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찾은 지리산 백장암. 눈이 소복이 쌓인 산중 암자는 고요했다. 암자 뜨락을 거닐고 있는데, 멀리 벼랑 끝으로 작은 건물 같은 것이 숲 사이로 언뜻 보였다. 무엇인데 저리 위태로운 곳에 있을까?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건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처음엔 해우소인가 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가는 길에 해우소는 따로 있었다. 그럼, 뭘까. 해우소를 지나 인적이 드문 길 모롱이에 자리한 이곳은 신성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슬레이트 지붕을 이고 두 짝의 문이 달린 지극히 간소한 건물. 나름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색색 연꽃을 그리고 기름한 나무에 세로로 내려쓴 ‘다불유시(多佛留是)’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글자대로라면 ‘모든 부처가 이곳에 머문다.’는 뜻이다. 부처가 머무는 곳이라….
아무리 궁리를 해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문을 열어볼까 하다가 무언가 영적인(?) 장소일 수도 있겠다 싶어 머뭇거렸다. 해우소가 바로 옆에 별도로 있으니 해우소는 아닐 터. 도대체 이 건물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한참을 서성이다 공양간으로 다시 나왔다. 마침 공양주 보살이 떡 좀 먹지 않겠느냐고 해서 염치불구하고 공양간으로 들어갔다.
“궁금하시죠? 그것이 이곳 백장암의 명물입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알 수가 없네요. 부처가 머무는 곳이라고 적어 놓았는데….”
잠시 뜸을 들이더니
“해우소입니다.”
“예? 아… 그렇군요.”
허를 찔렸다. 해우소(화장실)가 바로 옆에 없었더라면 당연히 해우소로 짐작하고 문을 열어 봤겠지만 지척에 해우소가 번듯이 있는데 해우소라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다.
“스님들의 재치가 놀랍지요?”
“근데 해우소에 왜 ‘다불유시’라고 적었을까요?”
“아이 참, 영어로 해우소를 ‘더(다)블유시(WC)’라 하잖아요. 그 ‘더블유시’를 한자로 표현하니 ‘다불유시’가 된 게지요. 게다가 자연스럽게 의미도 연결시킨 거겠지요. 스님이니 당연히 부처님을 떠올리면서 이름을 지었겠죠.”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들었다. 다시 가서 확인을 해보니 역시 해우소였다. 좌우에 문을 두 군데 내고 변기는 나무로 공들여 짠 덮개로 막아 두었다. 덮개를 여니 아래가 바로 낭떠러지다. 이곳에서 볼일을 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다.
근데 이곳 창문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기가 막힌다. 지리산 설경이 나뭇가지 사이로 마구 쏟아진다. 그야말로 이곳은 ‘다불유시(多佛留是)’. 부처가 머무는 곳이었다.
금지선을 넘는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금해야 할 것을 금할 줄 알고 금지되지 않은 것에 묶이지 않는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이다. 금지되지 않은 것을 금지되었다 여기고 진정으로 금해야 할 것은 금하지 않는 삿된 소견에 사로잡힐 것인가.
반야봉을 넘어 중봉으로 향했다. 선승들도 일생에 꼭 한번 와보길 바랐다는 지리산 묘향대. 전설로만 들리던 그 암자를 찾아 나섰다. 몇 년을 마음에 두고 손꼽아 고대했던가. 그러나 마음만큼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도솔암 정견 스님과 훗날 가볼 것을 기약했지만 무슨 마음엔지 결국 혼자 길을 나서고 말았다. 스님은 혼자 가는 길이니 조심 또 조심하라는 말씀만 남겼다.
하늘이 감춘 땅
운해, 구름바다였다. 날이 새기도 전에 노고단 산장을 출발했다. 새벽 운해가 운수납자의 길을 밝힌다. 지리산이 가장 지리산다운 동틀 무렵. 흐르는 구름처럼 스승을 찾아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출가자의 마음으로 오지 암자를 찾아 나섰다. 두려움과 설렘, 만감이 교차했다.
노고단에서 능선을 따라 걷는다. 돼지평전, 임걸령을 지나 노루목에서 반야봉을 오른다. 능선에서 보이는 풍경은 온통 구름바다다. 저 구름 어딘가에는 전설 속의 암자.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아니 하늘도 감춘 땅 묘향대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능선에서 지리산 속으로 들어갔다.
중봉까지는 예사였다. 곧이어 직벽에 가까운 낭떠러지로 길이 이어졌다. 새들만 겨우 다녔을 오솔길은 자칫 한눈팔아 헛디디면 금방 천길 아래로 꼬꾸라질 위험천만한 길이었다. 머리털이 주뼛주뼛 곤두서는 긴장감으로 몸은 이미 땀범벅이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번에는 무서운 정적이 흐른다.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까마귀 울음소리. 그러곤 다시 침묵… 바람마저 숨을 죽인다. 이 광대한 원시림 속에 나 혼자 있다. 나는 왜 이곳에 왔는가. 여긴 어디일까.
길은 점점 미궁이다. 희미한 오솔길마저 풍도목이 가려버렸다. 두 눈을 부릅뜨지 않으면 길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 회색 바위와 거무튀튀한 고목에 핀 푸른 이끼들, 덩굴로 뒤섞인 원시림엔 태초의 괴기함마저 서렸다. 사람 하나 만날 수 없는 이 고립무원의 산길을 홀로 걷는다는 건, 애초 각오는 했지만, 분명 예측할 수 없는 두려운 길이었다. 오지 중의 오지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토록 외진 곳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하루 같은 한 시간이 흘렀을 무렵, 험하기만 했던 길이 다시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싱싱한 풀들이 동화 속 그림처럼 가르마 가르듯 길을 나뉜다. 바람도 멈추었다. 따스한 햇볕이 원시의 숲 깊숙이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암자가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아련한 꿈속인 듯 숲 사이로 집 한 채가 보였다.
중년의 사내가 절벽에서 외줄을 타고 있다. 족히 50미터는 될 뒤쪽 벼랑과 앞쪽에 장하게 자란 전나무에 튼실한 줄을 매달았다. 그 줄 하나에 의지해 수염을 기른 중년의 산사람이 허공을 걸어 암자의 지붕을 칠하고 있었다.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스님!”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다. 지붕 위의 사내가 분명 스님이 있다고 했는데 농을 친 건가. 법당에 들어서서 예배를 올렸다. 역시 스님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암자나 둘러볼 요량으로 건물 뒤를 돌아갔더니 우물가에 스님이 있었다.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나중에 기와불사나 해야겠다 싶어 법당 마루에 앉아 날짜를 적다 혼잣말로 ‘오늘이 며칠이지’ 중얼거렸을 뿐인데, 저 멀리 마당 끝에 있던 스님이 “25일요.” 하고 외치는 게 아닌가.
호림 스님은 2004년 묘향대에 왔다. 올해로 꼭 10년째다. 이곳에 지금의 암자가 들어선 지는 70년대 중반 도장 스님 때였다.
“예전부터 이곳은 수행처로 알려졌던 모양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고승들이 오고가며 이곳에서 수행을 했겠지요. 정확한 건 150년 전에 개운 스님이 이곳에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스님이 지은 <능엄경> 부록(주석서)에 보면 묘향대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어요.”
벼랑 끝으로 참선하기에 좋을 큼직한 바위가 놓여 있다. 바위 위에는 고사목을 깎아 얹어놓았다. 볕이 좋아서인지 그 위에 이불을 널었다.
“스님, 저기 좌선대 아닌가요?”
“좌선대는요, 무슨. 아닙니다.”
사람이 앉아 참선할 곳으로 보이는데, 그냥 이불을 널어 두었다. 볕이 좋으니 좌선대조차 건조대가 된다. 바람이라도 불면 벼랑 아래로 이불 한 장 떨어질 뿐, 단지 그뿐….
마당 끝 바윗돌에 잠시 앉았다. 스님도 객도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 간간히 주고받는 몇 마디 말뿐, 모든 것은 침묵 속에 있었다. 앞쪽 봉우리가 토끼봉이다. 대개 지리산의 이름난 암자들은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듯, 역시나 이곳에서도 늠름한 천왕봉이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다. 촛대봉, 명선봉… 능선 봉우리들이 병풍을 두르듯 동남향인 암자를 멀찍이서 둘러싸고 있다.
“예전에는 스님들이 이곳에 서로 오려고 했지요. 수행하기에 이만한 곳이 있었겠습니까. 근데 지금은 아무도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먼저 씻는 것부터 불편하니까요. 예전에는 누구나 걸어 다녔으니 이곳에 오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인데, 요즈음은 차로 편하게 다니는 세상이니 하루 꼬박 걸리는 이런 험한 오지를 누가 오려고 하겠어요.”
산중에 홀로 피는 꽃
몇 마디 말이 끊기자 긴 침묵이 흘렀다. 묻고 싶었다. 가장 고립된 땅, 세상과 단절된 이곳에서 스님이 이룰 것은 무엇인가. 개인의 깨달음인가. 이런 곳에서 십수 년을 버텨낸다는 것 자체로도 세인들의 눈에는 경이롭게 보이겠지만 중생을 구제한다는 대승의 입장에서도 과연 그럴까. 결국 고요한 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생을 사는 자연인과 안빈낙도의 삶을 사는 유가와 도가의 도인들과 무슨 차이란 말인가. 붓다의 시대에도 이런 의문을 가졌던 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붓다가 기원정사에 있을 때 상가라바라는 바라문이 찾아왔다. 자신들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희생을 바쳐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다함께 행복하게 하는데, 붓다의 제자들은 자기 한 몸의 행복만을 위해 도를 닦을 뿐이 아닌가 하고 질문했다. 이에 붓다는 여래가 도의 실천을 완성하여 번뇌가 사라지고 해탈을 얻고 난 후, 여래가 설한 결과 다른 사람들도 수행하여 해탈을 얻는 이가 수백․수천․수만에 이르렀다면 과연 한 사람만을 위한 행복의 길이겠는가 하고 반문했다.
자기에게 전념하고 자기의 깊은 내부를 들여다보는 수행방식은 얼핏 보기에 다른 이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사람이란 자기의 내부에 깊이 침잠했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먼저 ‘상구보리(上求菩提)’의 ‘자리(自利)’로 진리를 확고히 한 다음에 남을 구제하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이타(利他)’행을 실천하는 것을 붓다의 뜻으로 보고 있다. 붓다도 처음 그 자신의 인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출가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한 셈이 되었다. 결국 상구보리의 길이 하화중생의 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산중 꽃은 저 혼자 피지만 그 꽃향기는 산 아래로 흐른다고 하지 않은가.
떠나야 할 시간. 스님이 해우소 옆길을 가리킨다. 화개재로 가는 길이다. 화개재와 뱀사골로 가는 길을 두고 잠시 망설였다. 화개재로 가는 길은 편하겠지만 여행자는 뱀사골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스님은 쉽지 않은 길, 혼자 가는 길이니 부디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한 평 남짓한 스님의 채마밭 사이로 희미하게 길이 보였다.
두 시간 남짓 절벽을 타고, 길 아닌 길을 더듬은 끝에 계곡에 이르렀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해거름이 내려앉은 건너편 산을 바라본다. 이미 잎을 떨군 앙상한 나뭇가지, 그 사이로 단풍이 보인다. 미혹한 눈으로 보니 이쪽은 무색계, 저쪽은 색계다. 색, 이 또한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닌가. 색은 그 자체로 색이 아니다. 마음으로 생긴 것이 색이고, 마음과 색에 모두 색이 없으니 이것이 무색계이다.
잠시 쉬었는데 추위가 몰려온다. 계곡 옆 희미한 길을 따라갔으나 벼랑에서 길이 끊겼다. 천지를 요동치는 폭포수 소리만 귀청을 때린다. 이쪽, 저쪽, 위, 아래, 샅샅이 뒤져도 길이 없다. 길을 잃었다. 다리가 풀린 지는 이미 오래. 한 시각을 헤맸지만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지리산을 번질나게 다녔지만 처음으로 겁이 덜컥 났다. 한 시각쯤 흘렀을까. 저 위에서 인기척이 났다. 산사람이었다. 날다람쥐처럼 걷는 그를 따라 겨우 원시의 숲을 벗어날 수 있었다. 뱀사골에 닿았을 때는 이미 어둑해진 지 오래였다.
묘향대와 함박골
지리산 묘향대는 화엄사에 속한 암자이다. 오지 중의 오지로 해발 1500미터에 있다. 1200미터에 있는 설악산 봉정암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어 우리나라 암자 중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예부터 선승들은 북에는 묘향산 법왕대를, 남에는 지리산 묘향대를 꼽았다고 한다.
묘향(妙香)은 <아함경>에 나오는 말로 불교용어로 ‘기이한 향기(奇香)’를 말한다. 묘향에는 다문향(多聞香), 계향(戒香), 시향(施香)이 있다. 이 향은 바람을 거슬러 냄새를 풍긴다고 한다. 자신을 불태워 세상을 정화하는 보살의 정신. 세상의 논리를 거슬러 부처님의 바른 향기(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묘향대와 뱀사골 사이의 폭포수골과 함박골 일대는 빨치산이 활동했을 정도로 험지였다.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과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가 이곳을 근거지로 군경과 대치했다. 박영발은 폭포수골 바위 비트에 숨어 있다 폭사 당했다.
동안거 첫날, 산중 암자는 부산스러웠다. 대숲에서 스님들이 한 명씩 나온다. 그 모습이 마치 무대로 하나씩 등장하는 배우들 같다. 대숲 뒤에는 선방이 있다. 선방을 나온 스님들이 종무소를 에워쌌다. 선방의 반장 격인 입승(立繩)으로 보이는 스님이 진두지휘를 하고 나머지 스님들은 말없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깊은 산중의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을 막는 일. 숭숭 뚫려 있는 건물 틈새로 드나드는 삭풍을 막기 위해 비닐로 건물 외벽을 두르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동안거에 참여한 스님은 모두 아홉이었다.
“스님, 어디서 오셨습니까?”
“법주사에서 왔습니다.”
소탈한 모습의 스님은 대답도 시원시원하다.
“스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저기요.”
포대화상같이 넉살 좋게 생긴 스님이 느닷없이 검지로 허공을 찔렀다. 법주사에서 왔다는 스님이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거들었다.
“스님,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 있는 것 같은데요.”“여기요”
포대화상 스님이 이번에는 땅을 가리켰다.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일제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다불유시(多佛留是)의 정체
지리산에 눈이 날린다. 남쪽의 지리산과는 달리 북쪽 지리산은 온통 설국이다. 모든 것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고 세상을 하얗게 덮은, 말이 없는 겨울. 인월을 지나 골짜기를 한참이나 들어가니 백장암 초입이다. 암자로 가는 구불구불한 비탈길은 얼어붙었다. 마침 산을 내려오던 암주 스님의 ‘염려 거두라’는 말에 간신히 용기를 내어 암자를 올랐다.
암자 뜨락을 거닐고 있는데, 멀리 벼랑 끝으로 작은 건물 같은 것이 숲 사이로 언뜻 보였다. 무엇인데 저리 위태로운 곳에 있을까?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건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처음엔 해우소인가 했는데 바로 옆에 해우소는 따로 있었다. 신성한 기운마저 느껴지는 이곳의 정체는 대체 뭘까?
슬레이트 지붕에 두 짝의 문이 달린 지극히 간소한 건물. 색색 연꽃을 그리고, 기름한 널빤지에 세로로 내려쓴 ‘다불유시(多佛留是)’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글자대로라면 ‘모든 부처가 이곳에 머문다’는 뜻이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문을 열어볼까 하다가 무언가 영적인(?) 곳이지 않을까 싶어 머뭇거리다 종무소로 다시 나왔다. 마침 공양주 보살이 떡이라도 좀 들지 않겠냐고 해서 공양간으로 들어갔다.
“궁금하시죠? 그거요. 이곳 백장암의 명물이랍니다.”
“아무래도 알 수가 없네요. 부처가 머무는 곳이라고 적어 놓았는데….”
공양주 보살이 잠시 뜸을 들인다. 답답해하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해우소입니다.”
“예? 아… 그렇군요.”
허를 찔렸다. 바로 옆에 해우소가 있어 설마 해우소일까 했는데 해우소라니….
“스님들의 재치가 놀랍지요?”
“근데 해우소에 왜 ‘다불유시’라고 적었을까요?”
“아이 참, 아직 감을 못 잡으셨나? 영어로 해우소를 ‘더(다)블유시(WC)’라 하잖아요. 그 ‘더블유시’를 한자로 표현하니 ‘다불유시’가 된 게지요. 자연스럽게 의미도 연결시킨 거구요. 스님이니 당연히 부처님을 떠올리면서 이름을 지었겠죠.”
아, 그렇군! 나도 모르게 이마를 쳤다. 다시 가서 확인을 해보니 역시 해우소였다. 안에는 나무로 공들여 짠 덮개로 변기를 막아 두었다. 덮개를 여니 아래가 바로 낭떠러지다. 이곳에서 볼일을 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다. 근데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경치가 기가 막힌다. 지리산 설경이 나뭇가지 사이로 마구 쏟아진다. 그야말로 이곳은 ‘다불유시(多佛留是)’. 부처가 머무는 곳이다.
백장청규
지리산이라지만 실상사는 평지에 있고 산내암자인 백장암은 산 높이 아스라이 걸려 있다. 진리 그 자체,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 실상이라면, 백장은 그 진리를 깨친 이, 참모습을 본 이를 이름이랴.
당나라의 유명한 선승 마조 도일(馬組 道一. 709~788)의 선맥을 잇는 수제자로는 서당 지장(西堂 智藏), 백장 회해(百丈 懷海), 남전 보원(南泉 普願)을 들 수 있다. 그중 큰형 격인 서당의 제자들 중에는 신라 승려인 도의, 홍척, 혜철이 있다. 이 세 사람이 신라로 돌아와 각기 구산선문을 열었는데 그중 홍척이 지리산에 연 것이 실상사이다. 결국 지리산 실상사는 마조 도일의 제자인 서당의 선풍을, 백장암은 그 이름대로 백장의 선풍을 이었으니 마조에게서 비롯된 한 몸이나 다름없다. 마조는 ‘경(經)은 서당이고, 선(禪)은 백장이고, 남전은 물외(物外)의 이치에 초연하다’고 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마라(一日不作 一日不食)”
유명한 ‘백장청규'의 노동정신이다. 백장 스님은 기존의 율원과는 다른 선원의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새로이 선종의 규율을 엄격히 세웠다. 그 결과물이 최초의 선원 규칙인 ‘백장청규’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 청규는 예부터 사찰 어디서든 받들어 행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연로한 나이에도 계속 일하는 백장을 본 제자들이 하루는 일을 못하도록 연장을 감췄다. 그러자 백장은 그날 밥을 먹지 않았다. 또 다른 날에는 백장에게 스님들이 선의 강설을 청한 적이 있었다. 백장은 “밭에서 일하고 오너라. 그 뒤에 선을 가르쳐 주마.”라고 했다. 일을 끝낸 뒤 스님들이 약속을 재촉하자 백장은 양 손을 펴 보일 뿐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백장의 대설법이었던 것이다.
선 생활의 기본은 ‘행위에 의해 배운다’는 것이다.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밥 짓고, 나무하고, 밭 갈고, 씨 뿌리고, 탁발하는 것 등이, 모두 천한 것이 아니라 신성한 것이라고 여기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하는 것이다.
흔히 선승이라고 하면 세상을 잊어버린 사람이라고 여길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선승은 무게 있고, 엄숙하고, 얼굴빛이 창백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쾌활하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로 비천한 일도 자진해서 하는 실생활을 사는 사람이다. 선은 심원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실생활인 것이다. 깨달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세속적인 일상생활을 보내는 것이 바로 선이다. 일정 기간 은둔생활을 보내고 나면 세상으로 나오는 위대한 선승들을 보게 된다. 부처 있는 곳에 머물지 않고, 부처 없는 곳에 달려가는 것이다.
붓다는 어땠을까.
나도 밭을 간다
붓다가 마가다국의 에카사라라는 마을에 있을 때 하루하루의 생활을 탁발에 의지하며 법을 설하고 있었다. 어느 날 붓다는 탁발을 나갔는데, 그 집은 바라문의 집이었다. 바라문은 자신은 밭을 갈고 씨를 뿌려서 직접 먹을 양식을 마련하고 있으니 당신도 스스로 밭을 갈고 씨를 뿌려서 자신이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날을 세워 말했다. 요즈음 말로 치면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 는 비아냥거림이었다.
이에 붓다는 나도 밭을 갈고 씨 뿌려서 먹을 것을 얻고 있다고 태연히 응수했다. 이 말을 듣고 바라문은 당신이 밭 갈고 씨 뿌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냐며 다소 어이없어했다. 그때 붓다는 내가 뿌리는 씨는 믿음이요, 내 보습은 지혜요, 나날이 악업을 제어하는 것은 김매는 것이요, 소를 모는 것은 정진이요, 그 수확이 감로의 열매이니 이런 것이 자신의 농사라고 말했다. 농사꾼이 땅을 갈아 농사를 짓듯이 붓다 또한 인간 정신을 계발하는 농사를 짓고 있다는 것을 ‘나도 밭을 간다’라고 했던 것이다.
해 저무는 하늘가로 아스라이 구름이 깔렸다. <화엄경>에 “삶이란 한 조각 구름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 사라지는 것(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이라고 했다. 설국의 정적을 새 한 마리가 깨뜨린다. 파적. 무상이다.
가지에 얼어붙은 눈 편편이 떨어지고
저무는 하늘에 솔바람 파도 소리
돌 위에 지팡이 짚고 고개 돌리니
눈 덮인 봉우리 높이 새가 구름 곁을 난다
- 설암 추봉(1651~1706)의 <설후귀산雪後歸山>
백장암
실상사의 산내 암자인 백장암은 수청산(772미터) 중턱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백장사(百丈寺)로 기록되어 있고, ‘수청산(水淸山)에 있다’고 단 한 줄로만 언급되어 있다. 1468년(세조 14) 실상사가 화재로 폐허가 되자 1679년(숙종 5)까지 백장암이 중심 사찰로 승격되면서 백장사가 된 것이다. 이는 당시 지리산을 유람한 이들의 기록에도 나타나는데, 대개 백장암(당시 백장사)에서 투숙을 하고 지리산을 유람했다.
양대박은 1565년 가을에 백장사에서 투숙하고 천왕봉에 올랐다. 1586년 9월 3일 다시 백장사를 찾아 하룻밤을 묵었다<두류산기행록>. 유몽인은 1611년 3월 29일 백장사에서 1박을 했다<유두류산록>. 이들은 대개 운봉현에서 인월역을 거쳐 백장사에 하룻밤을 묵은 후 지리산을 유람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장암도 1679년(숙종 5)에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이조참판과 진주목사를 지낸 송광연(1638~1695)은 1680년 윤8월 26일 천왕봉을 내려와 군자사를 들렀다가 백장사에 이르렀다. ‘절(백장암)을 새로 창건하고 있는데 아직 완공되지 않아서 잠시 쉬었다가 인월역에서 숙박을 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두류록>.
실상사와 비슷한 시기에 창건된 백장암에는 국보 제10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제40호인 석등, 보물 제420호인 백장암청동은입사향로가 있다. 백장암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기존 석탑과는 다른 ‘이형 석탑’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탑 전체를 두른 조각들이 장엄하고 섬세하여 바로 뒤에 있는 정교하고 단아한 석등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백장 회해(百丈 懷海: 749~814)는 당나라의 선승이다. 백장산(百丈山)에서 살았기 때문에 백장이라고 부르고 이름은 회해(懷海)이다. 초조 달마대사에서 육조혜능, 남악회양, 마조도일에 이어 제9대 조사이다.
이중섭 하면 으레 제주와 통영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진주’라는 도시를 간과해선 안 된다. 아주 강렬한 단 한 점의 들소 그림과 두고두고 회자됐던 인상적인 자신의 사진 한 장을 남긴 곳이 바로 진주이기 때문이다. 20세기의 가장 빼어난 걸작으로 평가받는 <진주 붉은 소>와 허종배가 찍은 <이중섭 모습 04-담배 불 붙이는 이중섭> 사진이 그의 진주 시절 작품이다.
<진주 붉은 소>에 대해 미술평론가이자 《이중섭 평전》의 저자인 최열은 “진주에게 이중섭은 잠시 스쳐간 손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손님이 그저 흐르는 바람이 아니었던 까닭은 오직 이 <진주 붉은 소> 때문이고, 그 작품이 20세기 미술사상 가장 특별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섭이 진주에 간 까닭은 그러니까 오직 이 진주처럼 영롱한 보석, 붉은 소를 남기기 위해서였던 것이다.”라고 격찬을 했다. 이 작품은 진주에 온 이중섭이 박생광에게 그려준 것이다.
<이중섭 모습 04-담배 불 붙이는 이중섭>은 사진작가 허종배가 1954년 5월 진주에서 촬영한 것이다.
이 사진은 1967년 10월호 《공간》에 처음 발표됐다. 1972년 3월 현대화랑에서 간행한 《이중섭 작품집》 속표지에 실렸고, 1979년 4월 한국문학사에서 발행한 《대향 이중섭》 속표지에도 게재될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2014년에 출간된 돌베개의 《이중섭 평전》 표지 사진으로도 사용됐을 정도로 인물 사진으로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허종배는 평생 부산과 경남 일대를 누비던 사진작가로, 말년에 백혈병 소녀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전설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이중섭의 진주 시절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짧은 기간 동안 그가 남긴 것은 진주를 적셔주고도 남을 정도로 아름답다. 이중섭은 화우 박생광의 초대로 1954년 5월 진주에 와서 카나리아 다방에서 개인전을 연 후 6월 초순 서울로 갔다.
그림자 하나, 그림자 둘, 그림자 셋… 다시 그림자 둘, 그림자 셋, 그림자 다섯. 잔설이 남은 침묵의 절 마당을 침범하는 그림자들. 800고지의 깊숙한 암자임에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빙판이 된 응달 깊숙이까지 파고든 햇볕이 따사롭다. 문수전 앞 빈 마당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네모난 검은 돌 하나. 석탑이나 석등의 형체는 사라지고 흔적만 남은 곳에 붉은 햇살이 부서진다.
보설루, 아자방, 대웅전, 문수전, 설선당, 원음각. 사방을 두루 비추는 햇살이 경내를 휘돌아 검은 돌에서 머문다. 이미 존재 그자체가 되어버린 돌의 표면은 감출 수 있는 그 무엇도 없다. 그림자 하나가 검은 돌을 침범하자 잠시 주춤하는 햇살. 그림자가 물려난 뒤 가만히 다가온다. 그림자와 빛의 조우. 붉은 빛과 검은 돌의 경계가 사라진다. 그윽하고 편안하다.
용케 햇살을 피한 담장 아래의 잔설. 하얀 몸이 유독 눈부시다. 하얀 눈 속에서 피었다는 자줏빛 칡꽃. 화개동 이야기는 전설처럼 아득하다. 화개에서 쌍계사까지 10리, 쌍계사에서 칠불암까지 다시 20리, 모두 합하여 30리에 이른다. 북쪽 반야봉에서도 칠불암까지 남쪽으로 30리 지점이니 남북의 거리가 서로 같다.
칠불암 가는 길은 깊다. 차로 가는 지금도 산속을 한참이나 달려야 한다. 지리산에서 차로 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골짜기이다. 풍경도 사뭇 달라졌다. 듬성듬성 있던 산간마을과 층층 다랑논의 한가로운 풍경은 간 데 없고 펜션과 민박집들이 산비탈과 계곡 가득 들어섰다. 지리산까지 밀고 들어온 커피 바람은 이곳이 녹차의 시배지 임을 무색케 할 정도다. 차향보다 커피향 진한 이곳에서 야생의 차밭 대신 산허리를 벌겋게 드러낸 채 최근에 조성된 넓디넓은 녹차밭 풍경이 생경스럽다. 서산대사의 <화개동>이라는 시가 도리어 낯설다. “진흙은 푸른 돌의 정수 되고 / 소나무는 늙은 용의 비늘 되네 / 멀리 흰 구름 향해 개 짖으니 / 도화동에도 사람이 사는구나”
구름 위의 집
동국제일선원 칠불암은 그 옛날 ‘구름 위의 집’, 운상원으로 불렸다. 절 아래 골짜기가 구름바다에 잠기면 이곳이 구름 위에 드러나니 그렇게 불리었을 것이다. 연꽃이 반쯤 피어 연화반개처(蓮花半開處)라고도 불리던 이곳, 칠불암에서 내려다보는 화개동천과 백운산은 예부터 선경이라 했다. 남쪽 지리산에서 백운산 정상이 보이지 않으면 명당도 좋은 절터도 아니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이 빼어난 풍광을 가장 잘 읊은 시가 서산대사의 제자인 정관 일선(1533~1608)의 시다.
“두류산 반야봉 동쪽에 절이 있는데 / 달빛이 금당을 밝혀 그림자 영롱해라 / 향불 꺼지자 아지랑이가 탑 끝에 날고 / 종소리가 꿈 깨며 늦바람에 들려오네 / 청학동에 푸른 학은 오지 않는데 / 백운산은 흰 구름이 늘 감싸고 있네 / 석문이 저 멀리 쌍계 아래로 보이고 / 희미한 가을빛이 한눈에 보이네”
칠불암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전해진다. 연담 유일(1720-1799)이 쓴 <칠불암 상량문>에는 신라 신문왕 때 옥부선인이 부는 옥피리(玉笛) 소리를 들은 일곱 왕자가 입산하여 6년 만에 도를 깨치고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응윤 스님의 <경암집>에는 이 암자의 옛 이름은 운상원이었는데 신라 신문왕의 두 아들이 궁모 5인과 함께 이 암자에 들어와 성불했기 때문에 지금의 칠불사라 했다고 적고 있다. 화엄사 승려였던 진응(1873~1941)의 <지리산지>에 따르면 지리산은 칠불조사인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에 칠불암이라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가야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이곳에서 성불하여 칠불암이라 불렸다는 이야기가 가장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수로왕은 아들 10명을 두었다. 장남은 왕위를 잇고, 둘째와 셋째는 어머니 허씨의 성을 받아 후사를 잇게 하고 나머지 일곱 왕자는 속세에 살 마음을 끊고 외삼촌 장유화상을 따라 지리산에 왔다. 이곳 지리산에 운상원을 짓고 수행하여 6년 만인 103년 8월 보름에 모두 성불했다고 전해진다.
천 년 넘은 온돌방
칠불암이 유명세를 떨친 데에는 아자방이라는 특이한 온돌방 덕분이다. 서쪽 하늘을 등지고 있는 아자방은 천 년을 넘게 사용된 온돌방이다. 아자방은 위에서 보면 방이 버금 ‘아(亞)’자 모양으로 보이므로 ‘아자방’이라 한다. 아자방은 신라 지마왕 때 혹은 신라 효공왕 때 금관가야에서 온 담공 선사가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신라 지마왕 때라면 1900년이 된 셈이고 효공왕 때라 해도 1100년이 넘는다. 아자방의 온돌은 한 번도 크게 고친 적이 없지만 불 고래가 막히지 않았다고 한다. 방의 바닥도 높고 낮은데 고루 따뜻하여 옛사람들도 불가사의한 유적으로 봤다.
일생 우리나라의 명산을 두루 유람한 삼연 김창흡(1653~1722)은 <영남일기>에서 두 달여 동안 영남을 유람하던 중 1708년 3월 15일 칠불암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이때 잠잔 곳이 아자방인데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밤에 선방에서 잤다. 선방에는 상하층으로 온돌이 깔려 있어 훈기가 두루 퍼졌다. 이 또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계상과 함께 상층의 온돌로 가서 몸을 펴고 누우니, 인간 세상을 모를 지경이었다.”
한 번 불을 때면 일곱 짐이나 되는 나무를 한꺼번에 땠다고 한다. 불길이 막히지 않고, 높고 낮은 곳이 고루 따뜻했다. 방안 네 귀퉁이에 70cm씩 높인 곳이 스님들이 벽을 향하여 좌선 수행하는 ‘좌선처’이고, 가운데 십자 모양의 낮은 곳이 통로가 되거나 스님들이 참선 틈틈이 경전을 읽는 ‘행경처’이다. 아자방이 있는 건물은 벽안당이다. 장작을 통째로 지고 들어가 한 번 불을 지피면 동안거 결제일인 10월 보름부터 해제일인 이듬해 정월 보름까지 온기가 식지 않고 따뜻했다고 한다.
특이한 2중 구조의 아자방은 구들을 놓은 솜씨가 정교하고 독특하여 오랜 기간 살펴봤지만 그 구조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한다. 1948년 여순사건 때 칠불암이 불탔을 때 구들만은 남아 함석을 덮어 보존했다. 그 후 1982년 봄에 통광 스님이 다시 옛 모습대로 복원했다. 아자방은 그 치밀한 구들과 탁월한 구조로 1979년 세계건축물협회에서 펴낸 <세계건축사전>에 수록되기도 했다.
이 아자방엔 사람이 선 채로 지게에 나뭇짐을 지고 들어갈 만큼의 큰 아궁이가 방바닥보다 한길이나 더 낮은 곳에 있다. 亞자 방의 왼쪽에 있는 이 아궁이 공간은 입 구(口)자 모양이 되어 아자방 전체가 벙어리 아(啞)자 모양이 된다. 이 모양 때문일까. 아자방은 스님들이 묵언수행을 하는 공간이라는 상징이 됐다.
실제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1785년 3월 23일자를 보면 선전관 이윤춘이 지리산의 수상한 도당들에 대해 상언한 글이 있는데 “취령(벽소령) 아래 칠불암이 있는데, 그 문귀에 달린 현판에는 ‘동국제일선원’이라 쓰여 있습니다. 그 안에 아자 형으로 된 승방이 있습니다. 승려들을 대사라고 부르는데 하루 종일 벽을 향하여 말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사람이 아홉 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모두 아침에 모여 묵언 수행하다가 저물녘에 흩어졌습니다.”고 적고 있다.
경암 응윤 스님도 <경암집-칠불암기>에서 아자방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서쪽은 고승당이다. 온돌방의 높고 낮은 데가 고루 따뜻하다. 고승당에서 결제를 할 적에는 말을 하지 않고, 면벽을 해야 한다. 이는 달마대사의 마음을 참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자선방에는 수행자들의 오랜 전통이 있다. 참선할 때는 면벽하고 묵언을 하며 눕지 않고, 행경할 때는 꼭 발뒤꿈치를 들고, 공양은 하루 한 끼만 먹는다는 것이다.
아자방의 절묘한 공간 배치는, 일자나 원형으로 앉는 것에 비해 ‘아’자로 앉아 참선을 하는 것이 독립적인 분위기를 느껴 심리적인 안정을 준다. 또한, 한번 불을 때면 오랜 시간 따뜻함을 유지하니 아궁이를 들락거리며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서 좋고 집중도도 높일 수 있다. 게다가 온도 또한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 장시간 앉아 있는 좌선에는 꼭 맞는 온돌인 셈이다. 지금은 예전보단 못하지만 한 번 불을 때면 온기가 일주일 정도는 가는 모양이다.
소년 승탑
암자 아래 길가 숲속에 연못이 하나 있다. 일곱 왕자의 전설이 서려 있는 연못으로 일명 ‘영담’으로도 불린다. 일곱 왕자가 성불했다는 소식을 듣고 김수로왕과 허황옥이 이곳에 왔는데, 수차례 간청에도 만나기를 거부하던 일곱 왕자가 이 연못에 성불한 모습을 비췄다는 내용이다. 칠불의 그림자가 비친 연못이라 하여 ‘영지(影池)’라 부르게 됐다.
그런데 조선 중기 이봉 스님의 <천연집>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수로왕과 허황옥이 일곱 왕자가 성불했다는 소식을 듣고 운상원을 찾았는데, 왕자들의 모습이 옛날 그대로였다. 왕과 왕비가 의아하게 여겼더니 절 아래 연못에서 자신들을 보라고 말했다. 연못 속을 보니 일곱 왕자가 환하게 웃으며 일곱 부처님(金身)으로 비춰졌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이를 기리고자 운상원 아래 두 곳에 절을 창건했다. 왕이 거처하던 곳에 지은 절을 범왕사, 왕비가 거처하던 곳에 천비사(대비사)를 지었다. 지금은 두 절이 있던 곳이 모두 범왕리, 대비리 마을이 되었다.
칠불암에는 부휴대사, 인허당 , 무가당, 제월당 등의 승탑(부도)이 있는데, 일주문 아래 다신탑비 옆 외따로 떨어진 작은 승탑 하나가 유독 눈길을 끈다. 일명 ‘소년 승탑’이다. 옛날 칠불암 상좌 중에 여자처럼 예쁘고 마음씨가 고운 소년 스님이 있었다. 이 소년 스님은 일꾼들에게 무척이나 인기가 좋았다. 당시는 칠불암 중창공사가 한창이라 30리 아래의 사하촌에서 기와를 이고지고 험한 산길을 왕복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30리 길을 왕복하며 일을 하던 소년 스님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절은 중건되었지만 스님은 끝내 일어나지 못해 죽었고 그를 위해 세운 탑이 소년 승탑이란다. 화개 사람들은 소년 스님을 불사를 도우려 현신한 문수동자라고 여겼다 한다.
칠불암
칠불암(칠불사)은 쌍계사 북쪽 20리 되는 곳인 지리산 토끼봉(1533m) 아래 800고지에 있는 암자이다. 칠불암은 쌍계사의 암자 가운데 하나지만 규모가 커서 조선시대에도 지금도 칠불사로 불리고 있다.(이 글에서는 ‘칠불암’으로 표기했다.) 원래 운상원이라 불렸는데 가락국 일곱 왕자가 성불한 곳이라 하여 칠불암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다. 또는 지리산은 칠불조사(七佛祖師)인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에 칠불암이라 했다고도 한다. 신라의 옥보고는 이곳 운상원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공부하고 30곡을 지어 세상에 전했다고 한다. 현재 운상선원은 선방으로 쓰고 있다.
창건 이후 칠불암은 동국제일선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선승들의 수도처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고려 시대의 대선사인 청명 화상을 비롯해 조선 중종 대의 추월 조능 선사, 선조와 광해군 대의 서산 대사와 부휴 선수 대사 등이 주석했다. 또 사제지간인 금담 율사와 대은율사, 다승 초의 선사도 이곳에서 <다신전(茶神傳)>을 초록했다. 용성·석우·금오 등의 선사들도 여기에서 수행했다.
특히, 사명당과 함께 당대의 ‘이난(二難. 높은 학식과 덕행, 뛰어난 글씨와 문장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두 고수)’으로 불리며 서산대사의 ‘청허문’과 함께 한국 불교의 양대 법맥인 ‘부휴문’의 부휴 선수(1543~1615)는 칠불암에서 주석하고 입적했다. 문하에 700여 명의 제자가 있었다. 부휴대사의 승탑은 암자 내 운상선원에 있다.
이뿐만 아니라 칠불암은 조선 시대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이었다. 하동군 화개를 통해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가는 유람객들은 대개 쌍계사와 불일암, 신흥동 일대를 유람하고, 이곳 칠불암을 거쳐 천왕봉으로 갔으며, 천왕봉에서 하산하는 유람객 또한 같은 코스로 하산했다.
1655년 10월 화개동을 찾은 김지백은 <유두류산기>에서 “지리산에는 370여 곳의 사찰이 있는데 그중에서 기이하고 아름답기로 칠불암이 제일이다. 금빛, 푸른빛, 붉은빛의 단청이 현란하여 사람들의 눈을 끌었다.”고 적고 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1946년 3월부터 5월까지 미국여행을, 1949년 6월에서 8월까지 남아메리카를 여행했다. 그는 여행에서 기록한 것들을 이후 그의 작품에 다루었다. 미국 여행 기록은 <뉴욕의 비>로, 남아메리카 여행 기록의 단편들은 <가장 가까운 바다>, <자라나는 돌>에서 활용됐다.
그 외에도 어머니의 뿌리를 찾아서 간 스페인의 발레아레스 섬으로의 여행은 산문 <삶에의 사랑>으로, 중부 유럽, 특히 프라하로의 여행은 산문 <영혼 속의 죽음>, 소설 <행복한 죽음>, 희곡 <오해>로, 이탈리아 여행 경험은 소설 <행복한 죽음>과 산문 <사막>으로 나타났다.
<작가수첩>에서 밝혔듯이 카뮈에게 있어 여행은 “어려움에 대한 관심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에게 여행은 일종의 고행이었고 자기완성의 한 형식 혹은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삶의 참다운 얼굴을 발견하는 수단이었다.
그의 여행을 굳이 구분하자면, 2차 세계 대전 전까지의 여행이 고행과 자기완성의 한 과정이었다면 그 후의 여행은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발견을 통한 연대의식의 실현이었다.
1946년 3월에서 5월까지 약 3개월에 걸친 카뮈의 미국 여행은 네 번째의 긴 여행이었다. 이 여행은 타자와의 만남, 즉 강연, 회견, 토론 등 문화적 사명의 실천과 관련이 있다.
종전 직후인 1946년 3월 10일 르아브로 항을 출발한 카뮈는 보름 뒤인 3월 25일 뉴옥 항에 도착한다. 전쟁의 폐허에서 온 그는 미국의 발전된 모습에 놀라기도 하지만 작가로서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역시 ‘구체적인 것들’과 ‘사소한 것들’이다.
5월 25일 카뮈는 브롬리가 구입한 새 차로 함께 캐나다 여행을 떠난다. 5월 26일 몬트리올에 도착한 후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카뮈는 열흘간의 고단한 바다 여행을 거쳐 6월 21일 프랑스 보르도에 도착한다. 그는 배 위에서 깊은 여행을 느끼곤 했는데, 배 위에선 “모든 인간관계가 빠른 속도로 형성”되어 그 자체가 관찰 대상이었던 것이다.
1949년 초, 프랑스 외무성 문화교류국의 로제 세이두가 카뮈에게 다섯 번의 강연을 조건으로 남미 행을 제안했다. 1949년 6월 30일 카뮈는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고 떠난다. 15일간의 바다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장기간에 걸친 바다 여행은 <여행일기>를 거쳐 후일 <가장 가까운 바다(항해일지)>라는 산문시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카뮈는 스스로 ‘금속 관’이라고 표현하는 비행기 안에서 자주 ‘질식의 느낌’을 받는다. 그는 남미의 <여행일기> 여러 대목에서 비행기 여행에 대한 고통과 혐오, 심지어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카뮈의 남미 여행에 혼란과 고통을 가져오는 것은 비행기뿐만 아니라 여행 일정을 짠 현지 책임자들의 미숙함과 카뮈 자신의 위태로운 건강도 크게 한몫을 했다.
카뮈의 남미 여행이 문학적으로 거두어들인 가장 의미심장한 두 작품이 산문시 <가장 가까운 바다(항해일지)>와 중편 소설 <자라나는 돌>인 것은 결코 우연히 아니다.
이 여행으로 말미암아 이미 허약해진 카뮈의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앞으로 2년 동안 <반항하는 인간> 집필을 계속하는 것 이외에 아무 일도 못하게 된다. 하는 수 없이 한가해진 이 기간을 이용, 자기의 작품 세계 전반에 대해 반성한다.
우리는 뉴욕 항을 거슬러 올라간다. 안개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안개 때문에 기막히게 멋진 광경. 질서, 힘, 경제력이 저기에 있다. 저렇게도 기막힌 비인간성 앞에서 심장이 떨린다. 28~29쪽.
대학생들과 보내는 오후. 학생들은 진정한 문제를 느끼고 있지 못하지만 그들이 향수를 느끼고 있음은 분명하다. 인생은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것이 다 동원되고 있는 이 나라에서 학생들은 무언가 결핍을 느끼고 있다. 그들의 커다란 노력은 비장하다. 하지만 비극성이란 일단 바라본 후에 떨쳐버려야 할 것이지 보기도 전에 버려서는 안 된다. 40쪽.
이곳에서 인간관계가 아주 쉬운 것은 인간관계가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겉껍질만 남습니다. 예의상, 그리고 게을러서. 41쪽.
어떤 한 사내가 여행 중에 별다른 생각 없이 어떤 자연 그대로인 고장의 외따로 떨어진 여인숙에 든다. 그런데 거기서 그 자연의 침묵, 아무 치장 없는 소박한 방,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 등이 그로 하여금 영원히 이곳에 머물며 과거의 자기 삶이었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그리하여 그 어느 누구에게도 기별하지 말고 지내기로 결심하게 한다. (뉴욕 주 북쪽에 있는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애디론댁 산맥 한가운데 있는 적은 여인숙 방에 들어가며 떠오른 느낌.) 46쪽.
뉴욕의 비. 끊임없이 내리며 모든 것을 씻어낸다. 회색의 안개 속에서 마천루들은 죽은 자들이 살고 있는 이 도시의 거대한 관들처럼 희끄무레하게 서 있다. 빗속에서 이 관들의 밑받침이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51쪽.
쥘리앵 그린은 그의 <일기> 속에서 소설을 쓰는 성인을 상상하는 일이 가능할까 자문하고 있다. 물론 그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반항 없이는 소설도 없으니까. 혹 그렇지 않다면, 이 지상 세계와 인간을 비난하는 소설을 ― 절대적으로 사랑이 배제된 소설을 상상해야 할 것이다. 불가능한 일. 52쪽.
바다는 표면만 겨우 빛을 받고 있지만 바다의 깊은 어둠이 느껴진다. 바다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사랑한다! 삶의 부름인 동시에 죽음에의 초대. 61쪽.
그러니 샹포르가 정확하게 꼬집어 말했듯이, 사교계에서 남의 호감을 사려면 자기가 알고 있는 많은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체념하고 배울 것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81쪽.
나는 여러 시간 동안 다시 한 번 이 단조로운 자연과 이 광막한 공간을 바라본다.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지만 보는 이의 정신에 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그런 경치다. 132쪽.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벼랑 너머에서 나타났다. 파르라니 맑은 얼굴의 스님이 앞서고 그 뒤를 네댓 명의 등산객이 쑥덕이며 뒤따르고 있었다.
“여기는 꼭 들러야 돼. 사람들이 대개 폭포만 보고 이곳은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라고.”
완벽한 등산복 차림을 한 오십 대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일행들을 멈춰 세우고 아는 체를 한다. 이곳저곳 여행 깨나 다녔다는 표정이다. 그가 잠시 설명하느라 지체하는 사이 스님은 암자 안으로 사라졌다.
“이곳은 말이야. 법정 스님이 머물기도 한 곳이지. 불일암. 다들 들어봤지?”
사내가 자신 있게 이야기하자 ‘아’ 하며 순간 모두 동의하는 듯했다. 근데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넙데데한 얼굴의 사내는 확신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기 봐. 의자도 있잖아. 법정 스님이 앉았던 저 나무의자 말이야. 어, 그래 빠삐용 의자.”
고개 젓던 이를 의식한 듯 등산복 사내는 다그치듯 말을 이어갔다. 머쓱해진 사내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나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무언의 신호를 받은 나는 어쩔 도리가 없어,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단호하게 한마디 던졌다.
“법정 스님이 머문 곳은 송광사 불일암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제야 혼자 갸우뚱하던 남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송광사 불일암이라고요.. 송광사에는 불일암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등산복 사내는 이방인이 끼어들어서인지 조금은 불쾌한 듯했고 자신의 주장을 쉬이 굽히려 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인터넷을 찾아보는 게 제일이지.’ 누군가 제안했고 잠시 조용해지더니 ‘거 봐, 송광사에 불일암이 있네.’ ‘어, 법정 스님이 불일폭포 옆 불일암에도 머물렀다는 글도 있는데.’ 그야말로 아수라가 따로 없다. 조용했던 암자는 때 아닌 논쟁으로 번다해졌다.
언쟁을 벌이던 등산객들이 사라지자 암자는 다시 침묵에 빠졌다. 그제야 아까 봤던 스님이 선방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인기척이 전혀 없다. 문을 열고 한마디 했을 법도 한데 스님은 요지부동이다. 삼매에 들었는가, 아니면 부질없는 언쟁에 지긋이 웃고만 있었을까.
<중아함경>과 <열반경>에는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말라족의 귀족으로 큰 상인인 풋쿠사가 쿠시나가르에서 파바로 가는 도중에 붓다와 마주쳤다. 그는 붓다에게 인사를 드리고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스승인 아라다 카라마(그는 붓다가 처음 수행할 때의 스승이기도 했다)가 깊은 참선의 경지에 들어 5백 대의 마차 대열이 바로 곁을 지나가는데도 모르더라는 이야기를 하며 스승의 수행의 깊이를 칭찬했다. 이에 붓다는 태연히 자신의 경험을 말해 주었다.
“언젠가 나는 아투마촌의 암자에 머물고 있었는데, 때마침 커다란 벼락이 떨어져 두 형제와 네 마리의 소가 죽는 큰 사건이 생겼소. 나는 그때 좌선을 하고 있어 전혀 몰랐는데, 나중에 사람들한테서 그 이야기를 듣고 알았소.”
이 말을 들은 풋쿠사는 아라다 카라마보다 붓다가 훨씬 뛰어나다는 걸 알고 붓다의 우바새(재가신자)가 됐다고 한다. 정신을 통일해 바깥세계를 전혀 느끼지 않는 엄청난 집중력이 선정이라면, 이 선정의 깊이로 종교가의 우열이 드러나는 것이다.
아득히 구름 끝에 매달린 암자
“ (…) 돌 잡고 숲 뚫어 굽은 길 트였으니 / 우뚝한 집 푸른 구름 속에 홀연히 나타나네 / 하늘 바람 은하수에 불어오니 / 정신과 생각 표연히 인간세상 벗어나네” - 기대승의 <불일폭포> 중에서, 《고봉선생문집》
지금이야 나무 데크를 깔고 계단을 놓아 불일암 가는 길이 한결 수월해졌지만, 십수 년 전만 해도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겨울에는 접근이 힘들 정도로 험한 곳이었다. 그 옛날에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불일암 가는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절벽의 잔도를 따라 겨우 폭포에 이르렀다는 기록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김일손(1464~1498)은 ‘잔도를 타고 올라 한 암자에 이르렀는데, 불일암이라 했다. 암자가 절벽 위에 있어 앞은 낭떠러지였다’고 했고, 남명 조식(1501~1572)은 ‘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비로소 불일암에 도착했는데, 암자는 허공에 매달린 듯한 바위 위에 있어서 아래로 내려다 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성여신(1546~1632)도 ‘바위 허리에 난 길이 끝나는 곳에 나무를 쪼개어 걸쳐 놓았다. 그 밑은 억만 길이어서, 스스로 목숨을 내맡긴 자가 아니면 태연히 지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당시 불일암에 이르는 길은 위험천만한 길이었다.
<진양지>에도 ‘비탈진 골짜기가 매우 험준하여 작은 길도 없기 때문에 절벽의 허리를 파고 바위를 따라 한 사람만 용납하는 벼랑 깎아지른 곳에 나무를 깎아 잔도를 만들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암자는 또 현애 위에 있어서 높이가 100여 척이 됐다’고 적고 있다. 응윤(1743~1803) 스님도 ‘갈고리를 허공에 매달고 바위틈을 따라 잡아당기며 나아가면 작은 집이 우뚝하게 서 있는데 속된 생각이 없어진다.’고 할 정도로 불일암은 낭떠러지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지리산 유람록의 효시를 연 이륙(1438~1498)은 <유지리산록>에서 ‘골짜기의 절벽이 매우 높아서 해와 달이 비추질 못한다. 위아래의 높이가 모두 몇백 길이나 되는데,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길이 나 있다. 절벽을 뚫고 오를 수 있는 곳에는 나무를 걸쳐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이 길을 오가는 사람치고 놀라 식은땀을 흘리고 머리끝이 쭈뼛쭈뼛 서지 않는 이가 없다. 또한 절벽 끝에 암자가 있는데, 그 밑은 백여 길이나 된다.’고 적고 있다.
이외에도 1618년 불일암을 찾은 양경우(1568~1629)는 불일암을 ‘아득히 구름 끝에 매달린 풍경’으로 묘사했다. 1651년에 불일암을 찾은 오두인은 ‘깎아지른 듯한 사방을 둘러보니, 반쯤은 허공에 뜬 것 같았다. 매우 깔끔하면서고 고요하여 인간 세상의 경계가 전혀 아니었다. 물외의 청정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이주대는 <유두류산록>에서 ’낭떠러지 허공의 끊어진 곳에 위태로운 백 척의 사다리가 겨우 매달려 있다‘며 불일암 가는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를 이야기했다.
지리산 유람 필수 코스
불일암은 진감국사 혜소가 도를 닦았고 최치원이 청학을 타고 오가던 곳이었다. 조선시대 지리산을 유람하던 선비들에게도 꼭 들러야 했던 필수 코스였다. 김종직, 김일손, 정여창, 한유한, 남효온, 유몽인, 허목 등 조선시대의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26세 때인 1489년(성종 20) 4월에 불일암을 찾은 김일손은 <두류기행록>에서 불일폭포를 지극히 아름다운 절경이라 했다. 그는 16일 동안 등구사에서 불일암까지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가는 곳마다 기뻐하고 놀랄 만한 경치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불일암 한 곳 뿐이라고 했다.
1810년 4월에 불일암을 찾은 정석구는 <불일암유산기>에서 “(불일암은) 깊숙한 골짜기와 울창한 숲은 쌍계사만 못하고, 맑고 깨끗한 시내와 암석, 크고 화려한 도량은 신흥사보다 못하고, 편안한 형세와 안온한 언덕은 칠불암보다 못했다. 그러나 우뚝한 듯 편안하고, 좁은 듯 널찍하며, 작은 듯 크고, 완만한 듯 높아, 비할 데 없이 빼어나고 기묘하여 잡념이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는 앞의 세 곳이 불일암만 못하다.”고 했다. 1935년 8월에 불일암을 찾은 하겸진은 <유두류록>에서 ‘이 (지리산) 계곡과 골짜기에서 가장 기이한 곳으로는 불일암에서 마무리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고 불일암을 추켜세웠다.
그러나 다른 견해도 있다. 1708년 두 달여 동안 영남을 유람한 김창흡은 <영남일기>에서 ‘(불일)폭포의 전체를 다 거론해도 일컬을 만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명승으로 이름나 유명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며 '최치원 이래로 1천여 년 동안 식견을 지닌 이가 없음‘을 한탄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들 선비들의 명산 유람 기록인 지리산 유산기에 불일암과 불일폭포에 대한 묘사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곳을 이야기한 조선시대의 유산기는 수없이 많으나 하나같이 엇비슷한 내용으로 대략 이러하다. 불일암 가는 길의 험함과 허공에 위태하게 매달린 암자의 아득함, 불일폭포의 웅장함, 주위 산세의 기이함을 묘사하고 있다. 청학봉(향로봉)과 백학봉(비로봉)이 좌우에 있고 기이한 봉우리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학담(鶴潭)과 용추(龍湫)의 두 못과 ‘불일폭포를 완상하며 노니는 바위’라는 완폭대(翫瀑臺) 바위 글씨, 옛날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청학동인 신선의 세계로 이 일대를 묘사하고 있다. 지리산을 유람한 이들은 불일폭포를 일러 개성 송악산의 박연폭포와 자웅을 겨룰 만하다고도 했으나 골짜기의 기이하고 웅장함, 폭포수의 웅장함은 박연폭포보다 더 낫다고 했다.
깊은 벼랑을 돌자 폭포 소리가 세차다. 아마 두꺼운 빙벽 아래를 흐르는 소리일 것이다. 산모롱이를 돌면 폭포가 있겠지만 잠시 쏟아지는 햇볕에 걸음을 멈췄다. 햇살이 비추는 곳에 작은 암자가 있다. 오른편에 서 있는 장대한 전나무 한 그루 옆으로 철옹성같이 돌담을 둘러 지붕이라야 겨우 그 끝만 내밀 뿐이다.
평상에 앉는다. 나무 사이로 햇빛이 살을 뻗어 비춘다. 빛은 하늘로 이어진다. 빛의 순수함을 따라가면 자기의 본래면목에 이를 것인가. 티베트 <사자의 서(바르도 퇴돌)>에서 죽음에 이르면 강렬한 빛이 보인다고 했던가. 너무 밝아서 똑바로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지혜의 빛을 따라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그 자체가 원래 자신의 본래면목임을 깨닫게 되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을 것이라 했다.
법당 뒤에는 폭포 위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있다. 작은 텃밭. 한겨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바람도 자고 햇볕이 따스하다. 눈이 쌓여 계곡을 건널 수가 없어서 저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수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아득한 산봉우리와 그 너머의 푸른 허공만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옛날 이곳을 지나던 이가 바위에서 봤다는 글씨는 눈 속에 파묻혔는지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청학이 날아오를 만큼 신비로운 기운이 가득했다. 산속의 적막함 속에서 참다운 말을 깨닫는 것, 오직 물외를 노닐어본 사람만이 그 뜻을 알리라.
깊은 절간에 붉은 꽃비 내리고
우거진 대숲에 푸른 연기 피어 오른다
흰 구름은 산마루에 엉키어 자고
푸른 학은 스님을 짝하여 조는구나
- 서산대사 휴정의 <불일암> 《청허당집》
불일암 일대의 명소
불일암은 옛 문헌 대부분에서 쌍계사 위쪽 10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 지금은 2.5km 정도로 1시간 남짓이면 이를 수 있다. 불일암은 진감국사가 창건하고 고려 희종 때 보조국사 지눌이 수도하던 암자로 전해진다. 암자와 폭포에 붙은 ‘불일’이라는 이름은 보조국사 지눌의 시호로 알려져 있다. 보조국사 지눌이 이곳을 언제 다녀갔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삼정산 상무주암에서 40세 때인 1198년부터 1200년까지 3년을 머물렀던 보조국사는 수선사(지금의 송광사)에서 결사를 하게 된다. 삼정산에 머문 3년 동안 이곳을 들렀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으나 기록은 없다. 암자의 이름을 흔히 불교에서 부처를 가리키는 ‘불일(佛日)’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겸재 정선(1676~1759)이 그린 불일폭포 그림에는 <佛一庵 瀑布>로 나온다. 불일암은 수차례에 걸쳐 중건됐다. 1983년에도 소실되었다가 2008년에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불일암 가는 길에는 예전 청학동으로 불리던 불일평전, 최치원이 학을 불렀다는 환학대, 마족대 등이 있다. 불일폭포는 지리10경 중의 하나로 남한에서 설악산 대승폭포 다음으로 높은 60m의 거폭이다.
쌍계사에서 국사암 가는 길은 짧지만 아름답다. 숨 막힐 듯 아름다운 길은 아니지만 무심코 마음 한 자락 툭 내려놓을 수 있는 안심의 길이다.
바스라진 낙엽, 바람에 흔들리는 대숲, 오랜 돌무더기 서낭당, 장하게 뻗은 소나무들, 오솔길은 보일 듯 말 듯 숨긴 듯 드러난 듯 구불구불 암자까지 이어진다.
암자 산문 앞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진감선사 혜소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에서 싹이 나 자랐다는 느티나무다.
가지가 동서남북 네 갈래로 뻗어 있어 큰 절의 사천왕처럼 불법을 수호하여 사천왕수(四天王樹)라고 불린다. 나무 둘레를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았다.
국사암에는 ㄷ자 형 인법당(큰 법당이 없는 절에서 승려가 거처하는 방에 불상을 모신 집)이 인상적이다.
인법당은 ㄷ 자 구조로 되어 있는데, 한 건물에 무려 다섯 개의 현판이 달려 있다. 국사암(國師庵)·명부전(冥府殿)·칠성각(七星閣)·옹호문(擁護門)·염화실(拈花室) 등이다. 한 건물에 여러 전각의 현판들이 있는 걸로 보아 예전 규모가 있었을 때에는 각기 독립된 건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법당 옆을 돌아 산신각으로 향하던 중, 펑펑 솟는 샘물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한겨울임에도 얼지 않은 샘도 신기했지만 바가지에 물을 담는 순간 돌확 모서리의 무언가에 눈길이 절로 쏠렸다.
귤과 과자 들이 그릇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게 아닌가. 그릇째 내놓은 걸로 봐선 누구라도 부담 없이 먹고 가라는 것이다.
이곳을 오가는 길손들, 특히 산을 막 내려온 등산객들의 허기를 달래기에는 이만한 보시가 없겠다. 육바라밀(대승불교에서 보살이 열반으로 이르기 위한 수행법으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 등 여섯 가지 수행 덕목) 중 제일 앞에 보시를 두었으니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절로 깨닫게 한다.
적묵당 옆 여여문. 마음이 곧 적(寂)이고, 설한 바 없이 설하고 듣는 바 없이 듣는 것이니, 무설이니 설선이니 적묵 따위가 무엇이랴. 있는 그대로의 마음, 그냥 그대로의 마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대웅전 옆 와편담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비질을 하던 행자승이 먼저 말을 건넨다. 지난해 8월 쌍계사에 왔다는 행자승은 오늘 처음 담장을 눈여겨봤다고 수줍게 고백했다. 행자승은 무엇을 비질할 것인가.
▶ 쌍계사 금당 오르는 길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일렬로 정연하게 들어선 건물들. 이곳에서 해강 김규진과 선조의 일곱 번째 왕자인 의창군 광의 글씨를 본다. ‘삼신산 쌍계사’라고 적힌 일주문 현판과 대웅전 현판이 각기 그들의 글씨다. 금당 앞에는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과 ‘세계일화조종육엽世界一花祖宗六葉’ 현판이 걸려 있다. 쌍계사의 만허 스님으로부터 손수 만든 차를 선물 받고 그 답례로 추사 김정희가 이 글씨를 써 주었다고 한다.
쌍계사 금당을 오른다. 금당은 산사에서 비켜선 외딴 공간이다. 범종루 옆 계곡을 건너 높다란 층계를 오르면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적힌 작은 산문이 나타난다. 그 푯말 너머 깊숙한 곳에 금당은 자리하고 있다. 관광객들도 찾지 않는 이곳은 안거 중인 스님들만 고요를 넘나들 뿐이다.
산문을 여니 육중한 청학루가 앞을 가로막는다. 한 층을 오르면 제법 너른 마당 끝으로 좌우에 봉래당, 영주당을 품고 있는 팔상전이 다소곳하다. 다시 가파른 층계를 올라서니 맑고 훤한 금당이 선연하고 선방인 동방장과 서방장이 좌우로 뻗어 있다. 이 금당에 육조 혜능의 정상(頂相, 머리뼈)이 묻혀 있다.
▶ 금당의 탑에는 육조 혜능의 머리뼈가 묻혀 있다고 한다.
육조 혜능의 두개골이 어찌하여 이곳에 있을까. 육조 혜능은 또 누구인가. 옛날 붓다가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자 아무도 그 뜻을 알 수 없어 수런거렸는데 다만 가섭만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염화미소의 이심전심이었다. 미소로 붓다의 법을 이은 가섭은 선의 시조가 됐고 28조였던 달마가 인도의 마지막 조사였다. 달마는 6세기 초에 중국에 와서 중국 선종 1조가 됐다. 중국 선종은 달마를 초조로 해서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을 거쳐 6조 혜능에 이른다.
▶ 국사암 가는 오솔길
붓다가 가섭에게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으로 전한 것처럼 달마도 9년 동안의 벽관을 통해 번뇌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음을 장벽과 같이하여 문자나 교리에 이끌리지 않았다. 이가 곧 ‘선은 문자에 있지 않아서(불립문자, 不立文字), 교설을 떠나 따로 전하니(교외별전, 敎外別傳), 인간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직지인심, 直指人心) 그 성품을 보고 깨달음을 이룬다(견성성불, 見性成佛)’이다. 선은 문자를 떠나 한 송이 꽃과 한 번의 미소에서 비롯된 것이다.
▶ 국사암 가는 오솔길
육조 혜능
중국 선의 육조이자 남종선의 시조인 혜능의 정상을 이곳에 모신 이는 신라의 삼법 스님과 대비 스님이었다. 의상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삼법, 대비 두 스님은 한겨울 눈 속에서 칡꽃이 핀다는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를 찾아 나선다. 현재 <쌍계사기>는 전하지 않으나 일본의 누카리야 가이텐(忽滑谷快天)이 쓴 <조선선교사>에는 삼법 스님이 육조 혜능의 정상을 쌍계사에 봉안한 내력을 상세하게 적고 있다.
▶ 국사암 가는 오솔길
“<지리산 쌍계사기>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삼법이 중국 육조 혜능의 도가 훌륭함을 듣고 그에게 배우기를 원했으나 713년 혜능이 입적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를 애통히 여기던 중 육조의 어록인 <육조단경>을 읽고 발심하여 김유신의 부인인 법정니에게 이십천금(二十千金)을 빌려 당나라에 들어가 홍주의 개원사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대비 스님을 만나 이 절에 사는 장정만에세 이십천금을 주고 육조의 정상을 구해 723년에 법정니가 있던 경주의 영묘사로 왔다. 어느 날 꿈에 한 스님(육조 혜능)이 나타나 강주(지금의 진주, 화개는 당시 강주에 속했다)의 지리산 아래 눈 속 칡꽃이 만발한 곳에 신라 만대의 복전(福田)이 있다고 게송으로 일렀다. 이에 삼법 스님은 대비 스님과 함께 지리산을 샅샅이 뒤져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을 찾아 육조의 정상을 깊이 봉안하고 한 채의 절을 그 위에 세웠다.”
▶ 국사암 가는 오솔길
금당 문을 살짝 열었다. ‘찌이익~’ 문소리가 허공을 날카롭게 가른다. 놀랍게도 법당 안에는 불상 대신 칠층석탑이 있었다. 절 마당에 있어야 마땅한 석탑이 법당 안에 들어서 있다니…. 저 탑 아래 혜능의 정상이 묻혀 있다고 하니 더욱 놀랍고 놀라운 일이다.
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는 금당 앞을 거닐다 스님들만 다닌다는 포행 길로 빠졌다. 동백이 숲을 이루어 낮인데도 한밤중인양 어둑어둑하다.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붉은 꽃 한 송이도 피지 않은 걸로 보아 봄은 여태 산 아래서 머뭇거리고 있을 것이다.
▶ 국사암 가는 오솔길
사천왕수
국사암 가는 길은 짧지만 아름답다. 숨 막힐 듯 아름다운 길은 아니지만 무심코 마음 한 자락 툭 내려놓을 수 있는 안심의 길이다. 바스라진 낙엽, 바람에 흔들리는 대숲, 오랜 돌무더기 서낭당, 장하게 뻗은 소나무들, 오솔길은 보일 듯 말 듯 숨긴 듯 드러난 듯 구불구불 암자까지 이어진다.
▶ 사천왕수
암자 산문 앞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진감선사 혜소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에서 싹이 나 자랐다는 느티나무다. 가지가 동서남북 네 갈래로 뻗어 있어 큰 절의 사천왕처럼 불법을 수호하여 사천왕수(四天王樹)라고 불린다. 나무 둘레를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았다.
▶ 사천왕수(가을)
불교에서 나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돌아가신 붓다. 그 길에서 가장 중요한 때에 늘 나무가 등장했다. 붓다가 탄생할 때에 등장한 무우수, 농경제에 갔을 때의 염부수, 깨달음에 이를 때의 보리수, 열반의 나무 사라수 등 네 가지 나무가 그것이다. 붓다의 생애는 길 위에서 이루어졌지만 큰 변화는 나무 밑에서 이루어졌다.
▶ 사천왕수
이 중 염부수는 붓다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나무이다. 붓다가 태자였을 때였다. 가래로 파헤친 흙속에서 벌레가 꿈틀거리자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그 벌레를 쪼아 먹었다. 이를 본 태자는 산 것끼리 서로 잡아먹지 않고서는 살아 갈 수 없는 현실의 참혹함이 고통스러웠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태자는 숲에 들어가 나무 아래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이때 태자가 앉은 나무에는 그늘이 움직이지 않고 태자의 몸 위에 언제까지고 서늘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고 한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도 유명하다. 보리수는 원래 아슈밧타 또는 핍발라라고 불리던 나무의 일종인데, 붓다가 그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인연으로 보리수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보나무라고도 한다.
나무 아래서의 명상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오는 인도 종교 수행의 전통 가운데 하나였다. 인도에서는 신성한 나무를 숭배했고, 특히 선정을 닦는 사람들이 그 나무를 배경으로 하는 예가 많았다. 나무 아래서 명상을 한다는 것은 비와 이슬을 막고 뜨거운 햇빛을 가리어 배후가 안정될 뿐 아니라 나무에 신이 깃들어 수행자의 몸을 지켜준다는 종교적인 의미도 있다.
▶ 다섯 개의 현판이 있는 국사암
보시
탑봉을 올랐다. 이곳 고대에는 승탑이 하나 있다. 진감선사 혜소의 승탑으로 보기도 한다. 불일폭포를 내려오다 국사암 갈림길에 거의 다 이르렀을 때 산모롱이 길가에서 곧장 위로 치닫는 비탈길을 오르면 너른 터가 나타난다. 장한 소나무들로 둘러싸인 승탑의 숲은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어 깊은 묵상에 빠져들게 한다. 승탑을 지나 인적 없는 오솔길을 한참이나 따라갔다. 예부터 이곳은 화개 10경 중의 하나로 ‘따로 마련된 선경’이라 했다.
▶ 고대의 승탑
나뭇가지 사이로 암자와 화개동 일대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그 옛날 진감선사가 나무오리를 날려 절터를 정한 곳도 아마 이곳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진감선사는 화개에 왔을 때 나무오리를 만들어 날려 세 곳의 절터를 잡았다. 첫 번째가 지금의 목압사 터이고, 두 번째가 국사암, 세 번째가 쌍계사 금당자리였다.
법당 옆을 돌아 산신각으로 향하던 중, 펑펑 솟는 샘물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한겨울임에도 얼지 않은 샘도 신기했지만 바가지에 물을 담는 순간 돌확 모서리의 무언가에 눈길이 절로 쏠렸다. 귤과 과자 들이 그릇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게 아닌가. 그릇째 내놓은 걸로 봐선 누구라도 부담 없이 먹고 가라는 것이다.
이곳을 오가는 길손들, 특히 산을 막 내려온 등산객들의 허기를 달래기에는 이만한 보시가 없겠다. 육바라밀(대승불교에서 보살이 열반으로 이르기 위한 수행법으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 등 여섯 가지 수행 덕목) 중 제일 앞에 보시를 두었으니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절로 깨닫게 한다.
지리산의 별천지, 국사암
진감선사 혜소(774~850)는 통일신라시대의 선승이다. 804년에 당나라에 유학해서 27년 만인 830년에 귀국하여 쌍계사(옥천사)를 중창하고 남종선과 불교음악인 범패와 차 문화를 널리 전했다. 국사암도 진감선사가 중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암자의 이름은 보월암이었다. 진감선사 혜소가 여러 차례 왕의 부름에도 나아가지 않자 민애왕이 진감국사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그가 머물던 암자를 ‘국사암(國師庵)’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몇 년을 이곳에 주석하자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들이 벼와 삼처럼 줄을 지어 찾아와 송곳 꽂을 자리도 없자 남쪽에 새로운 절을 짓고 옥천사라 했다. 이후 경남 고성에 옥천사가 있다 하여 쌍계사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된다. 쌍계사 경내에는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가 있다. 이 비는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국사암에는 ㄷ자 형 인법당(큰 법당이 없는 절에서 승려가 거처하는 방에 불상을 모신 집)이 인상적이다. 인법당은 ㄷ 자 구조로 되어 있는데, 한 건물에 무려 다섯 개의 현판이 달려 있다. 국사암(國師庵)·명부전(冥府殿)·칠성각(七星閣)·옹호문(擁護門)·염화실(拈花室) 등이다. 한 건물에 여러 전각의 현판들이 있는 걸로 보아 예전 규모가 있었을 때에는 각기 독립된 건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예전 지리산은 사찰과 암자가 빽빽이 들어선 불국토였다. 그중 화개 일대에 가장 많은 절과 암자가 있었다. 1472년에 지리산을 찾은 김종직은 지리산에 4백여 개의 절이 있다고 했을 정도였고, 임진왜란 전에는 화개 일대에 절과 암자가 100여 개 넘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632년 <진양지>의 기록에만 해도 50여 개가 있었으나 지금은 쌍계사와 국사암, 불일암, 칠불암, 원통암, 도원암만 남아 있다.
1714년 송암산인의 <지리산 국사암기>에는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치는 국사암, 다소곳이 들어 앉아 별천지’라고 했다. 1879년 국사암에 이른 송병선은 <두류산기>에서 ‘비고도 밝게 빛나고, 깊고도 먼 정취가 인간세상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화엄사는 완연한 봄빛이었다. 섬진강을 따라 매화가 하얗게 피어나기 시작했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온 봄은 지리산으로 스멀스멀 스며들고 있었다. 구례에서 방향을 돌려 섬진강을 뒤로하고 지리산 기슭으로 접어들었다.
화엄사는 늘 행락객으로 붐비는 큰절이지만 오늘은 아예 장바닥같이 그야말로 야단법석이다. 색색의 조끼를 입은 아주머니들이 분주히 절 마당을 오간다. 대웅전 앞은 뱀이 똬리를 튼 듯 겹겹 줄을 선 신자들로 가득 찼다. 대개가 아주머니들이다. 붉은 일산 아래 앉은 스님이 선창을 하자 충실한 신자들은 유치원생 마냥 일제히 복창한다. 그들은 108산사 순례단이라고 했다.
사바세계에 어째 주인이 따로 있겠소
큰절에서 약간 떨어진 암자 구층암에도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번잡함을 피해 해우소 옆 대숲으로 빠져나가니 인적 소리가 갑자기 뚝 끊어졌다. 어두컴컴한 대숲 너머로 마치 딴 세상처럼 평온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층층 잘 가꾸어진 화단 위로 단아한 건물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 칸짜리 암자는 쪽마루를 둘러 누구나 편히 앉을 수 있게 했다. 방문은 활짝 열린 채였고 고무신 한 켤레가 댓돌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헛기침을 하고 스님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하는 수 없이 주인 없는 암자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쪽마루에 걸터앉아 암자를 둘러싼 푸근한 산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바람이 부드럽게 뺨을 스친다. 숲에선 새소리가 들린다. 마당에는 봄빛이 가득하다. 따사롭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한 봄 햇살. 까치 두 마리가 마당 한편에 놓인 돌확에 고인 물을 한가로이 마시고 있다. 조심스레 다가서자 후루룩 날아가 버리더니 어느새 나뭇가지에 앉는다. 새가 앉은 곳은 동백나무, 그러고 보니 암자를 둘러싼 뒷산이 모두 동백 숲이다.
까치의 걸음을 좇아 숲으로 들어간다. 봉천암이다. 이곳 역시 스님이 없다. 다시 동백 숲으로 들어간다. 아직 꽃을 피우지 않은 걸로 보아 동백이 아니라 춘백이다. 몇몇은 서둘러 꽃을 피웠지만 숲은 여전히 순수의 상록이다. 숲 가운데에 있는 산신당을 지나 계곡 물소리를 왼쪽 귀로 들으며 다시 길상암으로 돌아왔다.
볼펜과 노트를 꺼냈다. 암자의 넘치는 봄볕을 적고 싶었다. 겨우 한 줄이나 적었을까. 행간의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도둑질이나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아이고 스님, 허락도 없이 이렇게 쉬고 있습니다.”
“거 무슨 말이오. 사바세계에 어째 주인이 따로 있겠소?”
“볕이 하도 좋아서 미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나 또한 금생에 이곳을 잠시 빌려 쓰고 있을 뿐이오. 우리 모두 이생에 잠시 머무는 것뿐인데, 어찌 주인과 객이 따로 있겠소.”
“예, 그렇긴 합니다만….”
“어디서 오셨소?”
스님, 저 매화는 언제쯤 핍니까
“스님, 저 매화는 언제쯤 핍니까?”
“글쎄요. 요즘은 어디 종잡을 수가 있어야지요.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는 법이고, 꽃이 피는 데도 순서가 있는데, 요즘은 한꺼번에 피니 사이사이의 묘가 없다 말이요. 개나리, 목련, 산수유, 매화, 심지어 벚꽃까지도 일제히 꽃을 피우니 우리에게 얼마나 죄업이 많다 말이오. 한 사람이 소비하는 에너지양이 너무 많으니 자연도 버텨내지 못하고 저렇게 돼 버린 게 아니겠소. 지구의 절반에는 음식이 남아돌고 절반은 굶주리고 있으니….”
마당 끝에 서서 아래 연못가에 있는 매화나무를 바라보며 이야기는 계속됐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화엄사 매화이다. 들매화로도 불리는 이 매화는 각황전 옆의 홍매화보다 유명세는 덜하지만 은은한 맛이 일품이다. 응달에 있어 아직 꽃망울조차 맺지 않았지만 붉은 기운이 점점 퍼지고 있었다. 양지 쪽 화단에는 금방이라도 꽃을 피울 듯 한껏 꽃망울이 부풀어 오른 매화 한 그루가 더 있었다. 10년 전에 스님이 10년생을 가져와 심은 매화란다. 나이가 20년이나 된 셈이다. ‘꽃을 보고 색이 공함을 깨닫고 새소리를 듣고 듣는 성품을 밝힌다(看花悟色空 聽鳥明聞性)’고 했던가.
매화에서 허공으로 시선이 가자 스님이 마루에 앉기를 권했다.
“멍하니 있어나 봐라, 는 말이 있죠. 너무나 정신없이 바쁜 세상이지요. 일대사인연이라고….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 일대사인연이라는 거요. 나는 누구인가. 근원과 본질에 대한 통찰이 바로 선이 아니겠소. 티끌에서 우주를 보는 화엄의 세상 말이오. 이 뭣꼬 한마디만 깨달아도 최종 목적지에 이르는 것이지요.…”
제2의 싯다르타이자 불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사상가로 불리는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어떤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존재도 공空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했다. <화엄경>의 세계관은 ‘해인 삼매’이고, 인생관은 ‘화엄 삼매’이다. 꽃으로 꾸민다는 뜻의 화엄. 꽃이 반드시 열매를 맺듯이 보살의 행위 또한 깨달음에 이른다는 뜻이다. 오로지 진리에 마음을 두어 주관과 객관, 상대의 관계를 초월하는 일이 곧 화엄 삼매이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행하여 비로자나불의 세계인 진리에 이를 것인가, 비로자나불의 진리의 세계를 사회적으로 실천해 가는 일이 곧 화엄 삼매인 것이다.
언제 차 한 잔 하시지요
봄에 달뜬 계곡 물소리가 쉼 없다. 아래 큰절에서 올라온 거사가 노고단에서 채취했다는 고로쇠를 가져오는 바람에 잠시 스님의 이야기는 끊겼다. 그러나 이내 스님은 거사를 내려 보냈고 쪽마루에서의 한담은 계속됐다.
“결국 평상심이 도인 게지요. 걷고, 잠자고, 밥 먹고 이 모든 것이 도 아니겠소. 상대로 구분 짓지 않는 중도에 이르는 것, 결국 그 중도마저 떠나는 것이 해탈이 아니겠소.”
멀리 물소리가 바람소리를 안고 돈다. 바람이 얼굴을 어루만지자 스님의 말소리가 귓속 가득히 울려온다.
“지리산은 영산이지요. 이곳에 서 보니 저 산자락과 기운이 상서롭게 보이더라 말이죠. 그래서 길상암이라고 이름 붙였지요. 경치가 으뜸인 금강산은 젊었을 때에, 묘향산은 중년에, 지리산은 말년에 생활하기 좋은 곳이라고들 합디다.”
실제 많은 고승들이 젊은 시절에는 금강산에서, 말년에는 지리산에서 수도했다. 지리산에서 도를 깨친 서산대사는 금강산에서 보림(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법)하고 묘향산에서 입적했다. 금강산은 수려하기는 하지만 넉넉하지 못하고(수이부장, 秀而不壯), 지리산은 넉넉하기는 하지만 수려하지는 못한데(장이불수, 壯而不秀) 묘향산은 수려하기도 하고 넉넉하기도 해서(역수역장, 亦秀亦壯) 가장 머물 만하다고 했다. 지리산은 부휴 선수, 벽송 지엄, 소요 태능 등 기라성 같은 선승들이 수도를 하고 입적을 한 곳이다. 경주 남산이 신라 왕경의 불국토였다면 지방호족과 민초들의 불국토는 바로 지리산이었다.
어느덧 볕이 엷어지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루에서 일어섰다. 저녁 공양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벌써 두어 시각을 훌쩍 넘겼다. 아까 큰절에서 올라온 거사가 두고 간 노고단 고로쇠를 스님이 한 사발 따라준다. 겨울을 이겨낸 수액의 깊은 맛이 입안에 오래 남는다.
“차 한 잔 대접 못해서 미안합니다. 암자 수리가 끝나면 언제 차 한 잔 하시지요.”
연못가 매화나무 아래서 작별을 했다. 스님은 휘적휘적 계곡으로 난 대숲으로 사라졌다. 매화는 비록 보지 못했지만 마음속엔 이미 봄꽃이 활짝 피었다. 올봄에는 아마 꽃을 찾을 일이 없을 듯싶다. 가지마다 햇살이 눈부시다. 모아둘 곳 없는 봄 햇살이 세상의 모든 가지에 눈부시게 흩어진 모양이다. 암자 뒤 차밭을 올랐다.
“세속과 청산은 어느 것이 옳으냐 봄볕 비추는 곳에 꽃피지 않는 곳이 없구나((世與靑山何者是 春光無處不開花)” - 경허 선사의 오도송 중에서
길상암과 구례 화엄사 매화
옛 문헌에 화엄사(전남 구례)에 81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구층암, 연기암, 금정암 등 십여 곳만 남아 있다. 길상암은 일제강점기 대처승이 살던 곳으로 20년 전 지금의 명곤 스님이 그 자리에 암자를 지었다. 대개 옛 터에 암자를 세운 화엄사 부속암자의 창건과는 다르다.
구례 화엄사 매화는 길상암 앞 대숲 급경사지에 자라는 나무이다. 원래 4그루가 있었으나 3그루는 죽고 한그루만 남았다고 한다. 이 매화는 사람이나 동물이 매실을 먹고 버린 씨앗이 싹 터서 자란 것으로 짐작되어 일명 ‘들매화(野梅)’로 알려져 있다. 이런 들매화는 접붙임으로 번식시키는 개량종 매화보다 꽃이 듬성듬성 피고 작으나, 수형이 아름답고 꽃향기가 오히려 더 강한 특징이 있어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수령은 450년으로 추정되며 2007년 10월 8일 천연기념물 제485호로 지정됐다.
지리산의 대찰 화엄사는 늘 붐빈다. 사람들은 먼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목조건물인 각황전에 경탄하고, 별스런 사사자삼층석탑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자신의 키를 훌쩍 넘은 엄청난 크기의 석등에 감탄을 쏟아낸다. 조금 관심 있는 이라면 각황전 활주와 처마가 만들어낸 곡선에 탄성을 지르고, 대웅전 벽면의 희귀한 가새표를 보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각황전 옆 홍매화는 또 어떤가. 봄이면 붉다 못해 검은 홍매화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짙은 동백 숲 붉은 송이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 구층암 대숲 오솔길
화엄사의 풍경이 이토록 장엄해서일까. 지금이야 무슨 세트장 같은 경내가 생경스럽지만 그래도 대찰의 위용은 여전하여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화엄세계가 바로 이곳에서 펼쳐지니 저마다 작은 우주를 가진 꽃들의 축제가 벌어지는 곳이 바로 화엄사이다.
▲ 구층암
이토록 번잡한 화엄사도 몇 발자국 벗어나면 고요함이 충만한 정토요, 신선의 땅이다. 바로 암자로 가는 길이 있어서다. 화엄사 뒤에는 구층암, 길상암, 봉천암 등이 있고, 멀리 구불구불 산 깊은 곳에 연기암을 비롯해 십여 개의 암자가 듬성듬성 피어난 봄꽃처럼 숲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중 구층암은 대웅전 뒤를 돌아가면 곧장 대숲이 길을 이끄는 곳에 있다. 예전에는 계곡가로 바짝 붙은 절집 담장을 따라가다 계곡의 징검다리를 건너면 어둑어둑한 대숲이 있었다. 대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고개 숙여 지그재그로 오르다 보면 어둡던 미로가 갑자가 환해지며 고즈넉한 암자가 모습을 드러내곤 했었다. 지금이야 방문객의 편리를 좇아 암자로 가는 길이 대책 없이 넓어져서 긴장미와 기대감이 없어져 걷는 재미마저 없어졌지만 말이다.
어쨌든 암자마당에 들어서면 이끼 낀 불완전한 석탑이 고졸한 멋을 자아낸다. 석탑의 배경이 되는 승방은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어 오래된 연륜을 보여준다. 원래 구층이었을 지도 모를 이 석탑을 보며 암자의 이름을 연상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볕이 잘 드는 암자에 우뚝 솟은 구층의 석탑은 그 자체로 밝은 화엄의 세상이었을 것이다. 석탑과 건물이 빚어내는 묘한 앙상블. 사실 불교에서 ‘구(九’)는 그 형상의 낱낱을 세는 수가 아니라 완성이자 출발, 영원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영원을 어떻게 셈할 수 있을까. 영원의 관념은 이미 탑의 형상을 넘어서는 상상이다.
▲ 천불전
천불전의 토끼와 거북이
건물의 상방에는 사자가 조각되어 있다. 건물을 돌아 안마당으로 들어서서 천불전에 이르면 토끼를 엎고 있는 거북과 마주치게 된다. 거북과 토끼는 천불전 처마 아래 양 옆에 한 쌍씩 있고 기둥 사이에는 용머리가 있다. 이는 천불전이 불국정토로 가는 반야용선이자 반야귀선임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
▲ 천불전의 토끼와 거북이
불교에서 토끼와 거북이는 상징하는 바가 크다. 토끼와 거북은 흔히 그림이나 조각으로 법당의 문이나 평방, 벽면 등에 장식되어 있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사실 인도에 뿌리를 둔 붓다의 전생을 다룬 ‘본생담(本生譚, 자타카)’이라는 불전설화다. 다만 인도설화에서는 원숭이와 악어가 등장하고, 물에 사는 악어 아내가 원숭이의 간을 먹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다. 이 인도설화가 중국에 들어와서는 원숭이와 자라, 혹은 원숭이와 용으로 변했다가 다시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토끼와 거북이로 바뀌었다.
<삼국사기> ‘권 제41 열전 제1 김유신 상(上’)을 보면 토끼와 거북의 이야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귀토지설(龜兎之說)’이 있다. 선덕대왕 때 김춘추의 딸이 대량주(경남 합천)에서 백제군에게 희생당한 남편을 따라 죽자 김춘추는 그 원한을 갚고자 고구려에 군대를 청하러 갔다. 처음에는 김춘추를 융숭히 대접하던 고구려왕이 주위의 간언에 신라가 차지한 고구려의 옛 땅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자 김춘추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게 된다. 이에 고구려왕이 대노하여 김춘추를 가두고 죽이려 하자 위험에 빠진 김춘추는 왕이 총애하는 신하인 선도해에게 푸른 베 3백 보를 은밀히 선물한다. 선도해는 술자리를 빌어 거북과 토끼의 이야기를 했고 김춘추는 간을 두고 왔다며 거북이를 속인 토끼처럼 자신이 신라로 돌아가면 왕에게 청해 고구려의 옛 땅을 돌려주겠다며 기지를 발휘하여 무사히 고구려를 탈출하게 된다.
설화에서 토끼와 거북이가 향하는 곳은 용궁이다. 그러니 토끼와 거북이가 있는 건물은 바로 용궁, 바다 속 불국토인 셈이다. 그럼, 용궁은 어디에 있을까. 불교에서 파도가 잠든 깊은 바다, 흔들림 없는 심연의 세계를 곧 해인이라 한다. 번뇌가 사라진 마음의 바다. 이 해인삼매의 바다 속에 불국정토 용궁이 있다.
이때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정토 용궁으로 가는 배는 반야용선이다. 이곳 천불전에도 선수인 용머리가 있어 법당이 반야용선임을 상징한다. 이 반야용선처럼 토끼와 거북이가 타는 반야귀선도 불국토인 용궁으로 가는 인도자이자 탈 것의 상징이다. 그 이상향으로 가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토끼와 거북이로 표현된 것이다.
▲ 모과나무 기둥
승방의 모과나무 기둥
구층암에서 유심히 봐야 할 승방 건물이 있다. 건물의 생김새도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다. 모두 일곱 칸인 일자의 긴 건물은 좌우로 긴 마루를 두고 문을 내었다. 즉 석탑이 있는 바깥마당에도 문과 마루가 나 있고 천불전이 있는 안마당 쪽으로도 문과 마루가 있어 어디서든 출입이 자유롭다. 가운데 방을 두고 양쪽으로 문과 마루를 낸 특이한 건물인 것이다.
▲ 모과나무 기둥
그뿐만이 아니다. 이 승방에는 구층암을 대표하는 특이한 구조물이 있다. 모과나무 기둥이다. 직접 보고나면 그 기이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어떠한 인위적인 조작도 없이 살아 있던 모습 그대로의 나무를 기둥으로 삼고 그 위에 서까래와 지붕을 얹어 집을 지었다. 나무의 생김새대로 천연덕스러운 기둥을 삼은 것은 서산 개심사 종루나 안성 청룡사 대웅전 등 우리 옛 건축에서 종종 볼 수 있지만 기본적인 대패질조차 하지 않은 채, 최소한의 손질도 하지 않은 채 기둥으로 쓴 그 무심의 경지에 놀라지 않을 이 없을 것이다. 죽은 모과나무를 그대로 쓴 목수의 안목도 능청스럽지만 그를 허락한 스님의 안목도 얼마나 통 큰 것인가.
▲ 한 프랑스인이 그린 모과나무 기둥
모과나무를 건드리지 않고 생긴 모양 그대로 창방과 마루턱을 맞들고, 가지가 갈라진 데는 갈라진 대로, 골과 결이 파인 곳은 파인 대로 두었다. 모과나무 기둥이 짧은 맞은편 승방 기둥은 주춧돌 위에 깎은 기둥을 세워 그 위에 모과나무 기둥을 얹어 놓았다.
▲ 산 모과나무와 모과나무 기둥
대체 이 모과나무를 그대로 쓴 스님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문득 경허 선사의 일화가 떠오른다. 계룡산 동학사 법회에서 당대의 학승 진암 스님이 “나무는 비뚤어지지 않고 곧아야 쓸모가 있으며, 그릇도 찌그러지지 아니하고 반듯한 그릇이라야 쓸모가 있다.”고 설법을 하자 우연히 그 자리에 들른 경허 선사가 일갈을 했다. “비뚤어진 나무는 비뚤어진 대로 쓰고, 찌그러진 그릇은 찌그러진 대로 쓰면 된다.” 모든 것에 불성이 있으니 밖으로 드러난 것은 상에 불과하리라. 어찌 보면 형태에 집착하는 걸 단박에 깨버린 것이 이 구층암 모과나무 기둥인 듯싶다.
▲ 산 모과나무와 모과나무 기둥
지금도 천불전 오르는 화단에는 살아 있는 모과나무가 있다. 이 나무 또한 언젠가 법당의 기둥으로 쓰이려 자신의 몸뚱이를 소신공양할 것이다. 언젠가 기둥이 될 자신의 운명을 뻔히 알면서도 모과나무는 오늘도 묵묵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제 몸을 키운다. 살아서는 꽃과 열매를, 죽어서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기둥이 되니 세상에서의 쓸모란 이처럼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젠 꽃을 피우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는 자연의 생명은 모과나무 기둥에서 사라졌다. 대신 모과나무는 자신의 몸을 보시하여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었다. 여느 모과나무처럼 평범하게 조용히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스스로를 불태운 등신불처럼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기둥감으로 별 가치가 없는 모과나무를 재목으로 쓴 것은 어찌 보면 화엄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작이자 완성일 지도 모르겠다. 결국 구층암은 파격과 자연의 맛을 그대로 살린 암자인 셈이다.
▲ 다향사류
“거기 카메라 멘 처사님도 들어오시지요.”
스님이 부른다. 다향사류(茶香四流). 차향이 사방으로 흐른다. 승방에는 이미 차가 끓고 있다. 앞서 길상암의 명곤 스님이 암자 뒤 차밭에 가보라고 했었다. 이미 해가 떨어져 갈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다행히 차 맛을 볼 수 있는 걸 위안으로 삼는다.
▲ 다향사류
덕제 스님은 익숙한 듯 차를 내어준다. 차손님들이 빙 둘러 앉아 차 한 잔씩을 마신다. 꽤 특이한 차 주전자에 일제히 눈길이 쏠렸다. 어디서 구했는지, 얼마나 하는지 누군가 물었고 스님은 잠잠히 차에 대한 이야기를 할 뿐이다. 차가 떫은 것은 차나무를 반듯하게 키운다고 가지치기를 해서 스트레스를 받아서이고, 지금 마시는 차는 야생 그대로 키운 거라 떫은맛이 없을 것이고, 일단 차 맛은 목 넘김이 좋아야 하고, 침이 생기면 좋지 않고, 단맛이 나야 하며, 차는 뜨거울 때 마셔야 된다는 것이었다.
화엄사 각황전 뒤 언덕 석탑에는 차공양상이 있다. 이 일대에 오래된 차향이 있었음이다. 구층암의 차는 죽로야생차, 대나무 그늘 아래서 이슬을 맞고 자란다. 가물어도 걱정이 없는 이곳의 차는 어느 때고 고른 차 맛을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구층암
‘차나 한잔 마시게’, 끽다거(喫茶去)
중국의 유명한 선승 조주(778~897) 선사는 수행승들이 오면 언제나 “자네, 혹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처음이라 와 본 적이 없다고 답하면 “그래, 그럼 차나 한잔 마시게(喫茶去).”하고 이미 와 본 적이 있다고 해도 “그래, 그럼 차나 한잔 마시게(喫茶去).”라고 했다.
이를 본 절 살림을 맡고 있던 원주 스님이 처음 왔던 수행승이나, 이미 와 봤던 수행승에게도 차나 한잔 마시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냐고 따졌더니 조주 선사가 원주 스님을 불렀다. 원주스님이 “예.” 하고 대답을 하니 조주 선사는 “자네도 차나 한잔 마시게.”라고 했다.
차를 마시는 일이 다반사인 것처럼 선 또한 일상 속에 있다는 뜻일 것이다. 아니면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있다’ 혹은 ‘없다’고 답했으니 이미 ‘유(有)’와 ‘무(無)’에 떨어졌다 보고 정신차려라는 의미에서 ‘차나 한잔 마시게.’라고 했을 것이다. 이럴 때에는 침묵이 답이 아닐까. 그냥 마음으로 차를 마실 뿐이다. 그냥 무심히 마시는 차 한 잔이야말로 깨달음이 아닐까.
번다한 화엄사이지만 계곡 하나 건너면 인적이 끊긴다. 황량함마저 드는 산기슭에는 남악사가 외따로 떨어져 있다. 그 옛날 지리산이 오악의 남악으로 떠받들어질 때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다. 국가에서 주도를 했으니 당시 사람들에게 지리산이 가지는 의미는 얼마나 각별했을까.
이 깊숙하고 외진 곳에도 봄빛이 들었다. 한창 하얀 꽃을 피운 목련 한 그루가 남악사 지붕을 향해 길게 몸을 드리운다. 그 옆으로 비탈진 시멘트길이 어렴풋이 보인다. 대찰 화엄사에 견주어보면 너무나 초라해 보이는 진한 파랑색의 표지판. 건성으로 쓴 듯한 ‘지장암’ 글씨가 무심하다.
암자에 숨은 천연기념물
암자 마당 끝에 선 제법 굵직한 나무에 꽃이 막 지고 있었다. 처음엔 그 나무가 올벗나무인 줄 알았다. 매화나무였다. 사실 이곳 지장암에 들른 것은 오랜 올벚나무 한 그루 때문이다. 방문객들은 대개 차에서 내려 곧장 화엄사로 들어간다. 제대로 된 안내문조차 없으니 이곳을 살뜰히 살피는 이들은 거의 없다. 단지 암자에 숨은 천연기념물인 올벚나무의 존재를 알음알음 아는 사람들만 천리 길을 마다않고 지장암을 찾을 뿐이다.
암자는 큰절 바로 옆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쇠락할 대로 쇠락했다. 언뜻 민가로 보이는 말쑥한 건물이 정면을 향하고 그 옆으로 후줄근하게 낡은 건물이 ㄱ자로 맞대어 있다. 그 뒤 조금 높은 곳에 삼 칸의 법당이 있다. 사실 법당이라고 적혀 있지 않았다면 세 건물 중 법당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야트막한 산줄기가 계곡 쪽으로 흘러내리며 암자를 감싸고 있다. 산줄기는 온통 붉은 동백이다. 그 옆으로 산줄기가 잠시 멈춘 맞춤한 곳에 올벚나무가 서 있다. 무성한 푸른 잎에 듬성듬성 붉음을 감추고 있는 동백에 비해, 올벚나무는 하얀 천으로 온몸을 두른 듯 화려한 자태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올벚나무를 보기 위해선 동백나무 사이의 좁은 암반을 에둘러가야 한다. 육중한 석문이 버티고 있는 사잇길을 오르면 올벚나무가 그 위에 기세등등하게 자리하고 있다. 올벚나무로 가는 길에는 어른 허리통만 한 동백나무가 시왕처럼 양편으로 도열해 있고, 길바닥에는 붉은 동백꽃이 하염없이 뿌려져 있다.
겨우 열 발자국 내딛을 정도의 짧은 길이지만 숨이 멈춘 듯 깊은 고요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 문을 통과하면 마치 극락의 세계라도 열릴 것 같다.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열 걸음을 걷고 나자 앞은 벼랑이다. 이번에는 몸을 홱 돌려 붉은 양탄자가 깔린 돌층계를 올라야 한다. 널따란 땅에 흙이 수북이 쌓인 곳, 올벚나무는 의연했다.
스님이 심은 군사용 올벚나무
어찌하여 이곳에 올벚나무가 있을까. 이곳뿐만 아니라 화엄사 계곡에는 유난히 올벚나무가 많다. 그 연유는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가 조선 인조와 효종 때의 일이다. 북벌을 꿈꾸던 왕은 많은 무기를 생산하고자 벚나무 심기를 장려했고, 그 뜻을 받들어 벽암 각성(1575~1660) 선사가 이곳 화엄사 근처에 많은 올벚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군사용 숲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벚나무는 목재가 단단하여 창, 칼자루, 마구(馬具) 등으로 사용되었고, 그 껍질을 벗겨 활을 만드는 등 무기의 재료로 중요한 나무였다. 이 올벚나무는 그 당시 심었던 것 중에서 살아남은 나무로 보고 있다. 원래 두 그루였는데, 약 80년 전에 절을 중수할 때 한 그루를 베어서 목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때 베어낸 나무로 적묵당의 안마루를 깔고도 남았다고 하니 얼마나 큰 나무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벽암 각성은 어떤 스님이기에 수행자의 신분으로 무기 제조의 원료인 올벚나무를 절 주위에 심었던 것일까. 스님의 행적을 보면 왜 이곳에 올벚나무가 심겨졌는지를 알 수 있다.
벽암 선사는 조선 중기의 선승으로 14세에 출가하여 당시 청허 휴정(1520~1604) 선사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던 부휴 선수(1543~1615) 선사에게서 사사했다. 벽암 선사는 나중에 부휴 선사의 제자 7백여 명 가운데 가장 번창한 문하를 이루었다.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전에 참여했다가 전쟁이 끝나자 다시 수행자의 모습으로 돌아가 지리산에서 수행했다. 1624년(인조 2)에 왕이 남한산성을 쌓게 했을 때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려들을 동원하여 3년 만에 완성했다. 임진왜란 때 불탄 지리산 화엄사를 복구한 것도 벽암 선사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자 승려 3000여 명을 모아 항마군을 조직하고 북상하는 도중에 왕이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진군을 중지하기도 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벽암 선사의 이러한 행적을 볼 때 화엄사 일대에 왜 군사용인 올벚나무가 많이 심겨졌는지 충분히 납득이 된다. 벽암 선사는 그 후 여러 사찰을 편력하다가 화엄사에서 입적했다.
피안앵 혹은 사홍목
이 올벚나무는 세상의 번뇌를 떠나 열반에 도달하는 나무라 하여 스님들 사이에선 ‘피안앵彼岸櫻’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혹은 벽암 선사가 불교의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뜻하여 심었다 하여 ‘사홍목(四弘木)’이라고도 한다. 무리지어 피는 벚꽃의 아름다움에만 익숙한 세상 사람들에게 단 한 그루의 나무가 뿜어내는 아취가 이토록 장엄할 수 있다는 걸 이 올벚나무는 보여주는 듯했다. 마치 저쪽 언덕에 서서 피안의 세계로 어서 오라고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손짓하는 인자한 부처님 같다.
가까이서 보니 나무는 땅에서 두 줄기로 크게 갈라져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땅속 깊숙이 제 몸을 박고 뭇 생명들과 고락을 함께하며 하늘을 향하고 있는 올벚나무를 보니 언뜻 지장보살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난 어머니와 가엾은 중생들을 위해 전 재산을 내어주고 그도 모자라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주고 정작 자신의 알몸을 땅속에 갈무리한 지장보살(地藏菩薩). 모든 중생이 구원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큰 서원처럼 올벚나무는 장대했다.
철수개화(鐵樹開花)라고 했던가. 문득 쇠처럼 검은 올벚나무에 핀 벚꽃이 신이하게 보였다. 이 나무가 혹 쇠나무가 아닐까. 쇠나무가 꽃을 피운 것은 아닐까. 분별심을 버리고 만법을 하나로 보고, 생사를 초월하는 무차별 평등의 절대적 경지에 이르면 쇠나무에서 꽃이 핀다고 했지 않은가.
고개를 들었다. 건너편 화엄사는 온통 꽃들의 축제이다. 장엄한 꽃들의 세계, 여기가 곧 화엄세상이다.
구례 화엄사 올벚나무
올벚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벚나무 중에서는 꽃이 가장 먼저 피어서 ‘올벚’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황해도 장산곶, 전북 완주 위봉산, 지리산, 전남 보길도, 제주도 등에 분포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구례 화엄사 올벚나무는 화엄사 지장암에 있다. 1962년 12월에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었다. 나무의 높이는 15m, 둘레는 5m 정도이다. 수령은 350여 년으로 추정된다. 나라 안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벚나무로 알려져 있다. 이 나무 주위에는 서어나무, 동백나무, 팽나무, 갈참나무, 수리딸기 등의 다양한 수종이 함께 자라고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발생하므로 저것이 발생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 <쿳다가 니카야>”
연기緣起.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우루벨라 마을 네란자라 강변의 보리수 아래에서 가부좌를 한 채, 7일 동안 삼매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렸다. 7일이 지난 후, 붓다는 삼매에서 깨어나 밤이 끝나갈 무렵 연기의 법을 발생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했다.
연기암 가는 길
지리산 연기암 가는 길. 온통 꽃밭이다. 꽃의 장엄, 화엄이다. 계곡 가에는 어김없이 진달래가 피어나고 바위틈에도 어김없이 진달래가 피어 있다. 올벚나무와 산벚나무는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라 아직은 회색의 산 빛 여기저기서 하얀 자국을 터뜨린다. 납작 엎드리면 땅에는 제비꽃 천지이다. 봄은 허공에 걸린 듯싶은가 하면, 어느새 땅바닥 나지막한 곳으로 스멀스멀 찾아들고 있었다. 낮고 낮아도 봄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높고 높아도 더 넘치는 곳도 없다.
막 꽃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한 산수유는 봄을 붙잡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연산홍은 붉은 발길로 암자마당 끝으로 진즉 봄 마중을 나왔다. 벚꽃과 개나리는 이미 봄의 가운데를 차지한 채 제 몸을 한껏 치장한다. 늘 변함없을 것 같던 푸른 소나무도 새 옷으로 갈아입을 채비를 남모르게 하고 있다. 오직 봄을 서러워하는 건 붉은 목덜미를 떨군 동백꽃뿐이다.
맑은 물줄기는 여울에 부딪히며 봄소식을 계곡 너머로 전했다. 숲에서 사각거리는 푸른 대나무 잎사귀는 이곳이 늘 청정한 곳임을 넌지시 말하는 듯하다. 계곡 물소리와 댓잎 소리는 이미 법음이요 법문이다.
연기암 가는 길로 들어섰다. 암자로 가는 길은 늘 마음 한자락을 남겨두고 떠나는 길이다. 작년에는 연기암까지 부러 에둘러가는 먼 길을 택했었다. 자동차로 쌩하고 달려 금방 이를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어떤 긴장도 설렘도 없을 것 같았다. 나 스스로 암자로 가는 길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길에는 애초 주인이 없다고 했다. 비록 표지판이 생기고 그 길을 아는 이가 있더라도 길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붓다 또한 옛길을 발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 길을 정비해서 사람들을 가게 했을 뿐 길 자체를 소유하지는 않았다.
세상의 이곳과 저곳을 잇는 길은 또한 내면의 이곳과 저곳을 잇는 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길을 걸으며 깨달음에 이르는 길도 자연 떠올리게 된다. 암자로 가는 길은 더욱 그러하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인 양하여 암자로 길을 가게 된다. 이 길은 세상과 등지는 길이 아니다. 세상과의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며 세상 밖에서 세상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세상을 똑바로 응시하여 세상을 바꾸는 길인 것이다. 길 위에 선다는 것은 바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과 다름없다. 사리불이 좌선하고 있을 때에 유마거사가 나타나서 말했다. “깨달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세속적인 일상생활을 보내는 것이 바로 좌선이다.”
지난해 여름, <지리산 오지암자 순례>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리산 주능선 산행을 했었다. 지리산을 오른 지 3일 만에 도착한 노고단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화엄사 계곡으로 내려섰다. 길고 긴 화엄사 계곡을 한참이나 내려가서야 만난 연기암은 산 아래에서 차로 곧장 찾아갔던 예전의 연기암과 분명 달랐다. 예의 그 편안함도, 그 한적함도 아니었다. 적요와 깊은 침묵에 쌓인 암자는 피안의 세계 그 자체였다. 어떤 길로 갔는가에 따라 예전의 장소가 전혀 다른 장소로 다가왔던 것이다.
연기암으로 가는 길은 크게 셋이다. 지리산 능선 종주를 해서 도착하든 아니면 성삼재에서 곧장 이르든, 노고단에서 긴 화엄사 계곡으로 내려서는 산길이 하나 있고, 화엄사에서 계곡 길을 따라 오르는 방법이 또 있다. 혹은 화엄사에서 숲으로 난 차도로 가는 길이 있다. 어느 길을 택하는가는 각자의 자유이겠지만 대개 비장한 각오가 아니라면 암자를 가기 위해 노고단에서 화엄사까지의 긴 산길을 선택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연기암을 순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화엄사에서 계곡을 따라 암자에 올랐다가 내려올 때는 숲길로 다시 화엄사로 돌아오는 길이다.
화엄사 입구에서 연기암까지의 계곡 길은 2km 정도이고, 숲길은 3.9km 정도이다. 계곡길이 중간 중간 폭포와 아름다운 계곡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 자연의 길이라면, 숲길은 청계암, 미타암, 보덕암, 내원암, 금정암, 지장암 등의 암자를 돌아볼 수 있는 순례의 길이다. 계곡의 법음과 암자의 법문을 들으며 걸을 수 있는 보석 같은 길들이다. 자연석을 쌓아 잘 정비된 계곡 길은 연기암을 거쳐 노고단까지 이어지고, 구불구불 한없이 깊은 숲길은 포장길도 있지만 이따금씩 나타나는 비포장 흙길로 인해 걷는 즐거움이 배가 되는 길이다. 물론 이따금 마주치는 차량이 그 한적함을 깨뜨리기는 하지만 여전히 매혹적인 길임에는 틀림없다.
멀리 굽이치는 섬진강, 피안의 땅
연기암이 자리한 곳은 해발 530고지. 지리산 암자치고는 그다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세상으로부터 한참이나 들어온 깊숙한 곳이다. 이곳에 서면 멀리 산자락 끝으로 구례 들판과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의 굽이치는 모습이 장관이다. 아득한 정토, 피안의 세계가 강 건너 저 멀리 있는 것이다.
연기암의 건물은 마치 저 멀리 있는 섬진강을 염두에 둔 듯 전망대처럼 일제히 한 곳을 향해 서 있다. 산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큰 암자 건물이 다소 생경스럽지만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아득히 먼 풍경은 가히 압권이다. 피안의 세계가 있다면 아마 저런 모습일 거라고 누구든 말할 것이다.
이렇다 할 건물이 없는 연기암에서 유독 나그네의 시선을 끄는 건물이 있다. 관음전이다. 문수전을 돌아 모퉁이 오솔길로 접어들면 한적한 산길이다. 그곳에서 바로 계곡 건너편에 검박한 관음전이 있다. 그 호젓한 분위기도 좋거니와 관음전에 서서 내려다보는 연기암 풍경이 그만이다. 부드러운 산세가 멀리서부터 가까이 몇 겹 겹쳐 암자를 둘러싸고 그 가운데에 고즈넉이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행여나 밋밋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는 미리 거두시라. 단순할 수 있는 풍경을 하늘로 장하게 뻗은 기름한 소나무 몇 그루가 일시에 바꿔버린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아득함이 아니라 편안함이다. 저 멀리 정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 정토임을 넌지시 말해주는 듯하다.
이번에는 다시 승방 일맥당으로 가보자.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승방은 거대한 문수보살상 뒤에 살짝 숨어 있다. 이곳에선 짙푸른 소나무 가지 사이로 섬진강 물줄기를 볼 수 있다. 연기암에서 보는 섬진강 풍경 중 이곳이 으뜸이다. 손에 잡힐 듯 말 듯, 가까운 듯 멀리 있는 강의 풍경은 굽이치는 산자락 물결 속에 그 근원을 깊이깊이 감추고 있다.
암자를 나와 숲길로 접어들었다. 비를 머금은 숲길은 고요로 충만하다. 이따금 지저귀는 산새소리가 아니라면 세상 따위야 쉬이 잊어버리겠다. 두 팔을 벌려 숲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깊다. 고요를 걷는다는 건 침묵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이도 잠시… 차들이 흙길을 달려 부르릉 힘겹게 올라온다. 적막과 고요는 일순 깨져버린다. 행여 연기암에 오시거들랑 제발 차는 두고 오시라. 오로지 자신의 두 발로 자신을 찾을 일이다. 연기암 가는 길은 그 자체로 연기암이다.
연기암
전하는 말로는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세우기 전에 이곳에서 토굴을 짓고 가람을 세워 화엄법문을 설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암자를 복원할 때 암수막새와 청자 편, 백자 편 등이 출토되어 그 연대를 통일신라 말 이전으로 추정할 뿐이다.
연기암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잿더미만 남아 4백년 넘게 축대만 남아 있던 것을 1989년 종원 스님이 각종 전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각으로는 법성원, 지석당, 적멸당, 원응당, 일맥당, 적광전, 문수전, 관음전이 있다. 연기암에는 높이 13m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문수보살상이 있다.
“채트윈은 자신이 여행한 곳들을 그저 보고 듣고 느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도착한 모든 공간을 여행이 깃든 땅으로 창조했다.”
한동안 책을 덮고 멍하니 있었다. 둔중한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머릿속은 복잡했고 오랜 기억의 편린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처럼 묵직했다. 콕 집어 단정할 수 없는, 감동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은 분명 아닌, 그 무엇이었다. 그저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브루스 채트윈(1940~1989)의 《파타고니아, In Patagonia》. 표지의 낡은 청색 재킷만큼이나 남루하지만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여행기이다. 그가 생전에 남긴 두 여행기는 《파타고니아》와 《송라인》이다.
《파타고니아》는 채트윈이 1974년 11월부터 6개월간 파타고니아를 여행한 기록이다. 여기서는 근사한 풍경이 아닌 광막한 파타고니아 사람들의 갖은 이야기를 스냅사진처럼 담담하게 담아낼 뿐이다.
다니던 신문사에 ‘6개월간 파타고니아로 떠남’이라는 전보 하나만 달랑 남기고 파타고니아로 들어간 것처럼 그의 여행기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파격의 기록이다. 사실 공방에 휩싸였을 정도로 기존의 여행서와 확연히 구분되는 그의 여행기를 읽다 보면 왜 ‘뉴 논픽션’이라고 불리면서 서점에서 별도의 코너까지 생겼는지를 알 수 있다.
“제가 늘 저지르겠다고 협박했던 짓을 드디어 결행했습니다.
오늘 밤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려고 합니다.
저는 파타고니아 대륙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작정입니다.
거기서 저 자신을 위한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늘 쓰고 싶어 했던 글을.
1974년 11월, 브루스 채트윈.”
파타고니아, 그곳이 아득해서가 아니라 채트윈의 지독한 여행기가 있어서 매혹적이다. 방랑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면 채트윈의 여행기를 먼저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