기사굴산을 향해 간절히 예배했다. 이에 부처는 위제희와 미래 세상의 일체 중생들이 서방 극락세계를 보는 열여섯 가지 법을 가르쳐 주게 되니 이가 ‘16관법(觀法’)‘이다. 위제희와 대중을 위한 관법이 여섯, 미래중생을 위한 관법이 일곱, 삼배구품왕생이 셋이다.

 

 

그중 공덕이 높은 수행자가 삶을 마치려고 할 때 아미타불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등 대중들과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자색을 띤 금빛 연화대(금대)를 가지고 그 수행자를 영접하는데, 수행자가 돌아보면 자색을 띤 금색 연화대(금대)에 이미 올라앉아 합장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금대’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부처님의 몸이 금빛이라서 부처가 있는 자리를 금대라고 한 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암자 마당에 내려섰다. 허공을 걷는 듯 구름 위를 걷는 듯 아득한 풍경. 그 옛날 벽송사에서 이곳을 오갔던 응윤 스님(1743~1804)이 바라본 금대암 풍경이 오늘에도 생생하고 아련하다.

 

 

“(금대암에서 바라보면) 반야봉으로부터 천왕봉에 이르기까지의 산봉우리가 화려한 병풍이나 비단 장막처럼 펼쳐져 있다. 정면으로 바라보면 골짝 골짝의 구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는 것, 가는 것, 멈추어 선 것, 가로로 비껴 있는 것이 여기저기 보이는데 드문드문한 것은 주름진 비단 같고, 펼쳐진 것은 비단 폭 같으며, 넓게 퍼진 것은 바다와 같다. 문득 보이다 바로 없어지는 갖가지 변화하는 형상이 가장 기이한 경관이다.”

 

▲  지안재

 

 금대암은 언제 지어졌을까

 금대암의 창건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마다 다르다. 심지어 암자에 있는 문화재 안내문도 서로 기록이 달라 혼란만 주고 있다. 안국사 부도 안내문에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1403년(태종 3)에 행호 조사가 중건한 것으로, 금대암 안내문에는 656년(신라 태종 무열왕 3년)에 행호 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금대암 전나무 안내문에는 1403년(태종 3)에 행호 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금대암 3층석탑 안내문에는 656년(신라 태종 무열왕 3년)에 행평(行平) 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각기 달리 적고 있다. 일부 백과사전에는 656년(신라 태종무열왕 3) 행우(行宇) 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적고 있다. 행평(行平) 과 행우(行宇)는 금대암을 중창한 행호(行乎) 조사의 오기로 보인다.

 

행호 조사는 생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의 승려로 <법화경>의 이치를 깨달아 천태종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태종이 지은 치악산 각림사의 낙성식을 주관했고, 장령산에 대자암의 주지로 임명됐다. 세종이 즉위하자 판천태종사로 임명됐으나 얼마 뒤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의 금대사와 안국사, 천관산 수정사, 강진 백련사를 중수했다. 조선 초기 불교가 배척되는 분위기에서도 효령대군 등을 불교에 귀의시키는 등 왕실에 불교를 보급하는 데 힘쓴 인물로 전해진다.

 

금대암은 신라시대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나 그 후의 역사는 전해지고 있지 않다. 다만, 신라의 도선국사, 고려의 보조국사와 진각국사, 조선의 서산대사가 도를 닦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응윤 스님1743~1804)도 <경암집-금대암기>에서 ‘신라․고려시대로부터 우리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름나고 덕망 있는 고승이 모두 이 암자에 거주했는데, 고찰할 만한 사적은 없다.’고 했다.

 

이덕무는 <천장관전서>에서 군자사를 언급하면서 고려 때 불일국사(보조국사 지눌)의 전법제자인 진각국사가 군자사를 중창하여 제자 신담으로 하여금 이 절에 주석하게 하고, 자신은 금대암으로 물러나 거쳐했다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금대암은 조선시대에 처음 지어진 것이 아니라 중창되었으며 고려시대에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에 창건되어 조선 초기 행호 스님에 의해 중창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겠다.

 

금대암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금대산에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금대암복구기성회가 중건했다. 현재 건물로는 무량수전과 나한전·선원 등이 있고, 유물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8호인 동종과 제269호 신중탱화, 경상남도기념물 제212호인 함양 금대암 전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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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북카페에서 보낸 1박 2일, 각각의 공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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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북카페에서 보낸 1박 2일, 각각의 공간들

 

▲ 북카페 '자음과 모음'

 

10월 3일. 진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난 이 글을 쓰고 있었다. 해는 이미 떨어졌고 차 안에선 아무리 해도 불을 켤 수가 없었다. 좌석 위, 작은 실내등에서 희미한 빛조차 얻을 수 없는 상실감. 하는 수 없이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잠시 멈췄던 버스는 무주를 지나고 있었다.

 

 

책을 접는 대신 수첩과 펜을 꺼내 들었다. 워낙 악필인데다 어둠 속에서 글자를 끼적거리니 나중에 내 글씨를 알아볼 확률은 적었지만,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어둠이 만들어준 밀폐된 공간에서 생각의 편린들을 끄집어내어 적는 것, 깊은 고독만큼이나 아름다운 일이다.

 

▲ 북카페 '자음과 모음'

 

어제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인적 하나 없는 지리산 산중 암자를 벗어난 나는 나무 한 그루 없는 서울 홍대 거리를 이틀이나 배회하고 있었다. 홍대 입구 역에 내려 북카페 예닐곱 곳을 무작정 둘러보기로 한 것.

 

▲ 북카페 '자음과 모음'

 

 

일단 지하철역에서 가장 먼 ‘자음과 모음’ 북카페로 향했다. 1km 정도만 걸으면 충분하겠지만 도시에서의 도보는 썩 유쾌한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합정역 바로 코앞에 북카페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심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다행인지, 북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비가 후드득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내가 준 노란 우산이 쑥스러웠지만 조심스럽게 꺼내어 테이블에 올렸다.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비 오는 날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보는 것도 운치 있으리라. 하얀 벽면의 문자가 편안하다. 서가에 꽂힌 책들로 카페 안 공기가 훈훈하다고 여길 즈음 밖으로 나갔다. 야외는 책가도처럼 출판사에서 낸 책 그림이 빼곡히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후마니타스’ 북카페는 엄숙했다. 빈자리가 두엇 보였으나 무언가에 너무나 열중해 있는 사람들을 보니 잠시 앉아있기에도 부담스러웠다. 북카페 사용 규칙을 읽었다. 비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다산북스’로 향했다.

 

 

 ▲ 후마니타스 책다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다산북스의 24시 카페다. 오늘같이 비가 나리는 날에는 더욱 좋으리라. 백석의 시구처럼 그리움이 밀려왔다.

 

 

흰 당나귀가 지키고 있는 인상적인 입구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2층으로 올라갔다. 비가 오니 운치 있는 테라스. 꽤 낭만적이다. ‘흰 바람벽이 있어’ 시를 읽다 거리로 나왔다.

 

▲ 다산북스 북카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북카페 ‘꼼마’를 찾기까지 조금 헤맸다. 홍대거리의 북카페는 공통적으로 간판이 작았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고 말 정도로 간판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알림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여기에 있음을 나타내는 아이콘 정도로 여겨졌다.

 

 

 

문학동네가 운영하는 북카페 ‘꼼마’는 독특한 구조였다. 2층 천장까지 닿은 높다란 책장에는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사람의 키에 닿지 않는 책은 위태위태한 사다리를 올라서 끄집어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 사다리와 높은 책장은 꼼마의 상징처럼 충분히 매력적이다. 두 권의 책을 골랐으나 사는 것은 내일로 미루었다.

 

▲ 문학동네 북카페 '꼼마'

 

 

 

 

이튿날, 인문카페 ‘창비’를 찾았다. 손님은 단 한 명. 심플한 인테리어가 특징인 카페 안은 단조로웠다. 그 단조로움 속에 여유가 묻어났다.

 

 

 

애써 치장하지 않은 담박함이 창작과 비평사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혼자 깊이 침잠하여 글쓰기에는 이곳이 참으로 좋겠다 싶다.

 

▲ 인문카페 '창비'

 

 

도로를 가로질렀다. 홀로 떨어진 북카페 ‘정글’. 1층에는 디자인 서점이 있었고, 2층과 3층이 북카페였다.

 

 

고양이 한 마리가 입구를 지켰는데, 또 다른 한 마리가 바닥에 배를 깐 채 느긋하게 손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 북카페 '정글'

 

 

디자인전문 출판사답게 이곳의 북카페 중에선 가장 예뻤다. 공간 구성과 책의 배치에서 북카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거실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크기가 다른 룸을 곳곳에 두어 규모에 맞는 세미나를 언제든 할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 북카페 '정글'

 

▲ 캐슬 프라하

 

 

마지막으로 들른 북카페는 ‘작업실’ 2006년에 생긴,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북카페란다. 역시나 손바닥만 한 간판 때문에 찾기는 수월하지 않았다.

 

▲ 북카페 '작업실'

 

이미 커피를 마신 터라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냥 둘러보기로 했다. 여태까지 본 북카페 중 가장 좁은 공간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분위기는 활달했고 젊은 에너지가 넘쳤다. 확실히 북카페 ‘작업실’은 가장 홍대스러웠다.

 

▲ 북카페 '작업실'

 

 지난 10월 1일에서 5일까지 열린 제10회 서울 와우북페스티발

 

오후가 되자 홍대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잠시 넋을 잃은 채 밀려드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조금 높은 층계에 올랐더니 사람들의 머리만 보인다. 이 무수한 사람들.

 

 

어진 말들을 모아 글로 엮어내고 종이로 묶는 것이 책이 아니던가. 저 각각의 사람들과, 저 각각의 공간들과, 저 각각의 책들에서 빛나는 수백수천의 불빛들. 이날 밤 난 양손에 여덟 권의 책을 든 채 버스도 택시도 잡히지 않는 축제의 소도시를 밤새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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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네! 바위에 나타난 사람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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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암 벼랑에 절로 만들어진 불상

 

하동에서 섬진강을 건너면 구례입니다.

구례 읍내에서 보면 강 건너로 우뚝 솟은 산 하나가 보이는데요.

오산(530.8m)입니다.

 

 

이 오산 꼭대기에 사성암이 있습니다.

그 경치가 하도 빼어나 지난 8월에 국가명승으로 지정되었지요.

 

 

벼랑에 매달린 사성암에는 한 뼘 정도의 공간만 있으면 전각이 들어서 있습니다.

사성암 산신전의 위치도 드라마틱합니다.

 

 

위에서부터 똑같은 장면의 사진을 제가 보여드렸는데요.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다시 처음 사진부터 쭉 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를 보셨나요?

 

 

이제 확실해졌죠?

너무나 명확한 사람 얼굴이 보이지요.

 

 

이곳에선 관세음보살이라 하는 모양입니다.

 

 

산신각과 관세음보살, 참 묘하게 잘 어울린다 싶습니다.

 

 

어쩜 바위가 이렇게 사람의 얼굴, 그것도 불상을 닮았다 말입니까.

얼핏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부처의 마음으로 보시면 분명 보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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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앞 가을 단풍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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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앞 가을 단풍 풍경

 

비가 오니 가을이 더욱 붉어지네요.

어제 점심시간에 잠시 담은 사무실 앞 가을 풍경입니다.

단풍 구경하러 멀리 갈 필요 있을까요?

이곳이 곧 단풍명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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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과 섬진강을 한눈에, 사성암의 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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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과 섬진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고승들의 수행처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⑪] 허공의 꽃, 사성암

 

섬진강을 건너자 평지에 우뚝 솟은 산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오산이다. 포장길과 비포장길을 번갈아 내어주며 직각에 가까운 산길은 여전히 험했지만 발 아래로 흐르는 섬진강은 언제 봐도 푸근했다.

 

 

2014년 8월 28일. 사성암 일원은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1호로 지정됐다. 그래서일까. 진입로를 새로 닦는 중인지 여기저기 벌건 생채기를 드러낸 채 공사가 한창이다. 차라리 진창길일망정 두려움을 떨쳐내고 구도의 마음으로 오르던 아슬아슬했던 옛길이 그립다.

 

                                  약사전(유리광전)

 

누군가는 그랬겠지. 제 아무리 경치가 빼어나도 오를 수 없는 것도 문제라고. 그러나 너도나도 쉬 올라 경외감을 잃어버리고 그 경치마저 오염되고 파괴된다면 더 큰 문제일 것이다. 모든 편리는 영혼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는 것. 하물며 수행처인 이곳이 자본과 관광의 논리로 덧칠된다면 옛 성인들은 무슨 말을 했을 것인가.

 

 

오산

오산은 예로부터 많이 알려진 명산이었던 모양이다. 사성암에 대한 기록은 찾기 힘드나 대신 암자가 자리한 오산에 대한 기록은 더러 볼 수 있다. 송광사 제6세 국사인 원감국사(1226~1292) 문집에는 “오산 정상에 참선을 행하기에 알맞은 바위가 있는데, 이들 바위는 도선·진각 양 국사가 연좌수도(宴坐修道)했던 곳”이라 하였다.

 

                                  약사전(유리광전) 마애불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오산(鰲山)은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산 정상에 바위 하나가 있고 바위에 빈틈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세상에 전하기를, ‘중 도선(道詵)이 예전에 이 산에 살면서 천하의 지리(地理)를 그렸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1800년 구례향교에서 발간한 <봉성지>에는 "그 바위의 형상이 빼어나 금강산과 같으며, 예부터 부르기를 소금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들로 보아 예부터 오산은 고승들이 참선했던 수도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산 꼭대기에 아스라이 걸려 있는 사성암은 네 명의 성인이 났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원효(617~686), 의상(625~702), 도선(827~898), 진각(1178∼1234) 등 네 명의 고승들이 수도하였다고 한다. 의상 스님이 창건하거나 주석한 절은 하나같이 탁 트인 곳이라 이내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원효 스님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는 데선 조금의 의문이 생긴다. 그럼에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성인의 반열에 원효 스님이 빠진다면 그 또한 구색이 맞지 않을 터. 절의 창건 시기를 조밀하게 살펴보면 결국 의상 스님과 원효 스님은 사성암과 관련이 없는 인물로,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암자에 창조의 여백과 상상의 공간은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아 시답잖은 시비야 잠시 접어두고 볼 일.

 

 

네 분의 고승 중 진각국사 혜심은 이곳에서의 족적이 뚜렷하다. 진각국사는 어머니가 돌아간 후 조계산에 들어가 보조국사 지눌의 제자가 되었다. 그가 오산에 있을 때에 한 바위 위에 앉아 밤낮으로 도를 닦았다. 매일 오경(새벽 3~5시)만 되면 스님의 게송 읊는 소리가 십리 밖까지 들려 마을 사람들이 아침이 된 줄을 알았다고 한다.

 

 

진각국사는 지리산 금대암에 있을 때 눈이 이마에까지 쌓여도 움직임 없이 단정히 앉아 오직 구도에 몰두했고, 1208년 보조국사가 수선사(송광사)의 주지 자리를 물리려 하자 지리산으로 피하여 숨어 지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1210년 결국 스승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왕명에 의해 수선사에 돌아가 조계종의 제2세가 되었다. 고려 무신정권의 핵심인물이던 최충헌의 아들 최우가 자신의 두 아들을 진각국사에게 출가시킬 정도로 그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보조국사에 의해 시작된 수선사 선풍은 진각국사에 의해 확립되어 이른바 수선사(송광사) 16국사가 배출되었다.

 

 

허공의 꽃

벼랑을 오른다. 수어 번 다녀갔지만 높은 벼랑에 아득히 걸려 있는 약사전의 풍광은 황홀하다. 약사전 전각이 세워지기 전 벼랑에 그대로 새겨진 마애불을 본 적이 있었다. 원효 스님이 선정에 들어 손톱으로 그렸다는 마애불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오후의 햇살이 비치면 선은 사라져 본래의 바위가 되고, 빛이 사라지면 선 윤곽이 또렷이 살아나 부처의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애불에 보호각(약사전)이 지어진다는 말에 걱정이 앞서 몇 번을 부러 찾았었다. 다행히 새로 지은 전각은 주위 산세와 잘 어울렸다.

 

                                 ▲ 도선굴

 

벼랑 곳곳에는 한 뼘 정도의 공간들이 있다. 이 좁은 공간들에 겨우 건물 서너 채가 각기 들어앉았는데, 그 자리매김한 것이 참으로 오묘하다. 벼랑 곳곳에 걸쳐 있는 높다란 바위는 수도하기에 맞춤인 좌선대가 되고, 벼랑 사이에 삿갓배미처럼 들어앉은 좁은 공간들은 암자의 건물들이 설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된다.

 

  사성암에서 본 섬진강과 구례 들판

 

법당을 오르기 위해서는 돌층계를 올라야 한다. 반대편 약사전에서 보면 돌 속으로 사람이 걸어 들어가는 것 같다. 마침 스님 한 분이 내려오는데 마치 돌 속에서 나오는 기인으로 보인다. 스님이 공중에 떠 있는 종무소 누각을 걷는다.

 

                                 ▲ 약사전

 

벼랑 끝에서 길이 끊겼는데 스님은 무심코 내딛는다. 길이 끊긴 것인가. 허공이 잘린 것인가. 벼랑 끝으로 한 발 내딛을 용기가 없다면 아예 허공 밖으로 한 발 내딛을 일이다. 허공에 뜬 누각 위를 걷는 스님, 한 떨기 꽃 같다.

 

 

층계를 올랐다. 바위 벼랑에 꽃 한 떨기 피었다. 허공의 꽃. 어디서 날아와서 하필 벼랑에 피었단 말인가. 천길 벼랑 끝 허공에 핀 꽃. 오고감도 없이 피어난 것이니 꽃도 그 무엇도 아닌 것.

 

  소원바위

 

“중생이 생멸이 없는 데서 헛되이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은 마치 허공에서 꽃이 피고 지는 것과 같다”고 했던가. 서산 대사는 <선가귀감>에서 성품에는 본래 생멸이 없으니 생사와 열반이 없는 것이요,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으므로 꽃이 피고 지는 것도 없는 것이라고 했다. 생사를 본다는 것은 허공에 꽃이 핀 것을 보는 것이고 열반을 본다는 것은 허공에 꽃이 지는 것을 봤다는 것인데, 본래 피어날 것도 질 것도 없는 꽃인데 무엇을 따진다 말인가.

 

 

결국 ‘허공의 꽃’처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있지도 않은 허공의 꽃을 볼 수는 없는 일. 그러니 시비를 따진들 무엇 할까. 모든 법은 공하니 색즉시공이요. 공 자체에서 인연으로 온갖 모습이 드러나니 공즉시색이다. 오로지 법의 진실을 알고 색(色)에도 걸리지 않고 공(空)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자재한 삶을 살 뿐….

 

  산신각과 관음보살바위

 

벼랑 틈에 자리한 산신각 좌우엔 도선굴과 관음바위가 있다. 겨우 한 사람 앉을 만한 작은 굴에 도선국사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는 것이 다소 의아스럽지만 오른편 관음바위를 보고나면 사람 얼굴, 그것도 부처의 얼굴을 쏙 빼닮았음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산신각 앞으로는 돌담을 쌓아 경계를 이루었다. 돌담 너머로는 천 길 낭떠러지이다. 승과 속을 이처럼 극적으로 구분한 곳도 없으리라. 옛 고승들은 발 아래로 펼쳐지는 사바세계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암자 뒤편으로 우뚝 솟은 절벽을 돌아 오산 정상에 올랐다. 풍월대, 망풍대, 신선대, 좌선대, 우선대, 낙조대 등 기묘한 바위들의 12비경이 펼쳐진다. 오산은 해발 530.8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구례 들판과 그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굳건한 성벽처럼 버티고 있는 노고단, 노고단에서 옥가락지가 흘러내린 삼남의 명당 오미리 운조루까지 사방 풍경이 한꺼번에 들어온다.

 

  오산 정상에서 본 지리산과 섬진강 일대

 

벼랑

무릇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기운이 중요하다. 땅과 하늘의 기운을 받지 못하는 현대의 아파트 생활은 사람의 정서 또한 삭막하고 메마르게 만든다. 부드러운 대지의 기운과 푸른 하늘과 초록의 숲에서 멀어지니 그럴 수밖에. 일반인들도 이러할진대 수행을 하는 이들에게도 기운이 남다른 곳이 있을 것이다.

 

  사성암에서 본 구례 들판과 섬진강

 

그런데 왜 이런 높은 벼랑에 암자를 지었을까. 불가에서 도를 깨치는 것을 ‘돈오’라 하고, 깨치고 난 후 수행을 계속하는 것을 ‘점수’라 한다. 성철 스님처럼 단박에 깨쳐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 ‘돈오돈수’라면, 깨치고 난 뒤에도 중생의 습기를 없애는 등의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 ‘돈오점수’이다.

 

  오산 정상에서 본 지리산과 섬진강 일대(가운데가 노고단. 오른쪽 들판이 구례 오미리 운조루 일대)

 

오산은 평지에 우뚝 솟은 산이지만 넉넉하다. 너른 구례 들판과 넉넉한 지리산, 어머니 젖줄 같은 섬진강이 있으니 포용력이 넓다. 비록 절벽에 들어선 암자지만 이곳에서 보는 조망은 충분히 포용력을 갖게 한다. 사방이 탁 트여 있으니 어느 한 곳 막힘이 없고 저 멀리 풍경까지 속속들이 들어오는 것이다. 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을 수용하고 포용한다는 말이겠다.

 

  섬진강

 

도를 이룬 선승들이 이처럼 툭 터진 곳을 수행처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 도를 깨치기 전까지는 한 지점만을 응시한 채 자신을 들여다보지만, 깨치고 난 뒤에는 자신을 넘어 세상의 모든 것을 수용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를 불가에선 ‘오도(불도의 진리를 깨달음)’와 ‘보림(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법)’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길이기도 하다. 이 높은 곳에서 진리를 깨치고 도를 이루어 부처가 되려고 정진하는 동시에 저 아래 사바세계의 고해에서 헤매는 일체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보살의 일념을 되새겼을 것이다. 이렇게 확 트인 곳으로 여수 향일암, 낙산사 홍련암, 지리산 금대암, 남해 보리암 등을 들 수 있다.

 

 

다만, 이 탁 트인 곳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곳은 아니다. 아직 수행이 부족하거나 떠도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 이런 곳에 있게 되면 마음을 잡지 못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산으로 아늑히 둘러싸인 어머니 품속 같은 곳에 있어야 마음을 다잡고 공부가 제대로 된다. 지리산 벽송사가 그러하다. 벽송사가 조선 선불교의 종가라는 별칭을 갖게 된 데는 우연이 아니다.

 

벼랑 사이로 숨은 해를 쫓아 밖으로 나왔다. 강 건너 산 능선에 반쯤 걸려 있던 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푸른빛 어스름 속에서 스님 한 분이 붉은 가사를 입고 높다란 벼랑을 오른다. 잠시 후 벼랑을 빠져나온 염불소리가 사방 허공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네 명의 고승이 수도했다는 사성암 미스터리

지리산과 섬진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사성암은 오산 정산 부근의 깎아지른 암벽에 지은 암자로 원래 오산암이라 불렀다. 544년(진흥왕 5년)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산(鰲山)은 바위가 거북이(자라) 등껍질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성암사적>에 4명의 고승, 즉 원효대사, 도선국사, 진각국사, 의상대사가 수도하였다고 하여 사성암이라 부르고 있다.

 

사성암은 연기조사가 544년(진흥왕 5년)에 화엄사를 창건한 후 지었다고 하나 이는 다소 무리가 있다. 화엄사는 <화엄사사적>과 <구례속지>에 544년(진흥왕 5년)에 연기조사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진흥왕 당시 구례는 백제의 땅이었고 화엄사의 석조물들이 대부분 8~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미루어 이런 기록을 믿기는 어렵다. 게다가 1979년 발견된 <신라화엄경사경> 발문에는 연기조사가 754년(경덕왕 13년) 8월부터 화엄사에서 <신라화엄경사경>을 만들기 시작해 이듬해 2월에 완성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화엄사는 8세기 중엽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데 사성암도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면 이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 물론 이렇게 볼 때 그 이전에 살았던 원효(617~686) 스님과 의상(625~702) 스님이 사성암에서 주석했다는 것은 후대에 오산암이 사성암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덧붙여진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연기조사는 생몰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인도의 승려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건 신라 경덕왕 때의 황룡사 소속의 승려였다는 사실이다. 연기조사의 흔적은 지리산 일대에서만 화엄사를 비롯해 대원사, 연곡사, 법계사 등에서 볼 수 있다.

 

약사전 암벽에는 구례 사성암 마애여래입상(전남유형문화재 제220호)이 조각되어 있다. 음각으로 생긴 이 마애여래입상이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밝혀지면서 이 암자가 언제 지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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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정 걷고 싶은 지리산 삼정마을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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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정 걷고 싶은 지리산 삼정 마을 가는 길

 

화개에서도 십리 벚꽃 길을 지나면 쌍계사.

다시 칠불암 가는 길과 갈라지는 신흥 마을을 지나

깊숙한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오르면

아스팔트길의 끝에 의신 마을이 있다.

 

 

문득 지리산 깊숙이 파고드는 길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해졌다.

2차선 아스팔트길은 의신 마을에서 끝이 나고 여기서부턴 좁은 시멘트길이다.

 

 

서산 대사가 머물렀다는 하철굴암,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마지막을 맞이했던 빗점골도 아마 가는 길에 마주치리라.

 

 

차 한 대 겨우 지날 정도의 좁은 산길은

계곡으로 치닫는가 싶으면 낭떠러지가 나타났고,

중간 중간 비포장 길도 있었다.

요즈음 좀처럼 보기 드문 먼지 폴폴 나는 흙길이

반가우면서도 가슴 한편이 아렸다.

예전 군사도로였기 때문이다.

 

 

이마에 하늘이 닿을 무렵 삼정마을에서 길은 끝이 났다.

벽소령 오르던 옛길은 출입금지가 되어 있었고

사람 하나 겨우 지날 수 있는 산길만 등산객을 위해 개방되어 있었다.

 

 

삼정 마을은 마을이라고 부르기에도 궁색할 정도로

겨우 집 몇 채만 산자락에 매달려 있었다.

 

 

능선에는 이미 단풍이 내려왔고

그 풍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난 한참을 서성인 끝에

산 아래로 발길을 돌렸다.

너무나 적막해서다

 

계곡을 내려오면서

지금은 용화정사라는 이름으로 사유지가 되어 있는

옛 하철굴암 터에서 사진 몇 컷을 찍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하철굴암 터를 물었더니 단번에 이곳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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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화개골 상상초월 감동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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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화개골에서 그림 같은 풍경과 마주치다

 

계곡으로 내려갔다. 굳이 계곡으로 내려간 이유는 의신 마을에서 노인과 외지인의 대화를 엿들어서다. 부부로 보이는 중년의 사람 둘이 노인을 붙잡고 몇 번이나 같은 물음을 했고 노인은 나중에 짜증 섞인 말로 답을 하고 있었다.

“아 글쎄, 몇 번이나 맞다고 안하요. 여기서 조금 올라가다보모 길가에 큰 바위가 있어. 그 바위 옆으로 해서 계곡으로 내려가모 그 소나무들이 있다쿤께.”

 

사실 별 기대는 없었다. 그래도 궁금한 건, 대체 어떤 소나무이기에 서울에서 왔다는 부부가 그렇게 찾아 헤맸단 말인가. 하동군 홍보 사진을 보고 부러 왔다는데, 골짜기 저 아래부터 샅샅이 훑었으나 소나무를 찾지 못했다는 말에 확 마음이 쏠린 것이었다.

 

노인의 말을 어림잡아 계곡으로 내려갔다. 계곡에는 집채만 한 바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 어디쯤인가 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 순간 족히 10m는 넘는 바위 위에 대여섯 그루의 잘 생긴 소나무가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아, 이거구나! 이 깊은 계곡에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바위도 그렇지만, 마치 잘 손질한 정원수처럼 잘생긴 소나무 대여섯 그루가 한 폭의 그림마냥 서 있는 모습은 실로 감동이었다. 바위와 소나무에 정신이 팔려 계곡의 바위를 위험스럽게 넘나들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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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한 수, 노고단의 여명과 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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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의 여명, 그리고 구름바다

 

새벽 여섯 시, 반야봉을 향해 출발했다. 대피소 옆 돌층계를 올랐다.

산마루에는 이미 수백 명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이윽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탄성 소리...

 

 

그들이 일제히 바라보는 곳,

고개를 돌리자 '우와'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직 어둑어둑했지만 굽이치는 능선 물결은 또렷했다.

 

 

구름바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노고단의 여명, 그리고 운해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아스라이 펼쳐진 지리능선 끝으로 저 멀리 천왕봉이 보인다. 일단 반야봉으로 길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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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최고 텃밭, 바로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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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추픽추처럼 공중에 떠 있는 텃밭!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⑫〕서산대사의 출가지, 원통암

 

지난 8월로 기억된다. 하동에서 구례로 가던 중이었다. 막 화개삼거리를 지날 때였다. 커다란 녹색의 도로표지판 귀퉁이로 붉은 표지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서산 대사 출가지, 원통암.’ 지난 유월만 해도 보이지 않던 표지판인데 어찌된 영문일까. 서산 휴정 스님이 지리산에서 18년간 수행을 했고 여러 암자 중 원통암에서 머물렀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출가한 곳을 정확히 기록한 문헌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원통암에서 출가했다고 하니 그 까닭이 몹시 궁금했다. 그러곤 잊고 있었는데 마침 지난 10월 19일에 시간을 내어 원통암을 다녀오게 되었다.

 

 삼정 마을 가는 비포장 흙길, 벽소령 가는 옛 군사도로이기도 하다.

 

원통암을 가기 위해선 지리산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화개에서도 십리 벚꽃 길을 지나면 쌍계사, 이곳에서 다시 칠불암 가는 길과 갈라지는 신흥 마을을 지나 깊숙한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오르면 아스팔트길의 끝에 의신 마을이 있다. 마을에서 원통암까지는 다시 산길을 걸어야 한다.

 

                         ▲  화개골짜기와 소나무. 10m가 훌쩍 넘는 거대한 바위 위에 잘 생긴 소나무 대여섯 그루가 자라고 있다.

 

방안에 그대로 들어온 장쾌한 풍경

마을 뒤 좁은 산길을 올랐다. 꽃처럼 피어난 붉은 감들이 검은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이맘때면 감은 꽃으로 피어난다. 노란 은행 열매가 여울에 수북이 쌓여 있다. 돌층계가 유독 많다. 암자 가는 길에는 다랑논들이 층층 펼쳐진다. 그 옛날 화전민들의 터전이었을 다랑논의 일부는 묵정밭이 되었지만 아직 고사리 등 작물을 키우고 있는 곳도 더러 보인다.

 

 원통암 가는 돌길

 

마을에서 암자까지는 700미터. 잠시면 오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가팔랐다. 숲속 아늑한 곳에 암자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은 점점 멀어졌다. 의신 마을이 골짜기에 있어 암자 또한 산 중턱 어디쯤 숲속 아늑한 공간에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무 사이로 언뜻 보이는 능선에 맞닿은 푸른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직감적으로 암자가 능선 가까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미 해는 떨어졌다. 어둑한 숲속에서 마음은 더욱 급해졌고 걸음은 자꾸 헛돌았다.

 

 

삼배를 올렸다. 땀 한 방울이 좌복에 떨어졌다. 나무관세음보살! 잠시 청허당의 서산 대사 영정과 행적을 담은 사진들을 올려다보았다.

 

 

“들어오세요.”

헉헉거리며 암자 마당에 들어섰을 때 청허당 다실에 있던 스님이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곤 차를 건넸다. 땀을 많이 흘렀으니 찬물보다는 더운 차로 몸을 덥혀야 기운에 손상이 없단다. 근데 다실에서 보는 풍경이 압권이다. 한 벽면이 통으로 된 창인데 밖에서 봤던 장쾌한 풍경이 방안에 그대로 들어왔다.

 

 

 나는 누구인가

 

마치 꽃잎을 양쪽에서 하나씩 포갠 듯 산자락이 골짜기 좌우로 겹겹 펼쳐지고 그 끝에 아스라이 세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백운산(1217), 따리봉(1127), 도솔봉(1123)이라고 했다. 스님은 며칠 전 비 내리고 난 뒤의 운무가 장관이었다고 그때를 그리워했다.

 

 원통암 마당에 서면 지리산 산자락들이 겹겹으로 펼쳐지고, 그 끝으로 백운산이 보인다.

 

암자에는 3칸의 원통전과 2칸 반의 청허당 건물이 있다. 신기한 건 이 작은 암자에 비록 일각문만 할지라도 산문이 버젓이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해우소에서 곧장 암자로 올라오게 길이 나 있었지만 작은 산문을 내면서 법당이 남쪽이라 문을 동쪽에 두어 길을 새로이 냈다고 했다. 산문 앞의 층계만 빼면 마을에서 암자로 오르는 길은 수백 년은 된 오래된 길이었다.

 

 원통암에선 지리산 산자락 너머로 왼쪽부터 백운산(1217), 따리봉(1127), 도솔봉(1123)이 보인다.

 

마추픽추처럼 공중에 떠 있는 텃밭!

“저요. 노옹이라고 합니다. 20년 전부터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법명을 여쭙자 예순을 넘긴 스님의 답이 명쾌했다. 원통암은 스님의 사형인 동림 스님이 옛터에 새로 지었다. 해우소 옆 산기슭에 동림 스님의 승탑이 있다. 칠불암에 계시던 스님이 이곳을 찾은 것은 20년 전, 처음엔 토굴로 쓰다가 1997년에 인법당을 짓고 2011년에 청허당과 서산산문, 해우소를 지었다.

 

                     ▲  휴정 스님을 모신 청허당

 

“저 우물 좀 보시오. 서산 대사의 우물이오.”

손님을 배웅하던 스님이 다실 옆 텃밭에서 우물을 가리켰다. 서산 대사 때에도 사용했다는 우물이라는 걸 넌지시 강조했다. 내가 눈여겨 본 건 우물 옆 텃밭이었다. 텃밭은 공중에 걸려 있었다. 텃밭 너머로 보이는 겹겹의 산자락과 파노라마 같은 백운산 능선이 장대했다. 마치 마추픽추의 경작지처럼 텃밭은 공중에 떠 있었다. 아득한 시간을 당겨 허공에 걸린 생명들…. 붉은 흙에서 돋은 녹색의 푸성귀가 파란 하늘에 걸려 있다. 겨울을 앞두고도 생명들은 자신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텃밭

 

이 작은 암자에서 이처럼 장쾌한 풍광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암자가 자리한 품은 작았지만 시야는 넓었다. 정중앙인 원통전과 청허당 사이에서 보는 능선 풍경이 최고라고 했지만 암자 어디서도 그 풍경은 여실히 들어왔다.

 

 

서산 대사의 출가지, 밝혀지다

“서산 대사는 지리산에서 도를 깨치고, 금강산에서 보림을 했고, 묘향산에서 제자를 길렀지요.”

스님은 먼저 온 손님 두엇을 보내고 잠시 뜰을 거닐다 다실로 들어왔다.

 

“스님, 청허당집이나 다른 문헌을 봐도 서산 대사가 삭발한 얘기는 나오지만 그 장소가 어디라고 밝힌 곳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원통암이 서산 대사의 출가지라고 한 건 무슨 근거에서인가요?”

“아, 그거요. 서산 대사의 제자 중 경헌 스님이 있는데, 그 분이 남긴 <제월당집>에 보면 삭발한 곳이 원통암이라고 나옵니다.”

 

 

사실 서산 대사, 즉 청허 휴정 스님의 전기를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청허당집》에 실린 〈완산 노 부윤에게 올리는 글, 上完山盧府尹書〉과 제자 평양 언기가 지은 〈청허당 행장〉이 있다. 앞의 글은 휴정이 50세 되던 해 당대의 명재상이었던 노수신에게 자신의 이력을 상세하게 말한 것이나 50대 이후의 일대기를 알 수 없다는 맹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뒤의 글은 생애 전반을 다루고 있으나 지극히 간략하여 소상히 알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노옹 스님이 서산 대사가 마셨다는 우물이라고 소개했다.

 

서산 대사의 지리산에서의 행적은 〈완산 노 부윤에게 올리는 글〉에서 알 수 있다. 서산 대사는 두 차례에 걸쳐 18년간 지리산에 머물렀다. 겨우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고 이듬해 봄날 아버지마저 잃은 스님은 15세에 남쪽을 여행하다가 지리산에서 숭인 장로를 만나 불교에 귀의하게 되고 부용 영관 스님에게 의탁하여 공부를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깨달음을 얻고 삭발을 했는데, 아쉽게도 어디서 삭발을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완산 노 부윤에게 올리는 글〉에서는 “부지런히 공부를 했지만 이름과 상에 얽매여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기 못하고 답답함만 더해가던 어느 날 밤, 갑자기 문자를 떠난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갑자기 창밖에서 우는 두견의 소리를 들으니 눈에 가득 찬 봄 산은 모두가 고향일세.’라고 오도송을 읊었다. 또 하루는 ‘물 길어 돌아오다 문득 고개를 돌리니 푸른 산은 무수히 흰 구름 속에 있네.’라고 읊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마침내 손에 칼을 쥐고 스스로 해묵은 머리를 잘랐다. ‘차라리 일생을 어리석은 자가 될지언정 문자나 매만지는 법사는 되지 않으리라’라고 다짐했다.”고 적고 있다.

 

                                서산 대사의 제자 경헌 스님의 <제월당대사집>에 서산 대사가 삭발한 곳으로 원통암이 나온다.

 

서산의 제자 제월당 경헌(1544~1633) 스님의 《제월당대사집》 〈청허대사행적〉에는 “숭인 장로에 의지해서 원통암에서 삭발했다. 의숭인장로낙발우원통암依崇印長老落髮于圓通庵’”이라고 적혀 있다. 이로 말미암아 삭발출가한 곳이 지리산 의신에 있는 원통암으로 밝혀졌다. 그때가 21세였던 1540년으로 보인다. 서산 대사의 입장에선 자신의 행적을 일일이 밝히기는 어려웠겠지만 제자의 입장에선 스승의 행적을 정확히 기록할 수밖에 없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이는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정원은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처음 암자 뜰에 들어섰을 때 너무도 정갈하여 비구니 스님이 계시는 줄 알았다. 맑고 향기로운 삶을 위해 주위를 깨끗이 하는 건 수행자의 기본이지만, 원통암은 깔끔함 이상이었다. 봄이 되어 연산홍과 배꽃이 만발할 즈음이면 암자는 그야말로 화원이 되는 모양이다. 연산홍 울타리 너머에는 하얀 차꽃이 피었다. 차가 심긴 곳은 높다란 축대 끝, 찻잎을 따기에는 무리겠다. 스님은 굳이 찻잎을 따서 우려먹으려는 생각보다는 그냥 심었을 뿐이라고 했다. 서산 대사는 소나무와 국화를 심는 것은 화초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색이 곧 공임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어두워지자 노옹 스님이 산문까지 배웅했다.

 

지난해 처음 뜰 앞에 국화를 심었는데

올해는 난간 밖에 또 소나무 심었다네

산승이 화초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색이 바로 공임을 알리기 위해서지

- 서산 대사의 시 〈소나무와 국화를 심으며(栽松菊)〉

 

 

 걸림 없는 대자재, 원통무애

원통암은 지리산 덕평봉 아래 해발 600m 고지에 있다. <진양지>에는 옛날 의신사 일대의 31개 암자를 언급하고 있는데, 원통암은 의신사의 수많은 산내 암자 중의 하나였다. 많은 고승들이 수행했던 곳으로 관세음보살을 모신 도량이다. 원통암이 자리한 곳에는 뒤로는 덕평봉을 위시해 벽소령, 칠선봉, 영신봉 등 지리산의 주능선이 둘러싸고 있다. 앞으로는 좌우로 화개골의 산자락들이 겹겹으로 펼쳐지고, 그 끝으로 백운산이 보인다. 백운산은 섬진강 건너 전라도 광양 땅에 있지만 이곳에선 마치 지리산 연봉처럼 보인다. 암자에서 보면 섬진강으로 나뉘던 경상도와 전라도의 구분은 없어지고 하나의 산자락이 된다. 원통무애다. 내남 구분 없는 통함이다.

 

‘원통무애(圓通無碍)’는 불교의 ‘십무애’ 중의 하나이다. 암자 이름인 ‘원통(圓通)’은 ‘원통무애’에서 나온 말이다. <삼가귀감>을 통해 불가, 유가, 도가의 삼교융화를 원했던 서산 대사의 행적이 곧 원통이요 무애다.

 

청허(서산) 대사의 행적을 적은 제자 경헌(1544~1633) 스님은 전남 장흥 출신으로 15세에 장흥 천관사에서 출가하여 경․율․논을 섭렵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휴정의 문하에서 수행했다. 임진왜란 때 휴정과 함께 승군을 모집하여 평양성을 탈환한 공로로 선조가 좌영장에 명했으나 사양하고, 또 선교양종판사에 명했으나 역시 사양했다. 묘향산, 금강산, 오대산, 치악산 등에서 수행했으며 저서로는 <제월당대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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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피아골 못지않은 뱀사골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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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피아골 못지않은 뱀사골 단풍

 

지리산에서 단풍 하면 으레 피아골을 최고로 치지요.

그럼 피아골 버금가는 곳은 어디일까요. 아마 뱀사골이 아닐까요.

 사실 최고와 버금의 구분은 애매한 편이기도 하지요.

뱀사골 단풍도 최고로 꼽기에 손색이 없으니까요.

 

 

지난 10월 25일에 뱀사골을 다녀왔습니다.

마침 단풍 축제 기간이더군요.

하루 전날인 24일에 뱀사골 입구 반선에서 택시를 타고 노고단으로 갔습니다.

 

 

노고단 산장에서 1박을 한 후 반야봉을 지나 오지 암자인 묘향대를 거쳐 뱀사골로 내려왔습니다.

 

 

병풍소, 제승대, 탁룡소, 요룡대 등 뱀사골의 이름난 곳들을 두루 볼 수 있는 계곡 길이었습니다.

 

 

단풍도 울긋불긋, 온통 가을이었습니다.

 

 

맑은 계곡물도 좋았지만, 뱀사골에는 유독 너른 반석들이 있어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곳곳에 깊은 소와 폭포수, 하얀 반석이 장관입니다.

 

 

 

그날 길을 잃고 난 후 만신창이가 된 몸이었지만 뱀사골에 들어서니 금세 피로가 가시더군요.

 

 

 

계곡을 따라 난 산책로도 일품이었습니다.

 

 

 

언제한번 꼭 찾고 싶은 뱀사골, 역사의 깊은 아픔만큼이나 유난히 붉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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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본 최고의 풍경, 지리산 반야봉 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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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본 최고의 풍경, 지리산 반야봉 운해

 

 

 

노고단 대피소. 아침 여섯 시 산행을 시작한다. 대피소 옆 계단을 올라 노고운해의 진면목을 보고 반야봉을 향했다. 붉은 햇살이 멀리 우뚝 솟은 천왕봉을 비춘다. 반야봉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지만 이곳에서 반야봉까지는 5.5km, 3시간 30분 정도 걸어야 한다.

 

 

 

반야봉은 지리산의 너른 품만큼이나 후덕한 인상이다. 동쪽에 천왕봉이 있다면 서쪽엔 반야봉이 있다. 금강반야, 번득이는 지혜의 날카로움은 그 후덕한 속에 감추어져 있다. 멀리서 보면 육산인 반야봉은 실제 오르면 바위덩어리 악산임을 알 수 있다.

 

 

 

노고단 고개에서 시작한 산행은 돼지평전, 피아골 삼거리, 임걸령, 노루목을 거쳐 반야봉에 이른다. 임걸령 샘물까지는 산책로로 봐도 될 정도로 평탄한 길이다. 하지만 임걸령부터 시작된 비탈길은 노루목에서 반야봉 구간에서 심한 경사를 이뤄 지리산 제2봉에 오르는 길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청명한 날씨라 사방 어디를 봐도 구름바다다. 햇살이 이미 퍼졌음에도 운해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걸음을 걷는 내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오랫동안 기대했던 지리산 운해를 맛보는 감격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구름바다는 반야봉에서 절정을 이룬다. 사방이 탁 트인 반야봉 정상에선 말 그대로 끝없이 펼쳐진 대자연의 풍광을 볼 수 있다. 구름이 바다가 되고 능선이 섬이 되는 풍경. 다도해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지상에서 본 풍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신성한 풍경. 하늘이 감추었다 인간에게 아주 잠시 허락한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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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지리능선, 청매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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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가 따로 없는 지리산의 장관, 청매암

 

지리산 둘레길로 알려진 창원 마을에서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빙긋이 웃더니 이내 마을 뒤 산길을 앞서갔다. 거침없다. 얼마나 갔을까. 마을을 지나 막다른 길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어찌해서 이곳까지 왔을까. 의심은 이내 풀렸다. 길의 끝에 암자가 있었다.

 

 청매암

 

하얀 차 꽃이 피었다. 씨알이 굵은 호두도 차밭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밭둑 감나무에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꽃이 폈네요. 감이 붉으면 꽃 피는 것과 매한가지 아니겠소.”

 

 청매암 차 꽃

 

 

“고개를 돌려보시지요.”

 

암자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스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저 멀리 능선을 가리킨다. 아…. 어쩜 이리도 도솔암에서 보던 풍경과 똑같단 말인가. 고도계를 꺼내보니 해발 350미터를 조금 넘길 뿐이었다. 하봉, 중봉, 천왕봉, 세석, 영신봉까지. 도솔암에서 바라보는 지리능선 바로 그 장쾌한 풍경 그대로였다. 스님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유를 알겠다.

 

 해발 350m 정도인데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천왕봉과 지리능선이 장관이다.

 

 

청매암은 정견 스님이 20년 전에 이곳을 우연히 발견하고 암자를 짓기 위해 터를 닦기 시작했다. 당시 민가가 있었는데 어찌어찌하여 이곳에 암자를 세울 계획을 잡았던 것. 토굴로 계속 있어오다가 2년 전에 인법당을 지어 제대로 된 암자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리고 청매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암자의 이름을 청매라 한 것은 청매 인오(1548~1623) 스님을 기린 것이다. 암자가 자리한 곳은 오도재 기슭. 청매 조사가 도를 깨쳤다 하여 이름 붙여진 오도재에 청매암이 들어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처이다. 1200고지에 있는 도솔암에 비해 800미터 넘게 고도가 낮음에도 청매암은 깨달음을 얻기에 충분한 곳으로 보인다. 허기야 깨달음을 이루는데 마땅한 곳을 가려 찾음이랴.

 

 

“정남향입니다.”

 

혹시나 해서 좌표를 재봤더니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침반은 정남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암자를 세울 때 법당이 향하는 방향까지 꼼꼼하게 챙긴 스님의 안목이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히말라야가 따로 없소. 장관이지요.”

 

 

청매 조사는 서산 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 대사를 따라 승병장이 되어 3년 동안 싸워 공을 세웠다. 유명한 십무익송을 지었으며 그림에도 뛰어났다. 광해군 때 왕명으로 벽계 정심, 벽송 지엄, 부용 영관, 서산 휴정, 부휴 선수의 오대 선사들의 영정을 그렸다. 말년에 지리산 연곡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전해진다.

 

 ▲ 오도재로 넘어가는 지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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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가면 꼭 가봐야 할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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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가면 꼭 가본다는 이곳, 자갈치시장

 

결혼식 갔다가 둘러본 부산 자갈치시장. 역시 그 이름만큼이나 풍성했다.

카메라를 가지고 오지 않아서 휴대폰으로 막 찍었다~

 

 

축제 중이어서 그런지 엄청난 인파가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본격 시장에 들어서기도 전에 길거리에는 마른 생선을 파는 좌판들이 더러 보인다.

 

 

아이 얼굴만 한 조개에 외국인도 깜짝 놀란 듯,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댄다.

 

 

온통 해산물인데, 눈에 유독 띄는 이것... 돼지꼬리.

 

 

아가리를 벌린 채 열 지어서 한 방향을 향하고있는 생선들.

 

 

역시 곰장어는 빠질 수가 없다.

 

 

 

'배오징어'가 뭐냐고 물었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오징어를 잡아 배에서 처리했다는 것...

 

 

자갈치 하면 역시 생선구이.

 

 

엄청난 두께와 크기의 갈치 구이가 특히 구미가 당긴다.

 

 

생선구이를 주문하면 선지국도 덤으로 나온다.

 

 

입맛만 다실 뿐...

 

 

지난번에 왔을 때에는 이 집에서 먹었었다.

 

 

아, 정말 자갈치 생선구이는 언제든 먹고 싶은 음식 중의 하나다.

 

 

시장 한편에선 오징어를 손질하느라 분주하다.

 

 

포장마차 뒤를 돌아가니 탁 트인 바다가 나타난다.

 

 

낚시꾼들...

 

 

 

 

한낮인데도 곰장어에 소주 한 잔 기울이는 손님들이 제법 있다.

 

 

 

 

쭉쭉 빠진 문어와

 

 

아이 키만 한 갈치.

 

 

민어조기로 기억되는...

 

 

한치, 골뚜기, 오징어, 갑오징어....

 

 

길거리에서 회도 먹을 수 있다.

 

 

 

 

생선 익는 냄새가 골목길에 가득

 

 

길을 건너 영화의 거리로 간다.

 

 

세상에서 제일 싸다는 아저씨의 말에 속아(?)

 

 

 

7천 원짜리 시계 둘을 샀다.

 

 

이승기가 다녀갔다는 호떡집보다

 

 

진짜 원조집이라는, 남포동 최초 씨앗 호떡집이라고 써 붙인 곳에서 잠시 구경을 했다.

 

 

 

아리랑 거리 골목으로 들어간다.

 

 

주욱 올라가면 국제시장, 깡통시장과 이어진다.

 

 

낮에는 이곳까지 난전이 들어선다.

 

 

역시, 비빔당면

 

 

싼 가격에 적당한 양이다.

 

 

배를 채울 정도는 아니다.

그래야 다른 음식도 싼값에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이곳에선 골목을 돌아다니며 몇 가지의 음식들을 먹곤 한다.

 

 

하여튼, 이곳은 부산에 가면 꼭 가봐야 할 곳임에는 틀림없다.

 

 

가장 부산다운 곳 중의 한 곳, 자갈치시장.

언제 와도 왁자지껄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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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도 없는 스님의 공양간, 깜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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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 100단인 주부도 놀랄 스님의 공양간

 

                           ▲ 도솔암 가는 길

 

스님에게서 카톡이 왔다. 어쩐 일이지, 하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럴 수가! 스님이 계신 곳은 해발 1200고지 지리산 오지암자. 게다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인데 카톡이라니. 잠시 어리둥절해서 메시지를 살피고 있다가 일단 본능적으로 안부를 먼저 전했다.

 

                           ▲ 도솔암 가는 길

 

그러곤 잊고 있었는데, 며칠 뒤 스님은 한밤중 지리산의 달 사진을 보내왔다. 지리산의 기운이 가득한 사진에는 사방이 캄캄했고 쟁반처럼 큰 달이 떠 있었다. 어떻게 카톡을 보낸 걸까. 스마트폰을 장만한 걸까. 스님이 갖고 있는 건, 전화만 간신히 되는 2G폰이었다. 작은 태양열충전기로 겨우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쭤볼까 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안 뵌 지도 오래되었으니 조만간에 찾아뵙고 직접 여쭤야겠다고 생각했다.

 

 

“거, 과일이나 좀 사오시오.”

암자로 가던 날 아침, 스님께 전화를 했다. 뭐 산중에 별스럽게 필요한 게 있겠느냐며 마지막에 지나는 말로 툭 던졌다. 사과 일곱 개, 배 다섯 개를 넣은 배낭은 제법 묵직했다. 스님 과일 드시게 하려다 나 죽게 생겼군, 하는 엄살이 나중 암자를 오를 때 순간 들 정도로 무겁긴 했다.

 

 ▲ 도솔암 가는 길

 

온산이 가을이다. 단풍이 20일쯤에 좋을 거라 스님이 귀띔을 했건만 아직 산 전체가 붉지는 않았다. 산속은 이미 초겨울의 쌀랑한 날씨였지만 가을은 더디 오고 있었다. 도솔암 가는 길은 이번이 두 번째, 당연히 스님을 뵙는 것도 두 번째인데 마치 오랜 벗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설렜다.

 

   ▲ 도솔암 가는 길

 

                           ▲ 도솔암 가는 길

 

그러나 암자엔 스님은 없었다. 스님, 스님, 몇 번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삼소굴에도 법당에도 인기척이 없다. 짐을 풀고 법당 문을 열려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 도솔암

 

“나 여기 마천이요. 손님이 와서 급히 산을 내려왔는데, 어쩔까요. 늦을 것 같으니 마천에서 한 번 봅시다. 좀 쉬었다가 내려오시오. 꼭요. 얼굴이나 한번 봅시다.”

 

  ▲ 도솔암

 

바람 같다. 언제 산을 내려갔단 말인가. 배낭을 내려놓고 요기할 걸 꺼냈다. 허기가 져서 과일이나 깎아 먹을 요량으로 공양간으로 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공양간은 장작을 때느라 사방 벽과 천장에 그을음이 시커멓게 붙어 있었다.

 

 

땅에서 허리께 내려가는 공양간은 정갈했다. 잘 닦여 반들반들 윤기가 나는 무쇠 솥은 깨끗하게 빤 행주에 덮여 있었다. 오래된 냄비와 주전자 등 각종 식기구들이 하나같이 깨끗하니 잘 정돈되어 있다. 찬장과 수납공간에도 빈틈이 없다. 음식을 해주는 공양주 보살도 없이 비구 스님 혼자 공양을 해결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뚜막과 선반, 바닥에도 티끌 하나 없다.

 

  ▲ 스님의 공양간

 

살림 100단인 주부가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겠다. 잘 정리된 공양간을 보니 투박한 외모와는 다른 평소 스님의 성정을 알 것 같다. 나중에 청매암에서 만났을 때 정견 스님은 지저분한 건 못 보는 성격이라고 했다. 하나같이 오래되어 낡았음에도 전혀 비루하지 않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정갈함을 공양간에서 읽을 수 있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다루지 않는 그야말로 담박한 스님의 삶이 공양간에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사과 하나와 공양간에서 들고 나온 과도를 들고 암자 마당 끝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천왕봉을 위시한 지리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이다. 이곳에서 과일을 먹으니 선과가 따로 없다.

 

 

마당을 거닐었다. 산속이라 해는 금방 떨어지기 시작했다. 암자 뜰에 산 그림자가 냉큼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하늘은 더 파랬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이곳 도솔암에 머물렀던 청매 인오 스님의 시 한 수를 떠올렸다.

 

 

구름 다한 가을 하늘 둥근 거울이여 / 외기러기 날아가며 흔적을 남기는구나 / 남양의 저 노인네 이 소식을 알았으니 / 천 리 동풍에 말없이 통하네

 

                           ▲ 도솔암에서는 천왕봉과 지리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 삼소굴 방안에서 본 천왕봉과 지리능선

 

  ▲ 해발 1200고지 도솔암에서는 파노라맢처럼 펼쳐진 천왕봉과 장쾌한 지리능선을 볼 수 있다.

 

남양의 노인은 혜충 선사를 이름이다. 중국의 유명한 선승 마조 도일 선사가 하루는 동그라미(일원상)를 그려 경산 도흠 선사에게 보냈다. 이를 받아본 도흠은 동그라미 가운데에 점을 하나 찍어 마조에게 되돌려 보냈다. 남양 혜충이 이 이야기를 듣고 “음, 도흠이 마조의 속임수에 그만 넘어갔구나.” 하였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을 보고 그 옛날 당대를 주름잡던 선승 마조, 도흠, 혜충 선사들의 일화를 읊은 것이리라. 둥근 거울은 마조가 그린 일원상이고 외기러기는 도흠이 찍은 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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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보따리를 기억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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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보따리를 기억하시나요?

 

며칠을 벼른 끝에 강 건너 헌책방에 갔습니다. 진주에 있는 소소책방입니다. 오랜만에 주인장을 뵈었더니 아 글쎄, 제가 오면 줄 거라고 책 한 권을 그냥 건네는 게 아닙니까. 몇 번이나 사양을 했지만 저에게 꼭 필요할 것 같아 챙겨두었다고 해서 끝내 받고 말았습니다. 운주사에서 1982년에 초판이 나온 <명산고찰따라>입니다. 당시 우리나라 곳곳의 사찰과 암자의 지도와 사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모두 15권의 책을 샀습니다. 저에게 있어 한 번에 많은 책을 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읽을 만큼만 사고 산 것은 끝까지 읽는 것이 저의 독서습관이라 대개 한두 권에서 많아야 서너 권 정도 산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작정하고 다량 샀습니다. 12월에 읽을 책으로 골랐습니다. 아무래도 책 읽기에는 겨울이 가장 좋겠지요. 지금 아침에 읽고 있는 책과 저녁에 읽고 있는 책 두 권은 이번 주면 책장에 꽂힐 테죠.

 

 

한 아름의 책을 계산대에 올렸습니다. 느릿하게 계산하던 우리 주인님이 책이 많으니 싸주겠다고 했습니다. 한두 권이면 달랑 들고 가겠지만 선물로 받은 책까지 열일곱 권이니 그럴 수밖에요. 근데 쥔장이 책을 넣어준 건 그 흔한 쇼핑백도, 비닐봉지도 아닌 보자기였습니다. 문득 어릴 적 보자기에 책을 싸서 몇 개월 학교를 다닌 기억이 났습니다. 아주 야물게 책을 싼 쥔장이 책 보따리를 건넸습니다. 참, 흐뭇하더군요. 아내도 책 보따리를 보더니 즐거워했습니다. 마음 따뜻한 책가방이었습니다. 서재에 책을 부리고 보자기는 다시 풀어 고이 접어두었습니다. 다음에 돌려드리려고요.

 

사설이 길었네요. 이번에는 주로 불교서적을 샀습니다. 나오는 길에 눈에 띄어 낚아챈 뿌리깊은나무의 <한국의 발견, 강원도 편>을 빼고는요. 그리고 효봉 선사의 자취를 쓴 법정 스님의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4판, 1986년)를 또 선물로 받았답니다. 오늘, 원문이 실린 만해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 돈황본 육조단경, 신심명, 서산대사의 선교결이 실려 있는 <선림보전>, 라즈니쉬의 <달마어록>, <한국불교사개설> 등을 구할 수 있어 뿌듯했습니다. 12월에는 이 책을 양식으로 삼아서 정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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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감상한 노고단의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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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오지암자 순례를 위해 다시 노고단을 찾았다.

노고단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새가 다니는 길을 바람에게 물어 가야 하는 길,

다음 날의 여정을 앞두고 일찌감치 대피소에 짐을 풀고 노고단 산책에 나섰다.

 

 

멀리 솟은 봉우리가 지리산 제일봉 천왕봉이다.

왼쪽으로 중봉과 오른쪽 촛대봉 아래 넓게 펼쳐진 세석평전이 보인다.

 

 

지리산 제이봉인 반야봉은 멀리서 보면 후덕하다.

반야봉과 잇닿아 있는 것이 중봉인데, 이곳 사람들은 애써 중봉과 반야봉을 구분하지 않는다.

둘이 아닌 하나. 그냥 반야봉일 뿐이다.

 

 

오후 3시까지 입장이 가능한 노고단 정상,

 올해만 벌써 수어 번 올랐다.

 

 

멀리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지리산 능선,

곧게만 여겼던 능선이 지그재그 까마득히 이어진다.

 

 

섬진강이 어렴풋이 보인다.

맑은 날이면 섬진강 물줄기가 또렷하건만...

 

 

노고단 아래 문수대를 다녀오니 해는 이미 지기 시작했다.

 

 

나만의 장소에서 노고단 일몰을 감상하기로 했다.

 

 

아무도 없는 길의 끝에서 해가 지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파고 들어도 외롭지는 않았다.

 

 

그저 지는 해를 바라볼 뿐, 이곳에선 바라는 것도 없다.

 

 

멀리 무등산인가?

 

 

구름 위로 모습을 감춘 봉우리가 어렴풋이 보이는가 싶더니 해도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장엄한 일몰은 아니어도 홀로 감상하기에 부족함은 없다.

 

 

어두워지자 되레 모든 것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섬진강!

 

 

그리고 넘실거리는 산맥들!!

 

 

 

 

 

 

 

 

 

가을 남도여행, 이 한 권의 책과 함께!(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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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쌍계사 단풍 지다

전기도 없는 스님의 공양간, 깜짝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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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도 없는 스님의 공양간, 깜짝 놀랐습니다.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⑬〕청매 조사를 기린 암자, 청매암

 

 

 

기사 관련 사진
 도솔암 가는 길
ⓒ 김종길

 


스님에게서 '카톡'이 왔다. 어쩐 일이지, 하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럴 수가! 스님이 계신 곳은 해발 1200고지 지리산 오지암자. 게다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인데 카톡이라니. 잠시 어리둥절해서 메시지를 살피고 있다가 일단 본능적으로 안부를 먼저 전했다.

그러곤 잊었는데, 며칠 뒤 스님은 한밤중 지리산의 달 사진을 보내왔다. 지리산의 기운이 가득한 사진에는 사방이 캄캄했고 쟁반처럼 큰 달이 떠 있었다. 어떻게 카톡을 보냈을까. 스마트폰을 장만한 걸까. 스님이 갖고 있는 건, 전화만 간신히 되는 2G폰이었다. 작은 태양열충전기로 겨우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쭤볼까 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안 뵌 지도 오래되었으니 조만간에 찾아뵙고 직접 여쭤야겠다고 생각했다.

살림 100단인 주부도 놀랄 스님의 공양간

"거, 과일이나 좀 사오시오."

암자로 가던 날 아침, 스님께 전화를 했다. 뭐 산중에 별스럽게 필요한 게 있겠느냐며 마지막에 지나는 말로 툭 던졌다. 사과 일곱 개, 배 다섯 개를 넣은 배낭은 제법 묵직했다. 스님 과일 드시게 하려다 나 죽게 생겼군, 하는 엄살이 암자를 오를 때 들 정도로 무겁긴 했다.

기사 관련 사진
 도솔암 가는 길
ⓒ 김종길

 


온산이 가을이다. 단풍이 20일쯤에 좋을 거라 스님이 귀띔을 했건만 아직 산 전체가 붉지는 않았다. 산속은 이미 초겨울의 쌀랑한 날씨였지만 가을은 더디 오고 있었다. 도솔암 가는 길은 이번이 두 번째, 당연히 스님을 뵙는 것도 두 번째인데 마치 오랜 벗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설렜다.

그러나 암자에 스님은 없었다. "스님~"몇 번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삼소굴에도 법당에도 인기척이 없다. 짐을 풀고 법당 문을 열려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나 여기 마천(경남 함양)이요. 손님이 와서 급히 산을 내려왔는데, 어쩔까요. 늦을 것 같으니 마천에서 한 번 봅시다. 좀 쉬었다가 내려오시오. 꼭요. 얼굴이나 한 번 봅시다."

바람 같다. 언제 산을 내려갔단 말인가. 배낭을 내려놓고 요기할 걸 꺼냈다. 허기가 져서 과일이나 깎아 먹을 요량으로 공양간으로 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공양간은 장작을 때느라 사방 벽과 천장에 그을음이 시커멓게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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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의 공양간
ⓒ 김종길

 


땅에서 허리께 내려가는 공양간은 정갈했다. 잘 닦여 반들반들 윤기 나는 무쇠 솥은 깨끗하게 빤 행주에 덮여 있었다. 오래된 냄비와 주전자 등 각종 식기구들이 하나같이 깨끗하니 잘 정돈되어 있다. 찬장과 수납공간에도 빈틈이 없다. 음식을 해주는 공양주 보살도 없이 비구 스님 혼자 공양을 해결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뚜막과 선반, 바닥에도 티끌 하나 없다.

살림 100단인 주부가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겠다. 잘 정리된 공양간을 보니 평소 스님의 성정을 알 것 같다. 나중에 청매암에서 만났을 때 정견 스님은 지저분한 건 못 보는 성격이라고 했다. 하나같이 오래되어 낡았음에도 전혀 비루하지 않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정갈함을 공양간에서 읽을 수 있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다루지 않는 그야말로 담박한 스님의 삶이 공양간에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사과 하나와 공양간에서 들고 나온 과도를 들고 암자 마당 끝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천왕봉을 위시한 지리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이다. 이곳에서 과일을 먹으니 선과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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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암
ⓒ 김종길

 


마당을 거닐었다. 산속이라 해는 금방 떨어지기 시작했다. 암자 뜰에 산 그림자가 냉큼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하늘은 더 파랬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이곳 도솔암에 머물렀던 청매 인오 스님의 시 한 수를 떠올렸다.

구름 다한 가을 하늘 둥근 거울이여 / 외기러기 날아가며 흔적을 남기는구나 / 남양의 저 노인네 이 소식을 알았으니 / 천 리 동풍에 말없이 통하네

남양의 노인은 혜충 선사를 이른다. 중국의 유명한 선승 마조 도일 선사가 하루는 동그라미(일원상)를 그려 경산 도흠 선사에게 보냈다. 이를 받아본 도흠은 동그라미 가운데에 점을 하나 찍어 마조에게 되돌려 보냈다. 남양 혜충이 이 이야기를 듣고 "음, 도흠이 마조의 속임수에 그만 넘어갔구나"하였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을 보고 그 옛날 당대를 주름잡던 선승 마조, 도흠, 혜충 선사들의 일화를 읊은 것이리라. 둥근 거울은 마조가 그린 일원상이고 외기러기는 도흠이 찍은 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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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암을 떠나다
ⓒ 김종길

 


"겨울에 눈 내리면 히말라야가 따로 없소"

산을 내려오니 다 늦은 오후다. 지리산 둘레길로 알려진 창원 마을에서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빙긋이 웃더니 이내 마을 뒤 산길을 앞서갔다. 거침없다. 얼마나 갔을까. 마을을 지나 막다른 길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어찌해서 이곳까지 왔을까. 의심은 이내 풀렸다. 길의 끝에 암자가 있었다.

하얀 차 꽃이 피었다. 씨알이 굵은 호두도 차밭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밭둑 감나무에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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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매암 차밭의 차 꽃
ⓒ 김종길

 


"꽃이 폈네요. 감이 붉으면 꽃 피는 것과 매한가지 아니겠소."
"고개를 돌려보시지요."

암자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스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저 멀리 능선을 가리킨다. 아…. 어쩜 이리도 도솔암에서 보던 풍경과 똑같단 말인가. 고도계를 꺼내보니 해발 350미터를 조금 넘길 뿐이었다. 하봉, 중봉, 천왕봉, 세석, 영신봉까지. 도솔암에서 바라보는 지리능선 바로 그 장쾌한 풍경 그대로였다. 스님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유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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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암에서 본 천왕봉과 지리능선 풍경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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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매암에서 본 천왕봉과 지리능선 풍경
ⓒ 김종길

 


청매암은 정견 스님이 20년 전에 이곳을 우연히 발견하고 암자를 짓기 위해 터를 닦기 시작했다. 당시 민가가 있었는데 어찌어찌하여 이곳에 암자를 세울 계획을 잡았던 것. 토굴로 계속 있어 오다가 2년 전에 인법당을 지어 제대로 된 암자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리고 청매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암자의 이름을 청매라 한 것은 청매 인오(1548~1623) 스님을 기린 것이다. 암자가 자리한 곳은 오도재 기슭. 청매 조사가 도를 깨쳤다 하여 이름 붙여진 오도재에 청매암이 들어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처이다. 1200고지에 있는 도솔암에 비해 800미터 넘게 고도가 낮음에도 청매암은 깨달음을 얻기에 충분한 곳으로 보인다. 허기야 깨달음을 이루는데 마땅한 곳을 가려 찾음이랴. 청매 조사의 그 유명한 게송, 12각 시에는 깨달음을 일컫는 각(覺)이 12번 나온다.

깨달음은 깨닫는 것도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니 / 깨달음 자체가 깨달음 없이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네 / 깨달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니 / 어찌 홀로 참깨달음이라 이름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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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매암
ⓒ 김종길

 


"정남향입니다."

혹시나 해서 좌표를 재봤더니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침반은 정남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암자를 세울 때 법당이 향하는 방향까지 꼼꼼하게 챙긴 스님의 안목이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히말라야가 따로 없소. 장관이지요." 

마을과 가까운 이곳은 다행히 전기가 들어온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도솔암보다 이곳이 낫지 않느냐고 했더니 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도솔암만한 곳은 없다는 말씀이다. 세월이 흘러 늙어지면 이곳에 살겠지만 아직은 도솔암이 스님에게는 제일 도량이다. 비록 이곳에 전기가 들어오고 따뜻한 보일러가 있고 인터넷도 들어오지만 도솔암의 고요와 정취에 비길 수는 없다고 했다. 산중에 뜬 휘영청 밝은 달과, 긴 호흡으로 내달리는 지리 능선의 깊은 풍경을 어찌 능가할 수 있을까.

"도솔암은 삼일 머물기에 딱 좋소. 그 이상 있으면 대부분 못 버티죠. 근데 간혹 오는 이들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게 오히려 좋겠다고 그래요. 이런 암자도 있어야 된다나. 사는 사람 입장에선 불편한데 어쩌다 한 번 들르는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은가 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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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도재로 이어지는 지안재
ⓒ 김종길

청매암과 청매 조사
청매암은 청매 인오(1548~1623) 스님을 기려 도솔암의 정견 스님이 2년 전에 인법당으로 지었다. 청매암은 함양군 마천면 오도재에 있다. 정견 스님이 혜암 종정을 모시고 지리산에 들어온 때는 1985년이었다. '공부하다 죽어라', 오후불식, 장좌불와 등의 숱한 가르침을 남긴 혜암 종정은 도솔암에서 2년을 머물고 1987년 해인사 원통암으로 돌아갔다. 정견 스님은 도솔암에 계속 남아서 도량을 닦았다.

청매 조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대사를 따라 승병장이 되어 3년 동안 싸워 공을 세웠다. 유명한 십무익송을 지었으며 그림에도 뛰어났다. 광해군 때 왕명으로 벽계 정심, 벽송 지엄, 부용 영관, 서산 휴정, 부휴 선수의 오대 선사들의 영정을 그렸다. 말년에 지리산 연곡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전해진다. 영원사에는 도솔암을 중건한 청매 조사 승탑이 있다. 마천에서 함양읍으로 넘어가는 재가 오도재인데, 청매 조사가 도를 깨쳤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청매 조사가 도솔암에서 수행한 기록은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서 볼 수 있다. 1610년(광해 2)에 박명부, 정경운 등과 두류산을 유람한 박여량은 9월 4일 옛 제석당 터에서 주위 산과 내의 형세를 가리키며 둘러보았다. "서쪽으로 1백여 리쯤 되는 곳을 바라보니 새로 지은 두 절이 있는데, 무주암 서쪽에 있는 절을 '영원암(靈源庵)'이라 하고, 직령 서쪽에 있는 절을 도솔암(兜率菴)이라 하였다. 도솔암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집으로 인오(청매)가 지어 살고 있는 곳이다. 인오는 우리 유가의 글을 세속의 문장으로 여겨, 단지 불경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여러 승려를 위하여 암자 앞에 붉은 깃발을 세워두었고, 발자취가 동구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고 적었다. 또한 "사찰로서 말한다면 금대암, 무주암, 두류암 외에 영원암, 도솔암, 상류암, 대승암 등은 예전에 없었던 절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도솔암은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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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도 감춘 은둔의 땅, 문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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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도 감춘 은둔의 땅, 문수대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⑭〕‘불국토’ 지리산과 문수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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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고운해
ⓒ 김종길

 


잡목과 풀숲에 덮인 길이 어느새 또렷해진다. 처음의 미망도, 끝없이 펼쳐진 초원도 끊기자 비로소 길의 형체가 드러났다. 이제는 아무런 장애가 없는 길, 외줄기 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모든 것을 비우고 버려야 본지풍광이 숨김없이 나타나는 법. 저 길의 끝에 적정과 안심, 무위가 있으리라.

20여 분을 걷자 홀연히 빗장을 지른 돌문 하나가 나타났다. 문이 아닌 문, 닫히지도 열리지도 않은 문 앞에서 눈을 부릅떴다. 이곳에 오기까지의 천 가지, 만 가지 상들이 모두 사라졌다.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만이 고요를 깨고 들어온다. 나는 왜 대체 여기까지 왔는가.

석상 스님이 말했다.

"모든 갈망을 버려라. 입술 위에 곰팡이가 피도록 하여라. 스스로 완전히 한 가닥의 흰 실과 같이 하여라. 이 일념을 영원히 고착시켜라. 스스로 차갑고 생명 없는 식은 재처럼 되어라. 그리고 다시 스스로는 멀고 외딴 곳에 있는 절간의 낡은 향로와 같이 되어라."

기사 관련 사진
 노고운해
ⓒ 김종길

 


지리산이 감춘 은둔의 땅

문수대는 정남향이었다. 고도계는 해발 1310 미터를 가리켰다. 왕시루봉을 바라보고 있는 구상나무가 이 암자의 사천왕처럼 버티고 있다. 채마밭의 무는 토실했다. 무서우리만치 고요한 암자의 텃밭에 햇빛이 길게 드러누웠다. 암자는 사실 토굴에 가까웠다. 스님은 이번에도 없었다.

이곳에 오기 위해 올해만 벌써 수 차례 노고단 일대를 다녀왔다. 노고단 아래 문수골에 암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진작 듣고 있었지만 도무지 암자로 가는 길을 가늠할 수 없었다. 노고단에 올라 암자가 있을 곳을 어림잡아 보고, 주위 산세를 살펴보기를 몇 번, 결국 암자로 가는 들머리 길을 찾았다.

마침내 지난 유월 문수대로 첫걸음을 뗐다. 노고단으로 곧장 향한 것이 아니라 은둔의 땅을 가는 만큼 오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지리산 아래부터 온전히 두 발의 힘으로 지리산이 감춘 땅을 찾기로 한 것. 거림 골짜기를 올라 세석 산장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능선 길을 하루 꼬박 걸어 노고단 산장에서 이틀 밤을 보낸 뒤 이른 아침 안개 속을 뚫으며 문수대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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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나무와 조릿대가 무성한 문수대 가는 길
ⓒ 김종길

 


그러나 길은 무성한 원시림에 가려 있었다. 몇 번이나 풀숲을 헤친 끝에 암자로 가는 유일한 길의 흔적을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어렴풋한 오솔길에서 혹시나 뱀이나 사나운 짐승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한 발자국씩 내디뎠다. 지리산 깊숙한 은자의 땅, 어느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심산유곡의 비장처를 기대하며 말이다.

결국 바위 이끼에 미끄러져 두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고 스틱이 부러지는 불상사를 겪었지만 다리를 절룩이면서도 문수대를 향한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두 번이나 넘어지고 나니 되레 정신이 환해졌다. 길을 찾지 못하고 길을 잃지나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도 어느새 잊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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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성한 원시림 끝에 만난 돌너덜지대
ⓒ 김종길

 


지난 시월, 다시 문수대를 찾았다. 이번에는 아래쪽 길을 발견했다. 지난 번 몇 번이나 가다 돌아서기를 반복했던 위쪽 길보다 훨씬 또렷했다. 적어도 사람이 다닌 흔적이 길게 이어졌다. 참나무와 조릿대가 뒤섞인 울창한 숲을 지나자 이윽고 나타난 벼랑, 다시 이어진 어두컴컴한 원시의 숲길은 돌너덜지대에 이르자 왕시루봉 능선이 나타나며 시야가 탁 트였다.

얼마 후 문수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도 스님은 없었다. 다음 날 묘향대의 호림 스님을 만났을 때 문수대 스님의 안부를 물었지만 알 수가 없었다. 암자 뜰에는 가을 국화 몇 송이가 피었을 뿐, 적막이 깊었다. 벼랑 아래 절묘한 터에 자리 잡은 문수대. 수도처로 이만한 곳은 없을 것이다.

지리산은 불국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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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발 1310미터, 50미터가 넘는 아찔한 벼랑 아래에 자리한 문수대
ⓒ 김종길

 


왜 문수대일까. 문수대가 자리한 노고단은 예전에 길상봉으로도 불렸다. '(묘)길상'은 문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암자가 있는 골짜기도 문수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이 일대는 문수보살의 화신인 것이다. 문수(文殊)란 무엇인가. 이름 그대로 지혜를 상징한다.

백두산이 흘러내려 이루어진 산이 지리산이다. 지리산은 원래 대지문수보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지(智)'와 '리(利)'를 따왔다고 한다. 중생을 제도하는 문수 보살의 지혜가 깃든 산이라는 의미이다. 말 그대로 지리산은 지혜의 산이다.

기사 관련 사진
 암자 뜰에 핀 꽃
ⓒ 김종길

 


최치원이 887년에 쓴 진감선사비와 893년에 세운 실상사의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에는 지리산이 '知異山'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 일연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地理山'으로, <고려사>에는 '智異山'으로 씌어 있다. 이로 보아 삼국시대에는 '地理山', 통일신라시대에는 '知異山'으로, 고려시대에는 '智異山'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지리산에 불교가 꽃피던 통일신라시대에 지리산은 '지혜롭고 신령스러운 산', 불국토가 된 것이다.

경주 남산이 신라의 왕실과 귀족들이 살던 왕경의 불국토였다면 지리산은 지방 호족과 민초들의 불국토였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천지편'에는 신라 승려 의상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청구기>에 '두류산(지리산)은 1만의 문수보살이 머무는 세계'라는 내용이 있다고 했다. 1472년에 지리산을 찾은 김종직은 지리산에 4백 개에 이르는 절이 있다고 했다. 18세기의 고승 응윤 스님도 <지리산기>에서 '옛날에는 이 산 주위에 팔만 아홉 곳의 절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기사 관련 사진
 아름드리 구상나무 아래의 돌방석
ⓒ 김종길

 


다소 과장된 이야기이기는 하나 지리산은 그 자체로 부처의 몸이었다. 그 몸에 수백의 도량이 깃들어 있었던 불국토였던 것이다. 천왕봉, 반야봉 제석봉 등의 봉우리와 문수대, 영신대, 금강대, 세존대, 묘향대 등의 대(臺)는 부처가 되고, 그 품에 화엄사, 쌍계사, 실상사, 대원사, 벽송암, 칠불암 등 이름난 사찰과 암자가 들어서 있다. 지금도 지리산 일대의 사찰과 암자, 토굴 등을 합치면 100여 곳에 이르니 지리산 자체를 장엄한 수행도량 지리산 총림으로 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겠다.

문수암의 아픈 역사

기사 관련 사진
 은둔
ⓒ 김종길

 


예부터 지리산에는 '8대(臺)'니 '10대'니 하여 전망 좋은 곳이 있다. 금대, 마적대, 문수대, 연화대, 묘향대, 만복대, 종석대, 무착대, 향운대, 문창대, 영신대, 향적대, 서산대, 불일대, 상무주대 등이다. 이곳들을 올라야 지리산을 제대로 안다고 했다. 노고단 주변에도 종석대, 만복대, 집선대, 문수대, 청련대 등 이름난 곳들이 있다. 이런 곳들은 모두 풍광이 좋을 뿐만 아니라 기운이 모인 곳이라 수도처로도 알맞은 곳이다.

문수대는 50m가 넘는 아찔한 벼랑 아래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예부터 육산에는 바위가 있는 곳이, 골산에는 부드러운 흙이 있는 곳이 기운이 모이는 곳이라 했으니 문수대는 육산인 지리산의 바위 벼랑 아래의 부드러운 대지에 터를 잡았으니 애써 명당이라 말할 필요가 없다. 한두 사람이 머물기에는 물도, 땅도 넉넉하니 예부터 수도하기에 좋았던 것이다. 지금도 화엄사의 스님이 이곳에서 수도 중이다. 이곳에 암자가 처음 들어선 건 1803년 경 화엄사의 초운대사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자세한 내력은 알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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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이 감춘 땅
ⓒ 김종길

 


그런데 이 고요한 암자도 지리산의 아픈 역사를 비켜가지는 못했다. 문수대는 항일 의병 운동의 본거지였다. 문수대가 역사에 드러난 건 구한말 지리산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 때문이다. 한때 의병부대가 1700명에 달했던 의병장 김동신이 이곳 문수대 일대를 근거지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연곡사에서 순절한 의병장 고광순과 피의 맹세를 한 김동신은 영호남의 여러 군을 돌아다니며 의병 활동을 전개했고, 두 차례에 걸쳐 지리산에 들어왔다. 1907년 9월 18일, 화개를 출발한 김동신 부대는 반야봉을 거쳐 이곳 문수대로 왔다. 다음 날 문수골 아래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에서 하룻밤을 머문 후 그 다음 날 새벽 구례읍을 습격해 읍내를 장악했다. 화개에서부터 김동신을 추격하던 일본군은 의병장 고광순 부대가 진을 치고 있던 연곡사를 기습 공격해 불태운 후 이곳 문수대마저 불태웠다. 김동신의 의병 투쟁은 1908년 6월 6일 대전 순사대에 그가 체포되자 막을 내리게 된다.

이제 갈 거나. 암자 뜨락에 무심히 놓인 돌 방석에서 무심한 허리를 세웠다. 뒤로는 은산철벽, 앞으로는 낭떠러지. 왕시루봉이 지척이고 저 멀리 흐르는 섬진강이 가뭇없다. 이곳 문수대에서 발원한 토지천 물 줄기는 산 아래서 섬진강을 만나 토지면 일대에서 풍성한 '구만들'을 이룬다. 노고단의 옥녀가 금가락지를 흘린 곳이 금환락지의 명당 오미리 운조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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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자는 사실 토굴에 가까웠다.
ⓒ 김종길

 


 

 

노고단

천상의 화원으로 불리는 노고단. 여름에는 원추리 군락지로, 봄가을에는 야생화 천국으로 뭇사람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예로부터 지리팔경의 하나로 불리는 노고운해가 장관이다. 노고단은 신라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老姑)'와 제사를 올리던 '신단(神壇)'이 있었다 하여 노고단으로 부르게 되었다. 신라시대에는 화랑의 심신 수련장이었다고도 한다. 길상봉(吉祥峰)으로도 불렸다는데 단지 길하고 상서로운 봉우리라는 의미를 넘어 길상은 묘길상, 즉 문수보살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노고단 서쪽 골짜기는 문수골이고, 문수대라는 곳에 문수암이라는 암자가 있고, 토지면에는 반달곰을 키우는 문수암이라는 같은 이름의 암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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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백장암 스님들의 월동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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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백장암 스님들의 월동준비

 

지난 12월 6일 동안거 첫날, 지리산 산중 암자가 부산스러웠다. 스님들이 대숲 너머의 선방을 나와 월동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깊은 산중이라 바람이 살을 에는 듯했다. 숭숭 뚫려 있는 건물 틈새로 드나드는 바람을 막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곳 지리산 백장암에서 동안거에 참여한 스님은 모두 아홉 분.

어디서 오셨는지를 물었다.

“법주사에서 왔어요.”

사진을 찍어도 좋다는 스님은 막힘이 없다.

 

 

사진을 찍어도 좋다는 스님은 막힘이 없다.

“스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여기요.”

포대화상 같은 얼굴을 한 다른 스님이 느닷없이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법주사에서 온 스님이 혹시나 잘못 들었나 하며 거들었다.

“스님,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 있는데요.”“저기요”

이번에는 땅을 가리켰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일제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선방을 내려온 스님 대여섯 분이 의견을 나누더니 마침내 합의가 된 모양. 창문과 문 틈새로 들어올 사나운 바람을 막기 위해 아예 비닐로 건물 외벽을 두를 작정이다. 가만히 의논하던 끝에 순식간에 역할 배분이 되었다. 모든 일은 일사분란하게, 그리고 소리 없이 진행되었다.

 

 

해우소에 잠시 다녀온 사이, 스님들은 이미 작업을 끝내고 작업도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이내 선방으로 사라졌다.

 

 

원래 승려들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탁발로 의식을 해결했다. 그러나 인도에서 우기가 되면 땅속에서 벌레들이 나와 밟아 죽일 염려가 있었다. 게다가 질병까지 나돌아 돌아다니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제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기의 3개월 동안 돌아다니는 것을 중지하였는데, 이것이 안거(安居)라는 제도이다. 한국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 10월 15일에서 1월 15일까지를 하안거로 삼고 있다. 안거를 시작하는 것을 결제(結制), 마치는 것을 해제(解制)라 한다. 이 석 달 동안 승려들은 산문을 나서지 않고 오로지 수행에 정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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